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인의 인생유전과 종착지
알 수 없는 종착역
그는 어느 추운 한겨울의 서울역 대합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주 앉아 있던 벤치에서 패딩 속에 얼굴을 담그고 고개 숙이고 있던 한 여인이 갑자기 앞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야말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 한숨과 절망을 안고 육신과 함께 정신마저도 붕괴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조금 전부터 얼핏 시야에 들어왔던, 50대로 보이는 얼굴이 창백하고 의욕이 없는 듯한 여인이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러져 내린 것이다. 그는 다치지 않았나 걱정이 되어 다가가 일으켜 세우니 여인은 잠결에 쓰러졌다고 하면서 걱정을 말라고 하였다. 다행이다 싶어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잠결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계속 흔들거리는 게 아닌가. 술 냄새도 안나는 것을 보니 꿈결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부산행 열차를 타려고 대합실을 떠나려는 그 순간까지도 그 여인은 벤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어디로든 가려는 의지도 없고, 승차권을 쥐고 있는지 아직도 갈 곳을 몰라 종착역을 정하지 않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목을 꺾은 자세에서 간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을 보니, 행선지를 아직 정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떠나려는지 머물려는지 결정을 못한 채 어느 충동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그대로 실행하려는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경부선을 탈지 호남선을 탈지 결정을 못 내리고 가슴에 안고 있는 빛바랜 가죽 핸드백이 부르르 떨리고만 있었다. 어디서 본 듯 만듯한 얼굴이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에 전국으로 발령을 받아 돌아다니는 업무를 하고 있었다. 객지생활을 하다 보니 퇴근 후에는 잠재된 욕망의 방랑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역시도 내리는 역이 부산이기도 충주이기도 대구이기도 광주이기도 하였지만 종착역을 알 수는 없었다. 한 장의 발령지에 의해 한 장의 차표를 끊어 그 수많은 역을 경유하기도 내리기도 하였었다. 그 수많은 역에서 수많은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출신지도 서울, 호남, 영남, 산간, 섬 등으로 다양하였다.
그는 그 순간을 보고 그 옛날을 떠올려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미 예순을 넘었으니 많은 세월이 흐르긴 하였지만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었다. 대구에서 객지생활을 할 때 한 번씩 찾던 맥주집에서 속삭이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미스 리는 고향이 어딘지요. 경상도 말씨는 아닌 것 같은데 사연이 있소.”
“저는 서울이에요. 아는 사람들을 피해서 대구로 내려왔지요.”
“주점에 왜 이리 많은 예쁜 여인들이 우글거리는가가 궁금해지고, 예쁘니까 잘 살아갈 것 같았는데 그렇지를 못해서 궁금하네요.”
“오빠가 참 짓궂네요. 사람의 과거를 알아서 뭘 하려고 그러세요. 남들이 예쁘다고 하는 말을 좀 듣긴 했어요.”
그는 객지에서 주점에 혼자 가는 버릇이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는걸 술보다 더 즐겼다. 그의 심리에는 탐정 같은 기질이 아니면 화가 같은 소질이 잠자고 있는지 찾기도 그리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속되고 억센 남자들을 떠나 연약하고 부드러운 꽃밭을 찾는 건 그의 마음이 메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은밀한 장소에서 야릇한 분내음을 맡으며 에로스의 포로가 되고 싶어서일까. 낮 보다 밤이 더 기다려지고 포근한 이유는 내부에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잔이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첫 직업이 관광버스 안내양이었고 여행객을 모시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때 수입이 상당했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적성하고 딱 맞았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은 있었겠지만 그 길로 안내하는 운명을 비켜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 미스 리는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술술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답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관광버스 안내양으로 취업을 하였던 것이다. 하늘에는 스튜어디스요, 땅에는 관광버스 안내양이 아니던가. 골치 아픈 사무직에 박봉을 받는 것보다 괜찮은 보수에다 팁도 받기도 하며 전국을 공짜로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신의 직장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안정적으로 계속 근무하면 되는데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1박 2일 코스인 경우 숙박을 여행지에서 하는데, 돈 많은 승객으로부터 유혹을 받곤 하지요. 버스 기사 아저씨로부터도 자유로울 수도 없고요.”
