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원각에서 길상사로, 김영한 보살
나의 보살에 관한 체험 이야기
나는 김영한 보살의 자취를 찾아서 대원각의 옛 모습을 버리고 변신한 길상사를 순례하는 일정을 잡았다.
김영한 보살과 같은 분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의 보살도를 행하는 불자를 말한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로 깨달은 사람을 말하나 지금은 여자 신도를 통칭하여 보살이라고 부른다. 남자 불자는 처사 또는 거사로 부르니 본래는 모두 보살이라고 함이 맞다. 청신사 또는 청신녀라고도 하여 청정한 보리심을 갖고 수행하는 불자에 대한 호칭이기도 하다. 그러면 여기서는 보살을 불심이 깊은 여자 신도라고 정하여 글을 적는다.
사찰에 가면 평소에도 남자 신도 보다 여자 신도들이 많이 보인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가정의 안온과 소원성취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고 그런 효험을 체험하였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처사 분들은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주는 못 나오지만 불사에 적극 동참하여 보시금을 많이 내는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사찰에서는 초파일 같은 큰 행사에 잔 손이 많이 필요하기에 보살들의 자원봉사가 절실하다. 보살들은 처사들보다 섬세하고 상냥하여 다양한 일들을 잘 소화해 내므로 절의 살림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닫는 속도는 처사분들이 빠르다고 스님들은 말하기도 한다. 보살들은 가정의 안녕과 성취, 재복에 관심을 주로 갖기에 기복적인 면이 강하다. 반면 처사분들은 그러한 기복적인 면도 없잖아 있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목표인 열반 즉 깨달음에 다가가기를 발원한다. 고승들도 비구니 보다도 비구가 많은 것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와 연관되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보살들은 천부적인 모성이라는 강력한 가족 보호의식이 우선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타적인 면이 다소 약하다고 보인다. 하지만 보살들이 보여주는 헌신과 보시가 없었다면 창건불사나 중창불사가 활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규모 있는 사찰에서는 스님들을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분류하는 데, 화두참선 등 수행에 몰두하는 이판승과 절의 재정 및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원주 스님 등은 사판승이라고 한다. 이판승과 사판승은 모두 사찰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이판승의 견성을 위한 수행을 돕기 위한 사판승의 헌신은 이타적이고 거룩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찰에서의 이판승과 사판승을 자연스레 나누듯이 신도들도 처사분들은 이판을, 보살들은 사판의 역할을 하는 게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영한 보살은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을 오랫동안 운영하며 부를 쌓기도 하였으나,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고 그보다도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기를 결심한다. 평소 불심이 깊어 사찰의 불사에 관심이 많아 무소유를 설파한 법정 스님에게 일임하여 전재산을 보시하여 길상사를 창건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전재산을 보시하여 사찰을 세운 보살들이 김영한 보살 외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느 보살의 이야기를 적어 본다. 나는 직장을 부산 중앙동에 있는 다소 편안한 직장에 다녔다. 업무 특성상 저녁에는 자주 술을 마셔서 낮에 숙취를 빨리 해소하여 맑은 정신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였다. 오전에는 숙취로 일을 제대로 못하고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회복하여 야근까지 하면서 맡은 일을 처리하여야 했다. 그래서 과음을 한 다음날이면 점심 식사를 빨리 끝내고 목욕탕에 들어가 빠르게 혈액순환을 시켜 숙취를 해소하여야 했다. 중앙동의 음식점 사이에 아주 오래된 ‘천초탕’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는 데 이곳이 나의 단골이었다.
