나뭇짐 한 모금
나뭇짐 한 모금
마음구석 기쁨 없는 기피에게 말을 건다. 나는 정면을 다해 구부러진 것들을 피하느라, 정면을 다해 나태해졌다. 그래서 비겁한 나를 마주하는 일이 더 어려워졌나.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 아니 그냥 태어난 우리. 싫은 구석 하나가 아니라 수백 가지를 한꺼번에 떠안고도, 덮쳐오는 것 앞에서 잠들어버린다.
고쳐보려고 깊고 녹푸른 소금이 되었다. 떼어진 것들을 바라보다가, 벗어나려고 상자 밖을 쾅쾅 두드려 보아도 올해는 새벽과 함께 새벽을 맞이했고, 결국 낮 따위가 돼버렸다. 우울에 잠식되지 않으려 애쓸수록 더 우울해지는 날이 있다. 이게 집착의 허무인지, 보이지 않는 불안의 습관인지 모르겠다. 다만 그 모양을 붙잡고만 싶은 나날들이었다.
몇 시간을 지나 진료를 보았을 때도, 왜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곰히 생각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젊은 사람들까지도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약, 그 병원이 그렇게 잘 듣나요. 괜찮나요.”
어떤 아저씨의 물음에 10분을 답변하는 동안, 그 질문이 이상하게 ‘살려달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비적비적 끌던 것만이 스치는 이상한 낮이었다.
귀가 없는 터널 속에서 속뜻만 바라보다가,
‘행복이라는 단어엔 허상밖에 없는 거지…’
마음대로 단정 짓는다.
나는 목적지 없는 환승역에 오래 서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개찰구만 만지작거린다. 배터리 없는 핸드폰을 쥔 채, 카드를 찍는 자리 앞에 선다. 닳아가는 건 손끝뿐이다.
해달토록, 이토록, 아픈 까닭은 어디에서 온 건지…
나는 끝내 모른다.
문단속해 손가락 끝으로만 모아놓고 중얼중얼 긁어본다. 어렴풋한 여름 냄새를 향수로 끄집어내 허공에만 뿌려본다. 휘황찬란해 내보이고 싶었던 일 년을 성급히 나뭇짐에 올려놓고 태워본다.
텅 빈 수고로움만이 날 위안해 주는 2025년 마지막 날, 이 글을 써본다.
돌이켜 보면, 문장 속에 흠뻑 빠지는 날이 있었다. 수상 소감을 내내 감상에 젖어 듣기만 했던 밤이었다. 그녀는 전투 가득한 역사에 남녘의 빛을 선사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최근 산문집을 읽으며, 식물에게도 깊은 소고록을 썼던 그녀가 소설을 쓰던 순간마다, 문장마다, 온점마다 아픈 역사를 꺼내야 했던 것들이 얼마나 깊은 심정으로 다가왔을지 곱씹었다.
우연히 서점을 들러 ‘오늘의 문장’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 피해만 다녔던 때도 있었다. 근 1년간을.
사랑은 고통과 함께인 것인가. 원래 한 몸이 아닌 것인가. 그런 물음들로 끝끝내 묻는 문체가, 그해의 내 텅 빈 수고로움에 기이하게도 빛을 얹어 주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글을 읽고,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은 채 제 감정에 온전히 몸을 맡겨 글로 써낸다는 일이 얼마나 용기 있는지 깨달은 한 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안녕하지 못한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묻는 안부만큼은
빈말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이 인사가
안녕을 가장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조금 덜 아프셨으면 좋겠습니다.
2026년도 또한
종내에는 안녕하시길.
©도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