“어느 해 서울 손님을 모시고 목포 유달산과 진도, 완도를 1박 2일 여행하는 코스에서 버스 기사 아저씨와 눈이 맞아 인생 길이 바뀌게 되었었지요. 저녁에 술 한잔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같은 방을 쓰게 되어버렸지요.”
“그 기사 아저씨가 가정불화인가 보네요. 이성이 좀 그립기도 하겠지만 아마 미모의 안내양을 보니 객지에서 욕망이 끓어올랐겠지요.”
“그 아저씨는 매너도 좋고 얼굴도 잘 생겼기에 나도 은근히 호감을 느끼던 상태이었지요. 내가 스스로 방을 같이 쓴 것이니까 후회는 들지 않더라구요. 다른 안내양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고 들었지요.”하고 그녀는 술김에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았었다.
미스 리는 처음에 보는 순간 웃음을 짓고 있었고 눈꼬리를 살살 흔들면서 바짝 다가오는 폼이 개방적인 것 같았다. 마음의 문도 쉽게 열고 또 다른 문도 잘 열어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 미소에 곁들여 꼬리 치는 눈길을 보고 남자들의 마음은 휘뿌연 담배연기처럼 이리저리 갈팡질팡 하게 돼있다. 요염한 자태 하며 윙크하듯한 눈매는 사내들을 도발케 하기 충분하였으니 야간에만 움직이는 직장에 어울리게 되어있었다. 낮과 밤을 바꾼 직업치고는 우선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미스리에게는 안내양처럼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마당이었다. 김양이니 이양이니 박양이니 하면서 부르는 어설픈 직장보다는 고상하게 영어로 황홀하게 불러주는 은은한 조명이 스르르 육신을 녹아들게 하는 그곳이 좋았다.
미스 리의 집은 그렇게 가난과 싸우는 처절한 집안은 아니었고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라는 자율적이고 자유스러운 집안으로 여겨도 결코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스 리는 낮보다는 밤이 좋았고 한 남자보다는 여러 남자에게 정을 주었다. 그녀는 헐리우드 스타들을 동경했고 은막의 배우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는 주말에는 여지없이 산으로 갔다. 자주 가는 계곡이었지만 그날따라 유심히 눈길이 갔다. 정상에서 내려오던 물길이 어느 큰 바위가 가로막혀 두 곳으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었다. 한쪽은 물길의 주류로서 순탄하게 아래로 흘러갔고 한쪽은 바위 샛길로 빠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얼굴을 나타내곤 하였다. 다시 낙엽밑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낙엽 주변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었고 한 마리 달팽이가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후다닥 하면서 산새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갔고 하늘에는 솔개가 맴돌고 있었다.
“허허, 주모 오늘 밤 허리끈 한 번만 풀어주어 보게나. 내가 이곳을 자주 오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달빛으로 그린 아미 눈썹에 백옥같이 맑은 살결과 양귀비처럼 요염한 그대의 얼굴을 가만 둘 수가 없구려. 부디 메마른 나의 가슴에 넉넉한 그대의 출렁이는 수밀도를 품게 하여 주구려. 나룻배가 낙동강에 올라타서 지나간들 그 흔적이 남겨지지 않는다고 아니하던가.”하고 한 편의 시처럼 읊조리는 한량의 하소연을 외면할 여인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아름다운 시에 흔들리고 진정한 애원에 동정심이 일어나는 순한 여인의 마음은 바람 앞의 등잔불인 것이다.
여인들은 왜 간절히 구애하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하는가. 달콤한 말에는 방어본능이 마비되고 사랑이란 단어에 전율한다. 그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어버리니 용기 있는 자 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옛말이 생겨났을 법하다. 그러니 미인들의 운명은 단란한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화류계에 빠져 젊은 시절에는 낭만은 있되 노년에는 외롭게 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인 것이다. 여인의 모성애와 동정심은 거짓을 구분할 줄 모르는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미인은 외로우니까 그것을 알아차리는 남자가 승자가 되고 우상처럼 받드는 사람은 패배자가 돼버린다. 여인은 길섶에서 길손이 꺾어주기를 기다리는 들꽃이기도 타락을 노래하는 창부이기도 하다.