이곳 천초탕은 건물은 허름하지만 목욕탕물을 자주 갈아 수질이 깨끗하기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호텔 사우나 대신 이곳을 찾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나와 같이 빠른 혈액순환을 통한 숙취해소가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 가면 안면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나서 탕 속에서 목례를 하곤 한다. 그 목욕탕을 운영하는 주인은 할머니로서 주로 카운터에 계시고 후덕한 성품에 소탈한 말이 친근감을 주어 인사를 나누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목욕탕에 비누나 샴푸, 스킨 등이 떨어져 고함을 치면 종업원을 시켜 갖다 주기도 하는 보살상을 지닌 자상한 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중앙동 본점을 떠나 지점을 전전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찾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그 목욕탕을 들런지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그곳을 찾아갔으나 목욕탕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하여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그 장소에는 목욕탕이 없는 것이었다. 부근의 가게에서 물어보니 목욕탕을 폐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지었다고 위치를 정확히 가리켜 준다. 나의 눈에는 천초탕 대신 색다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은 4층으로 된 새 건물로 간판은 ‘고심정사’이었다. 바로 해인사 백련암 부산포교원으로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택스님이 운영하는 도심 속의 사찰인 것이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목욕탕 할머니가 그 땅을 백련암에 보시하여 창건불사를 하게 되었단다. 사찰 이름도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고심정사여서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높고 순후한 마음(古心)인지, 할머니의 마음(姑心)인지, 깊은 신심이 깃든 청정한 절인지 의미 있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고심정사의 창건 사연을 정확히 알게 되어 적어 본다. 천초탕은 4층으로 된 오래된 건물로 1층은 남탕 및 여탕이고 2층과 3층은 여관이며 4층은 주인이 머무는 주택이었다. 이 건물을 갖고 있던 부부는 신심이 깊어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의 오랜 가르침을 받았다. 보살인 여주인이 어느 날 딸을 데리고 성철스님을 친견하게 되어 신묘한 인연의 연결고리가 형성되게 된다. 그 딸은 성철스님의 법문에 마음을 크게 일으켜 출가하게 되니, 현재 부산 재송동에 있는 옥천사의 회주로 있는 백졸(百拙)스님이다. 묘하게도 백졸스님은 성철스님의 속가의 딸인 불필(不必)스님과는 사범학교 출신에다가 출가동기이니 실로 성철스님과의 인연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할머니는 대법선(大法船)보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김영한 보살의 대원각 보시와 할머니의 목욕탕 보시로 길상사와 고심정사가 탄생하게 되었으니 보살의 공덕은 무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고심정사 인근에 있던 한 병의원의 원장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적어 본다. 중앙동 시절에 전매청 옆에 있던 중앙의원이란 조그만 병의원을 자주 찾았다. 원장님은 서울의대 출신으로 부산의 유명한 병원의 전문의를 거친 나이가 지긋하게 든 70대의 연로한 분이셨다. 첫인상은 틀림없는 스님상이었고 말씀 또한 온화하여 그야말로 화안(和顔)에 화안(和眼)으로 애어(愛語)까지 하시는 보살도를 행하는 듯하였다.
어느 날 과도한 업무에 스트레스까지 겹쳐 뚜렷한 원인도 없이 전신이 아프고 무기력한 증세가 찾아와 그곳을 찾아갔었다. 원장님이 문진을 하여 나의 증세를 답하고 나자, “별 것 아니야! 링겔 주사 한병 맞으면 돼!”하면서 시종일관 반말로 나를 대하였다. 나는 “선생님 검사는 받아봐야 정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을까요?”하고 반문하니, “허허 괜찮데도!”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수액주사를 맞고 일어나면서 약을 처방하여 달라고 하니 필요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약을 지어달라고 하니까, “정 그렇다면 이약은 약성이 없는 밀가루 같은 위약(僞藥)이니 먹어!”하시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하여 지은 약 3일분을 먹고 나니 감쪽같이 다 나아서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그 병원 원장님을 명의라고 여겨 여러 동료들에게 전파하니 모두들 효험을 보았다고 하였다. 나는 의사는 먼저 마음을 치유하고 나서 약물로서 치료하는 것이 올바른 진료행위라고 믿는다. 그냥 경미한 신경성인 병은 말로써 다 치료하고, 좀 중한 병은 일단 환자를 안심시켜 놓고 적절한 처방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명의라고 인정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일체유심조를 믿고,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몸은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말이다. 밀가루와 같은 위약을 투여하는 것은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는 일체유심조에 근거한 인술을 베풀어 환자들을 치유한 약사보살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나의 친척 중에 보살도를 행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나의 종조모되시는 분은 천성적으로 순하고 인정이 많고 지혜로운 보살이셨다. 어린 시절 시골 아낙들만 모인 사랑방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그 할머니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진사 따님으로서 한글을 익혀 글을 모르는 시골 아낙들에게 장화홍련전, 춘향전 등 소설들을 읽어주고 콩쥐팥쥐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눈물을 흘리게 한, 책 읽어주는 선생이기도 변사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전생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느 스님이 어느 가난한 시골집에서 좁쌀을 한 되 공양받아 오다가 배가 고파 세알을 먹고 나서 그 업보로 시주한 시골집의 소로 태어나서 십 년을 논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등 노역의 역할을 다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몸까지 공양하고 나머지 고혈은 등잔불의 기름이 되었다는 이야기이었다. 나는 어릴 적에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좁쌀 세네끼’라고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인과응보에 대한 필연성과 정확성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할머니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동네의 아낙들을 인솔하여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함안 여항산 산록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의상대까지 다녀오기도 한 불심 깊은 보살이었다. 그 당시 주변에는 남편이 일제 때 징병 가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아낙, 6.25 동란으로 남편이 목숨을 잃은 아낙, 딸은 많은데 아들이 없어 서러워하던 아낙, 자갈논 서마지기에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낙, 외동아들이 객지에 나가 잘되기를 바라던 아낙 등 많은 슬픈 사연을 안고 있던 아낙들에게 인과응보를 믿고 선행을 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고 책으로서 이야기로서 달래주던 분이셨던 것이다.
