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김만덕과 정조와의 만남
민생을 구하는 김만덕, 개혁군주 정조
나는 김만덕과 정조와의 만남과 그의 신하들인 정약용, 채제공, 박제가 등을 통한 개혁에 대해 적어본다. 김만덕은 제주 주민들에 대한 구휼을 위한 대대적인 식량 배분 등 선행으로 정조로부터 상경하라는 자랑스러운 부름을 받는다. 한양 도성을 방문한 김만덕에게 정조가 소원을 묻자, 금강산 구경이라고 하니 비변사가 주도하여 근 6개월간 금강산 일대를 유람케 한다. 그리고 6개월간 도성에 머물며 궁중의 풍습과 한양의 풍물에 대해 견학을 하는 은혜를 입는다. 하기사 자신이 베푼 제주 도민에 대한 공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감격스러운 대우임에 틀림이 없다.
이 과정에서 김만덕은 채제공, 정약용 등 개혁신료들을 만나서 장차 제주도의 발전과 식량 자급에 대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는다. 특히 정약용으로부터 구휼 작물로서 대마도에서 들여온 고구마를 시배해 보라고 하여 모종을 전해받는다. 해산물외에 먹을 게 없는 현실에서 고구마는 제주도 토양에 잘 적응하여 시배에 성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민생을 중시하는 정조와 그의 개혁신료들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만백성들의 민생고들 들어주는 훌륭한 정책들을 입안하여 시행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실용적인 경제정책을 펼쳐나고자 한다. 청나라를 통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본억말(務本抑末)이라고 하는 농업 중시, 상공업 경시의 제도를 바꾸어 상공업을 장려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의 대표적인 제도인 북학이라는 실용학을 도입하여 가난한 조선사회에 접목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북학 학자는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정조는 이러한 북학파를 중심으로 한 실학파의 인재를 중용하여 새로운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으로 수원의 화성을 축조하여 신도시를 이루어 물류와 상업의 중심지로 키우고자 하였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사통팔달의 도로망과 육운, 수운, 해운 등의 수송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우리 국토는 산지가 많아 내륙의 교통은 지리적으로 어려운 여건이었다. 동서로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차령산맥 등이 가로막아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하고 경사가 급해 수레를 사용하는 운송이 어려웠다. 그래서 한양으로 보내는 세곡과 물산은 한강과 낙동강 유역에 조창을 두어 강을 따라 운송하거나 서해의 해안선을 따라 한강으로 진입하여 마포에 짐을 부리는 수운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관급을 위한 세곡선의 출입으로 이용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물류를 해결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국토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를 만들어 상공업을 활성화하고 각 지역의 물산을 집결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우선 화성신도시를 만들기 위해 성벽공사에 필수적인 기중기와 벽돌 등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수레를 개발하라고 명령한다. 이를 위해 청나라를 다녀온 박제가 등 북학파의 견문을 참고하여 필요한 기계와 기구를 만들게 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신도시를 통한 경제활성화의 꿈은 이상적이었지만 상공업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력인 자본과 기술의 한계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고 만다. 그렇지만 역대 왕들의 보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 실용화하려는 그의 구상과 열정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역대 왕조의 물류의 핵심 인프라인 도로망 건설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에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는 전략적 차원이라는 발상에 놀라울 따름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이 도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진군한 것에 놀라 그 이후로 도로 보수 및 확장을 방치하였다니 국가의 소극적 자세에 안타깝기만 하다. 도로는 국토의 동맥이며 실핏줄이다. 혈류가 원활하지 못한데 나라가 어찌 건강할 수 있겠는가. 국력이 약한 현실을 감안한 소극적인 전략이라고 하나 배달민족의 기상치고는 너무나 한심스러운 것이다.