그는 부산으로 내려오는 열차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기차는 이미 천안을 지나서 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덕 근방에서 철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고 그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서있었다. 서대전으로 가는 호남선과 직진하는 경부선으로 이별하고 있었다. 곧장 가면 대구를 거쳐 부산이요, 갈려져 가면 광주를 거쳐 목포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끊은 한 장의 차표가 사람들을 원하는 곳으로 실어가지만 어느 사람은 원하지 않은 곳으로 이끌려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여인들은 경부선과 호남선 어디를 타려고 하였을까? 나이가 삼십을 살짝 넘어섰다면 경부선을 타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지역은 돈이 돌아 소비를 하고 애욕의 수요가 많은 곳이기에 건강한 여인들을 기다린다. 화류계에 한번 발을 디디면 주홍글씨가 새겨져 벗어날 수가 없었고, 그리운 고향도 갈 수도 없어 들개들이 들끓는 광야에 버려진 운명이 되어버린다. 하루라도 그 애욕을 수용해주지 못하면 그 자신이 아파버리는 애욕의 중독자가 돼버린다.
호남선을 타는 여인들은 인생의 황혼기에 젖어들어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간다. 기생으로 말하면 퇴기이요, 호스티스로 말하면 끝물인 것이니 갈 곳은 오직 섬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은 나이가 들어 에로스의 관점에서 매력이 떨어지면 손님으로부터 외면받게 된다.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이 왕마담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모아둔 돈과 체력을 소진하며 황폐화되어 가는 것이다. 지금 경부선을 오르내리는 여인들은 언젠가는 호남선을 타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충주에서 만난 여인의 이야기이다. 열차는 이제 영동을 지나 추풍령을 목이 맨 기적을 울리며 달려간다.
“얼굴은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홍춘이를 닮았기도, 이름을 들으니 광부의 아들에 나오는 종말이를 닮았네. 말씨를 들어보니 강원도 출신 같기도 하네.”
“오빠는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참 싱겁기도 하네요. 내가 이 팔자에 숨길 것도 없고 하니 나의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 맞아요.”
“이왕 술 한잔 하면서 딱딱한 것보다는 좀 싱거운 게 안 좋을까. 인생만사 한잔술에 잊어버리고 외로운 객지 나그네를 따뜻하게 위로도 좀 해주게나.”
“나는 고등학교를 나와서 태백에 있는 광업소의 사무직에 취직하였지요. 그런데 폐광하는 바람에 실업자가 돼버렸다고요. 나도 모르게 음식점의 도우미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내 얼굴이 좀 받쳐주니까 주인 아들놈이 치근 되기에 그곳을 나와서 친구와 함께 빚을 내어 조그만 화장품 가게를 열었는데 이게 낭패가 될 줄이야.”
“그렇군, 사채업자한테 당한 거로구 만. 일 년 이자가 어마어마할 텐데 가게 영업이 안되면 손을 들 수밖에 없지. 보나 마나 결론은 대실패였구만.”
“어찌 그리 잘 알아맞춰요. 살인적인 이자로 모아둔 돈도 다 날리고 그래도 빚이 정리가 안 돼서 유흥업소에 나가게 되었지요. 이리저리 굴러 다니다가 고향 사람들 눈을 피해서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네요.”
“이제 나를 위한 인생은 포기했고 딱 하나 소망이 있다면 동생들을 배우게 하고 부모님께 사죄하는 일만 남았지요.”하고 홍춘이기도 종말이기도 한 여인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녀는 자기의 꿈과 반대로 흘러가는 인생행로가 기가 차기도 신기하기도 하였다. 하루아침에 아차차 하는 순간에 그냥 마음에 빛이 멈춘 별난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단란주점 주인 언니도 어찌 그렇게 자기의 길과 같은지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타고난 끼가 아닌 사업 실패와 생활고에 의한 일탈을 보았었다.