그 종조모님이 연로하여 더 이상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게 되자, 저의 모친께서 바톤을 이어받아 사랑방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한글을 익히시어 읽는 것은 문제가 없고, 글쓰기는 문법과 받침이 조금 틀리긴 해도 그런대로 완성도가 높았다. 군대 간 자식이나 도시로 돈 벌러 간 자녀들의 편지를 읽어주고 대필로 답장을 하여주신 것이다. 저의 어머니도 할머니 못지않은 연기력과 창작력으로 불효자를 효자로 만들곤 하며 동네 아낙들의 눈시울을 흠뻑 적시게 하였다.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하여 읽어 내려가는 자녀들의 편지는 모친의 감정을 이입하고 약간의 살을 보태 실로 아낙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였고, “효자 용한아 보아라”로 시작하는 애절한 아낙의 마음을 바탕으로 창작한 답장은 머나먼 도회에서 일하는 자녀들을 감읍하게 하였으니 그 대화의 중재자 또한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주상 보시가 맞지만 아낙들은 편지 대독과 대필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삶은 고구마 반 소쿠리와 동치미 한 사발이 전부이었지만 우리 형제들의 주린 배를 채우게 하였으니 아낙들 또한 우리에게 보살인 셈이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할까, 종조할머니의 딸이고 나에게는 종고모가 되는 분은 할머니 못지않은 자비심을 지닌 보살행을 하였다. 특별히 절에 나가서 하는 보시는 몰라도 주변 사람들을 매우 따뜻하게 대하였던 분이셨다. 내가 시골에서 내려와 부산의 중학교에 다닐 때 가정사정이 어려워 끼니를 굶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참 먹을 나이이기에 배가 고프면 대신동에 있는 고모님댁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내가 찾아가면 밥을 못 먹은 걸 벌써 알고 남은 밥을 정성스레 차려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은 맞는 말인데 그 아내에 그 남편까지 되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정이 되겠다. 고모부도 너무도 인자하시고 평등하신 분이라서 내가 가면 친자식 못지않게 대하셨다. 어느 한여름 고모님 댁에 하룻밤을 자게 되는 데 나를 나오라고 하여 땀에 찌든 등에 등물을 직접 쳐주시는 게 아닌가. 나의 등을 물로 씻어 내리고 쓰다듬으면서 “아! 장골이네.”하면서 등을 찰싹 때려주던 그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내 마음이 척박해지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자비가 무엇인가를 느껴보기도 한다.
다음으로 친구의 어머니의 보살행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닌 착한 친구가 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방학 때나 주말이면 그 친구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그의 집은 부유한 편이어서 먹는 것에는 거릴낄게 없었고 부모님 또한 인정이 많으셨기 때문에 부담 없이 드나들었다. 점심 전에 들러 저녁때까지 지내다가 오면서 점심, 저녁 두 끼를 해결하고 집으로 오곤 하였다. 보통 한두 번의 식사는 제공하드라도 꾸준히 하기는 힘든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어머님은 내가 집에 가려고 하면 극구 손을 잡고 밥을 먹고 가라고 하였다. 그것도 따로 챙겨주는 게 아니라 친구의 아버지, 형제들이 다 함께 먹는 밥상에 나를 앉게 하였으니 가족처럼 대우하셨던 것이다. 그 어머니는 나의 종고모님처럼 천성이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나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길래 나를 자식처럼 대해 준단 말인가. 참으로 인연의 미묘함과 본성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김영한 보살의 보시행을 적으면서 수많은 보살들의 자비를 체험하였으나 다 적지를 못하는 게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전생에 얼마인지 모르지만 자비의 공덕을 쌓았기에 그 선업의 열매를 얻어먹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나는 길상화 김영한 보살의 무소유의 공덕을 보고 적어 놓은 글을 올려 본다.
늦게 핀 길상화
외로운 인생살이 타고난 설운 운명
화류로 모은 재산 깨끗하게 다듬어서
떠날 때 부처님 전에 다 바치고 갔다네
젊은 시절 만난 인연 그녀 인생 바꾸었고
늙은 시절 만난 스님 바른 열반 가르쳤네
겉으론 애처로우나 모든 것을 깨달았네
고생으로 쌓은 재산 가져갈 수 없기에
물려줄 피붙이도 만들지도 않았기에
모두들 가족이라고 던져버린 무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