반복된 외세침입의 원인은 사대부계급에 의한 문약한 정치와 무본억말(務本抑末)의 경제정책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의 유학이 성리학의 지배를 받아 사농공상의 신분적 구별과 군역을 필하는 데 양반계급이 면제되는 기득권층의 특혜로 백성들은 국가를 불신하고 오히려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점도 한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백성의 생존기반인 전답은 극소수의 사대부계급에 의해 독점되었고 농민들은 소작에 의존하니 자기 농토가 아닌데 어찌 공을 들여 생산성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무분별한 공신전의 남발과 사대부계급의 군역 등에 대한 의무의 면제로 백성들은 흩어져서 국토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는 데 이를 고치지 못하는 조정의 무능도 보태졌으리라. 국가는 환곡제도를 통해 춘궁기에 비싸게 양곡을 대여하여 가을에 거두어들이니 백성을 상대로 고리채 놀이를 하니 어찌 민심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실상을 잘 반영한 글이 있으니, 바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시골 한 농가의 재산이라고는 강아지 꼬리만 한 수수 한 다발과 추녀에 매달린 강냉이 서너 자루가 전부이고, 갓 낳은 송아지는 없는 아들의 군역에 대한 군포를 핑계 삼아 끌고 가버리고, 남은 것은 놋쇠 숟가락 몇 개와 무쇠 솥이 전부이다.” 이와 같이 정조시대에도 여전히 삼정인 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한 상태라고 보인다. 지방수령들이 중앙정부의 고관들에게 바치기 위해 정상적인 세금 외에 지역특산물들을 상납토록 하였으니 어찌 백성들은 흩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뼈가 빠지고 등골이 휠 정도로 일해도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고 그런 와중에 사대부계층이 면제된 부족한 군역까지 필해야 하니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정은 성리학의 이론논쟁으로 사색당파를 이루어 서로를 배척하고 사화를 일으키는 등 미약한 국력마저 점차로 소진하였으니 어찌 외세가 넘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군사들은 도망가고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하였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실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얼마못가서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고두례 삼배를 올리는 치욕을 안겼다. 이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지 못하고 명나라에 대한 군신관계의 예를 고집한 외교적인 무능이 부른 참사이었다. 기본적인 국력이 약하니 시대적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겠지만 자강과 독립이라는 국가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조는 이러한 국제정세하에 외교관계를 재정립하고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도입하여 자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계승되지 못한다. 왕권을 이어받은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되고 이어서 피의 숙청이 시작되니 그것이 신유박해이다. 천주교 신자를 대거 체포하여 처형하고 서양문물에 대한 배척을 하는 수구의 길을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위정척사라는 구호아래 나라의 문을 굳게 잠그는 쇄국정책을 펼치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다가 결국 국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마는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정조가 좀 더 집권하여 북학파의 실학을 중시하여 개혁의 길을 반듯하게 만들어 전승하였다면 외세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질적인 당파싸움과 사대부계층의 부패, 성리학의 신분차별과 상공업 경시 풍조가 국력을 쇠잔하게 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시대이다. 선비정신으로 의를 숭상하는 풍조와 충효에 바탕한 국가관은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인 성리학이 가져온 사대주의와 폐쇄적인 인간관은 국민단합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린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번 잃어버린 국가를 되찾는 것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아니한가. 수많은 의병이 흘린 피가 얼마나 될 것이며, 광복을 위하여 몸 바친 젊은 피는 또 어디에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직도 분단의 비극 속에서 갈라져 울고 있는 동포의 눈물을 언제 누가 닦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민심이 천심이므로 이를 아는 군주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믿고 있다.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논밭과 같은 국토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는 백성 즉 민초이며, 세 번째로는 훌륭한 지도자라고 말하고 싶다. 산야에 펼쳐진 땅에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잘 기르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농토를 일구어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키우는 농심이 있고 권농을 장려하는 자상한 임금이 있어야 하늘도 감응하여 비를 내리고 만물을 키우지 않겠는가. 그러니 민심을 헤아라는 군심이 있어야 하늘은 돕게 되니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민심이니 현명한 군주는 그것을 알고 있다. 우선 강토를 지키고 넓히며 거기에 양민들이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군주는 불철주야 신독(愼獨)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순시대를 태평성대라고 하며, 세종시대를 치세라고 평가하며, 정조시대를 개혁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정조는 개혁의 과실을 따먹지 못했지만 씨앗을 뿌렸으며 그것을 뒷받침한 실학파의 개혁신료들이 있었다. 불우하게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고질적인 당파싸움이 재연되어 후일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토, 민초, 군주는 있었으나 그것을 집행하고 뒷받침하는 관리들이 붕당을 형성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벌어진 사필귀정의 결과이다.
나라는 항상 누란의 위기 속에서 극복하거나, 방치하거나 해서 존망을 맞게 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있다. 거안여위 득총사욕(居安慮危 得寵思辱)이라는 고사성어가 와 닫는다. 편안할 적에 위기를 고려하고 총애를 받을 때 욕되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항상 적은 예상치 못한 뒷길로 다가오고 사랑에 취하면 언젠 가는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생의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국가는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고 민심을 잘 헤아려 선정을 베풀어야 국가의 생명력이 강해져서 국운을 오래 유지하게 되리니, 그것을 하늘은 지켜보고 심판을 하고 있고, 그의 바로미터는 민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만덕의 선행은 정조로 하여금 민초에 대한 구휼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제주도에 관곡을 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금껏 군주는 다수의 민초보다는 소수의 기득권 사대부 계층을 비호하였다. 단견을 가진 군주는 백성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이 잘 따라오니 체제를 보장해 줄 사대부계층에 신경을 썼던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 발생한 두 번의 반정과 수많은 세자책봉 문제를 훈구대신들이 주도하였기에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심은 조용히 침잠해 있지만 그의 성질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고 가라앉히기도 하지 않는가. 민심은 어지간해서 분노의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기다리지만 인내의 임계치를 넘으면 불붙는 것이다. 이러한 민심을 천심이라고 항상 존중하고 관찰하는 게 현명한 군주로서 치세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정조는 분명 민심의 향방을 알고 응당 민심을 다스리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눈이 먼 사대부계층의 이기적인 파당의 힘에 밀려 소신껏 경세를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정조를 개혁군주로서, 부친인 비운의 사도세자를 위무하기 위하여 화성을 축조하는 등 효성을 다한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한다. 거상 김만덕의 공덕을 찬양하여 도성으로 불러들여 치하한 그의 넓은 도량과 애민정신은 역사에 뚜렷이 자리매김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