그녀는 가난을 떨치기 위해 열심히 살려고 하였지만 사회는 그녀를 가만 두지 않고 막장 같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저리 유흥주점을 떠돌다 보니 고향도 잊어버리고 가족들도 만날 수 없게 된 고아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웃을 줄도 알고 농담도 잘 받아주었고 아련하지만 꿈도 꾸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이 떠나지를 안고 동거를 강요하니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바둥거려 보았지만 허사였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타락하다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그 불청객은 떠나지를 않았다. 그 불청객은 그녀를 숙주로 만들어 마지막 한 방울의 진액까지 흡입하면서 동거했다. 그녀는 길들여졌고 부평초가 되었다가 갯미역이 되기도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되기도 하였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든 그물은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매일같이 옥죄어 나갔다. 도망갈 수가 없었고 구원을 기다릴 수도 없었고 오직 체념만이 숨을 쉬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래도 그의 농담을 잘 받아주고 별명에 웃음을 짓던 낙천적인 성격은 아름다운 인성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참으로 하늘은 무심하고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고 사람의 앞날은 한치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었다. 오늘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되었다. 한 인간의 성공은 사회적인 잣대가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기준에 의해 판정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비록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다가오는 상황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새로운 목표를 세워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여겨야 한다. 이번에는 그가 부산에서 만난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 열차는 동대구역을 막 출발했다. 부산까지는 한시간이 넘는 긴 거리이었고 도착의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구간이다.
“오빠는 정말로 별난 사람이네요. 보통 손님들은 시끌렁한 세상이야기나 신변잡기를 말하는데 무슨 사람의 과거를 파고들곤 하네요. 단란주점에 오면 노래나 부르고 춤만 추면 되는데, 나의 과거에 대해 자꾸 물으니 취재 나온 기자 같기도 하네요.”
“하하, 그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네요. 노래 부르기 보다도 여인들이 여기까지 흘러온 이야기가 궁금하여 미치겠어요. 왜냐하면 세상 곳곳에 내가 체험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들어보고 싶었기에 그렇네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봐야지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가치 있는 점이 있다니 말이 되지 않은 이야기예요. 돈이 있나, 가정이 있나, 그렇다고 친구가 있나, 있는 거라고는 남들도 다 가진 몸뚱이를 이끌고 몹쓸 자책감에 파묻혀 사는 것 밖에 없는데도 말이에요. 나는 별 볼일이 없지만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는 사람은 가치 있다고 말하겠지요.”하고 그녀는 짜증스럽지 않은지 슬며시 웃으면서 말한다.
그 노래방 도우미는 외로운 섬에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느 꿈 많은 소녀들처럼 뭍으로 나가서 살고 싶었단다. 얼굴도 보통이 넘고 몸매도 날씬하여 시골에서 청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자태를 갖추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그녀에게 구애하는 청년들이 많았지만 지긋지긋한 섬 생활이 싫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돈으로 가게를 하나 내어서 성공하여 동생들 학비도 보내고 부모님도 잘 봉양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얻은 첫 직장은 가락농산물시장이었다. 같은 고향 출신인 사장의 호의에 힘입어 경리 자리를 얻어 안정된 직장에서 미래의 꿈을 키워갔다. 그런데 그녀의 미모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말았다. 어느 날 퇴근 무렵에 사장이 자기를 부르며 같이 조용한 데 가서 저녁이나 하자고 하여, 고맙게 생각하고 의심 없이 그를 따라 나갔다. 사장은 직접 차를 끌고 와 옆좌석에 그녀를 앉히고 한강변을 드라이버 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미스 윤, 직장생활이 힘들지. 어려운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다음 달부터 월급을 올려줄게. 나를 고향의 오빠라고 여기면서 편하게 대하면 돼. 한 번씩 밖에 나와 드라이버도 하면서 서울 구경을 시켜줄게.”
“사장님, 말씀은 고마우신데 저 말고 사모님께 잘해주셔야죠. 남들의 눈도 있고 해서 조심스럽네요. 오늘만 그렇게 하고 다음부터는 사모님과 함께 드라이버 하시지요.”
“미스 윤, 나는 외로운 사람이야. 아내가 있지만 대화가 잘 안 되고 요새 방을 따로 쓰고 있어. 남자도 한 번씩 아내 외에 다른 여자가 그리울 때가 많더라구. 한번 부탁이니 딱 한 번만 눈감고 내 소원 좀 들어주면 안 될까.”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녀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양수리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딱 한 번만 소원을 들어달라는 데 막무가내 거절할 수도 없고 거절하면 직장을 잃어버릴 테고, 차 안에 갇혀 있으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있었다. 잘못하면 폭력적인 강간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운명이구나 하고 모텔로 반항 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인생의 변곡점에서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순결을 잃고 자책감에 사로 잡혀 장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고향 선배의 호의에 반항하지 못하고 동정심에 의한 허용이 무서운 자기 파괴적인 삶의 출발이 될 줄이야. 그런 트라우마를 안았기에 고향도 등지고 가족들도 찾을 수 없었다. 여인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호의에 대한 보답심리이며, 연약한 인간상에 대한 동정심에 기반한 모성애이다. 착하고 순할수록 그런 함정에 잘 빠지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을 잘 믿고 선의로 대하는 것은 올바른 심성이 맞지만 그 결과는 자기 파괴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음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여인들 대부분이 스스로 지은 악업이 아닌, 선의라고 착각한 판단의 착오로 수렁에 빠져버린 현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계가 어려워 가진 첫 직장에 적응하여 오래 근무하고 싶었지만, 경제원리에 의해 회사의 도산에 의한 외부적 요인은 어쩔 수는 없다. 직장 내에 만연하는 유혹과 강박에 의한 자기 파괴적인 결과는 방어할 수도 있겠지만 인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인은 한없이 약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다.
여인은 받아들이고 남자는 쏱아내어버리는 그 생명의 액체는 유독 여인들에게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만다. 자식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한없이 강한 면모를 미리 발현하여 사전에 위기를 넘길 수는 없단 말인가.
서울역 대합실에 그 쓰러지는 모습에서 그 여인의 행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여인은 경부선과 호남선 어디를 타려고 하였을까? 그녀의 나이가 중년을 조금 넘어 보였기에 경부선을 타려고 하였을 것이다. 부산이나 대구로 창원이나 울산으로 가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싶었을 것이지만 트라우마가 쉽게 놓아주질 않는다. 그간 몇 번인가 경부선을 타고 오르내렸지만 한 곳에는 정착할 수가 없었다. 목돈을 만들어 가게를 하나 세 들어 양품점을 경영하려는 꿈도 야무지게 꾸렸지만 돈은 잘 모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혹여 자그만 가게를 열어보았지만 매달 나가는 월세가 만만치 않고 이윤 또한 박하여 몇 번이나 사업을 접기도 하였을 것이다. 몇 번을 경부선을 오르내리며 정착지를 찾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불가항력적인 생계형이기도 선의의 허용형이기도 하다.
여인들의 운명은 예정된 것인가. 유흥주점에 가보면 얼굴이 예쁘고 매력적인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낮이 아닌 밤인 데다가, 술 한잔에다 분위기 나는 조명 때문에 황홀한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유흥주점은 에로스를 발산해야 하니까 종업원 구직 때는 최우선 순위가 얼굴이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비싼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일수록 미모는 비례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특성상 얼굴이 예쁘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그 미모로 전설적인 서시나 양귀비처럼 남자들의 혼을 빼앗고 싶은 본성이 내재해 있을 수도 있다. 예쁜 장미꽃을 가시에 찔리면서도 꺾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본성 또한 한몫을 하니 미인들은 항상 유혹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 유흥업소가 아닌 다방이나 음식점에서 일하다가 채홍사인 룸살롱 큰 마담의 눈에 들어 파격적인 제안에 흔들려서 직업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미인은 에로스를 추구하는 숱한 남자들의 도발과 나아가 채홍사의 전술에 휘말려 어두운 동굴로 점차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곳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갯벌의 수렁이라는 것이다. 한번 일탈한 몸은 주홍글씨가 새겨져 지울 수 없는 영구 문신으로 낙인찍혀 버린다. 그 무엇이 흔적이 남겠느냐고 강변하는 한량들이 있지만 보이지 않은 양심은 그것을 영원히 기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미스들은 이미 미스가 아니었고 미세스도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은 미스라고 부르지만 마더의 모습도 있었다. 그들은 자상하기도 억척스럽기도 하면서 자기를 증오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그 길로 몰고 간 세상에 보복하기 위해 철저히 몸을 피괴시켜나갔다. 갯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파도가 되어 분노하기도, 조용히 흐느끼는 조수가 되기도 하였다. 세상은 그녀들에게 냉소적이었고 그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꾸짖고 있었다.
화류계 여인들의 종착점은 흑산도라고 말들하고 있다. 그 시꺼먼 갯바위가 산을 이루고 검푸른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와서 허약한 사람들을 실어가는 곳,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인생을 되돌아보는 곳이다. 흑산도 아가씨라는 유행가는 자발적으로 그곳을 떠나려는 처녀들의 애환이 어려있으나, 화류계에서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파도처럼 밀려가는 운명도 있다. 젊은 시절에 도회에서 웃음을 팔았으나 나이가 들면 운명처럼 조류를 따라서 그 섬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모닥불의 희나리처럼 인생의 마지막을 처연하게 불사르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하, 이번에는 목포에서 새 마담이 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구마이. 나이는 60을 바라보지만 고운 자태는 그대로 이고, 얼굴에 주름이 좀 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향기를 풍긴다고 하더구마이. 오늘 저녁에 우때.”
“솔찬이 반가운 일이로구마이. 그 여인이야 갈곳이 없어 여기로 흘러 들어왔지만 고기 잡는 우리 같은 무지랭이 어부들에게는 감지덕지한 천사 인 게지. 안 그런가.”
“말해서 무삼하리. 나같이 여편네를 일찍 보내고 홀로 사는 넘에게는 하늘이 보내준 천사가 분명 맞을 것이여. 얘들도 모두 다 육지로 출향 하였는데 고향을 지키는 우리들에게는 무지 반가운 소식인기여. 안 그런가, 시방.”
“김서방이 신나게 돼버렸어. 그간 혼자 살면서 주위 과수댁들을 보고 껄떡거리더마 이제는 합법적으로 외로움을 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여. 안 그런가.”
“허허, 자네도 마찬가지 아니등가. 사돈 넘 말하고 자빠졌네. 자네는 여편네가 있지만 나이가 들고 실컷 갖고 놀아 싫증도 났을 테고, 그나마 잘 받아주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내린 축복이지 않겠는가.”하고 어촌 어귀에서 만난 나이 든 어부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다음날 흑산도의 늙은 어부들 몇 명이 새로운 마담의 얼굴을 보러 주점을 찾았다. 겨울 한철에 홍어잡이로 제법 많은 돈을 벌었기에 사회에 환원하는 미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불문율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흑산도 홍어는 찰지고 그 뒷맛이 아주 상큼하기 때문에 비싼 값으로 육지로 보내진다. 두둑한 전대를 풀어 반은 아내에게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한겨울 동안에 쓸 비자금으로 다른 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아내는 알지만 슬쩍 눈감아 주면서 서방님들의 노고를 슬며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또 홀로 사는 어부들은 그동안 품고 싶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에 돈을 풀게 되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우이, 주인 마담 안에 계시등가. 오늘 저녁 외로운 노털들을 위해 한상 크게 차려 주보드랑께. 소문 듣자 하니 육지에서 새악시가 당도하였다고 기별이 와서 마수걸이해줄라고 이렇게 찾아왔드랑께.”
“허허, 소문도 참 빠르당께로. 어찌 벌써 냄새를 맡고 날이 저물기도 전인 초저녁부터 찾아 왔드랑게요. 네 명이나 되는 대군을 몰고 왔는데 짝지를 다 맞춰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서들 오시요이.”
“우리가 이래도 냄새는 잘 맡지라. 홍어가 잘 삭았는지 감별하는 코가 있으니 사람냄새도 잘 맞지라. 짝 지을 마담들이 모자라면 주인 마담이 내 짝지가 되면 되지 무얼 고르콤 걱정들 하시등가. 안 그렇소, 시방.”
“우매, 김선부 영감은 능글맞기가 능구렁이 같당께로. 내 같은 퇴기가 무슨 매력이 있을 끼며, 있다고 한들 다른 사람 눈도 있는디 우찌 그럴 수 있당께로. 우짜든가 대군을 몰고 왔으니께, 그 노고로 바로 옆에 앉아 시중을 드릴랑께로. 오신 김에 찔끔찔끔 말고 한여름 소나기 뿌리듯 화끈하게 쏘고 가드랑께로.”하고 주인 마담이 김선부 영감의 말에 판소리 장단 맞추듯 시원시원하게 말을 한다.
이윽고 술판이 벌어지고 큰 상에는 푹 삭인 홍어는 물론 각종 회와 육류안주기 푸짐하게 올려져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이렇게 하여 새로 온 마담의 환영식 겸 신고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흑산도의 밤은 검은 어둠 속에서 황홀하게 깊어간다. 그날 저녁 새로 온 마담에게 입도 신고식을 해준 어부는 누가 봐도 선순위인 홀로 사는 김선부 영감이었다.
그날밤 새로 온 마담은 신고식을 올리고 흑산도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지금껏 수많은 지역에서 신고식을 올리고 새로운 출발을 얼마나 많이 하였던가. 그곳이 방랑을 멈추는 종착점이 되리라고 믿었지만 운명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 전국을 종단하고 횡단하며 지역 사투리도 다 귀에 익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건만 남는 것은 한해 한해 먹는 나이이었으며, 세상사람들을 보는 눈치만 늘었었다. 모아논 돈은 고향 동생들 학비에 보태고 나머지 움켜쥐었던 돈은 있으나마나한 기둥서방에게 뜯기고 말았다.
어느 날 제일 먼저 신고식을 올려준 김선부 영감이 혼자서 조용히 다시 한번 주점 흑산옥을 찾았다. 이미 구면인 데다가 운우지정을 나누었던 편안한 관계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지나온 과거를 묻게 되었다.
“선부님, 지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유행가도 모르시나요. 나 같은 천한 것이 무슨 인생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경부선을 오르내리고, 호남선을 타다가 경전선으로 타기도 하였는데 그 거리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겠지요.”
“허허, 집안에 큰 보탬을 주고 동생들 공부까지 시켰으니 좋은 일을 하셨네요. 우짜다가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는 말인기여. 나쁜 넘 한테 걸려들었던 것 같은데 안 그러면 망가질 리가 없는데 말이어여. 여기 어촌을 다녀간 마담들 대부분이 못된 넘 한테 잘못 걸려 신세를 망쳤다는 게 허다하디여.”
“그놈이 나쁜 놈인지 내가 나쁜 년인지 알 수도 없고요. 내가 독하게 하지 못해 그렇게 되었네요.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더만 딱 그 처지이네요. 흐흑......”
“마담 진정하시고 한잔 더 받아여.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고 털털 털어버려여. 안 울고 참고 있으면 병이 생기고 힘들어여. 여기 있는 숱한 마담들하고 우찌그리 비슷한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신기하네여. 여기 흑산도가 마담들의 마지막 쉬고 갈 고향인지 허참.”하고 새로운 마담하고 김선부 영감하고의 긴 대화는 마무리되고, 나머지 시간은 대화 없는 몸과 마음이 오고 가는 살풀이로 밤을 새웠다.
그는 십여 년의 세월이 더 흐른 후에 서울역 대합실에 무너져 내리던 여인을 흑산도 이야기에서 찾았다. 그녀는 서울역에서 또 부산으로 내려왔고, 유흥주점에서 일하다가 차츰 나이가 들자 받아주는 손님이 없어 새로운 일터를 찾아가야 했다. 몇 년 만에 본 서울은 별반 변함없이 그대로였지만 변한 것은 자기를 알아주고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나이는 쉰 줄에 들어섰으니 고객들과 교류는 언감생심이었고 단지 흥정을 붙여주는, 과거에 언니들이 하던 역할을 자신이 하게 된 것이다.
세월은 또 흐르고 하여 더 이상 그 삐끼 역할을 하기에 신물이 나서 다시 보따리를 싸서 파도소리 들리는 어촌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서울역으로 가서 그전에도 몇 번 오르내렸던 호남선을 다시 타게 된 것이다. 목포의 선창가 뱃고동 울리는 아늑한 주점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인들과 한 몸이 되어 또 몇 년간을 보냈다. 고기잡이하는 어부들을 상대로 한 화류방이었고, 그 거친 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보았다. 이곳도 더 이상 머무르기가 싫었다. 새로 옮겨가는 곳이 더 나은 곳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역겨운 체취가 응결되어 있는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유 없는 도피이며, 무한 반복의 유전이랄까 그렇게 정처 없이 흘러가고 싶었다.
그다음 날 그녀는 흑산도행 여객선에 몸을 실어 자신을 타락시키고 갈취하던 육지를 떠나 갈매기 소리 들리며 창창한 파도가 숨결처럼 밀려오는 그 머나먼 섬으로 떠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한숨도 눈물도 사치가 되어버렸고 그럴 기력도 소진되어 버렸기에 갯바위에 붙어 파도에 제멋대로 흔들리는 미역처럼 살아가기로 모든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죽으면 육지를 등지고 망망한 서해를 바라보며 지는 해처럼 낙조처럼 소리 없이 소용없이 저물어 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린 초저녁에 건너편 소흑산도 구명사라는 절이 있는 해변가에 커다란 불기둥이 일어나더니 시간이 지나니 차츰 사그라들었고, 몇 시간 후에는 한 척의 배가 등불을 밝히면서 움직인다. 그 장면을 보고 김선부 영감은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맞추어 구슬프게 혼잣말로 되뇐다.
“아, 오늘도 또 한 사람의 보살이 이 세상 구경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렸네요이. 외로운 사람들의 넉넉한 품이 되어준 여인이여 안녕히 가시시요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흑산도에서 여행을 끝마쳤구려이. 수많은 사람들을 품어 안으며 한 몸이 되어 주고 같이 흐느껴 주기도 여인이여. 그대는 어쩌면 관세음보살의 화신일 것이여. 마지막 꺼져가는 반딧불 같은 불빛은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작별 인사라고 알겠소. 잘 가시시요이.”
여자의 일생은 꽃길보다는 자갈길이 웃음보다는 울음이 많은 법이다. 그 인생길의 종착역은 수없이 많고 모두가 다르다. 그것은 강물처럼 거칠게 흐르다가 고요한 바다로 들어가기도,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처럼 난폭하기도 저무는 석양처럼 애잔하기도 하다. 철길을 따라가면 수많은 역이 나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도 하지만 서로의 종착역은 어디가 될지 누구도 모른다. 뗏목처럼 흘러가다가 뒤집어지기도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도착지이기도 하다. 종착역은 언제나 도착하는 손님을 기다리지만 다시 출발하려면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출발역이 돼버리기에 종착역은 다시는 도착할 곳이 없는 마지막 역인 것이다.
그는 이제 종착점인 부산역에 막 도착했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잠을 깼다. 서울역에서부터 몇 시간을 과거로의 긴여행을 하였다. 꿈결속에서 서울에서 충주로 대구로 또 다시 방향을 틀어 광주에서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역 앞에는 잠자리를 구하려는 노숙인들의 발길이 빨라진다. 길 건너 텍사스촌의 홍등 불빛은 사랑에 목마른 나그네에게 손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