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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운 Sep 20. 2024

19. 송광사에서 선암사까지

차일혁 총경과 이현상의 만남

 나는 김영한씨로 부터 대원각의 땅을 보시받아 길상사 불사를 일으킨 법정스님에 대하여 적어보고 그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펼쳐본다.

 법정스님은 우리에게 불법을 전하는 선사라기보다는 맑고 향기로운 글로서 대중을 일깨운 수필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글은 불교의 자비와 청정을 기본으로 수행의 길로 이끌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공수래공수거의 무소유를 설득력 있게 펼쳐 보인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그의 수필인 『영혼의 모음』 중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스님이 지은 많은 책을 읽어 수행의 참고서로 활용하고 있다. 다시 등장하는 『무소유』라는 책은 법정스님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책이름 자체가 수행의 화두이기도 하다.


 법정스님은 동화사에서 효봉 선사를 스승으로 하여 출가한다. 효봉 선사는 당대의 고승으로 많은 일화를 갖고 있는 분이다. 일제강점기 판사로 있을 적에 잘못 내린 사형선고 판결로 죄책감을 느끼고 엿장수 등을 하며 세상을 주유하다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서부터 밀양 표충사 까지 많은 사찰을 오가며 참회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고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자 하였다.

 법정 스님은 불자들 외에도 많은 독자들과 팬들을 확보하여 명실상부한 종교를 초월한 지식인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며 범종교적인 사회개혁운동에도 동참하는 유연성을 보이기도 한 시대의 선각자이다. 나는 종교 지도자로서 보다는 인간적이고 친근한 그의 성품을 존경한다. 무소유라고 던진 화두는 강력한 마력을 발휘하여 사회를 각성시키고 부자들에게는 자비를, 빈자들에게는 긍지를 심어주는 촉매제가 되었다.


 법정스님의 글 중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이 있어 소개한다. 사람은 만났지만 잊고서 점점 멀어져 추억 속에서도 지워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모습과 추억이 깊이 각인되어 잊을 수가 없는 경우가 사람마다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의 마음을 읽고 그를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은 잊을 수가 없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친목에 의한 정으로 만난 관계는 쉽게 식고 시절인연이 다하면 잊어진다. 그렇지만 침묵 속에서도 솔선수범하고 모두를 배려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쉽게 잊히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날 법정스님은 같이 수행하던 도반스님이 큰 병이 들어 시내로 진료를 같이 나간다. 동행한 스님이 버스 안에서 차체벽에 나사가 몇 군데 풀려 돌출해 나온 것을 보고 가지고 있던 주머니칼로 나사못을 조으고 있지 않은가. 법정스님은 그 장면을 보고 큰 울림을 받았다. 그것도 자신이 큰 병이 들어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말이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위급한 처지가 되면 타인이나 사물이 안중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게 인지상정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행하던 도반들의 고무신을 깨끗하게 수세미로 밀어 댓돌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도반들이 세탁하려고 벗어놓은 가사장삼을 일일이 씻어 말리고 풀을 먹여 다림질을 하여 모르게 살짝 선방에 갖다 놓고 하는 게 아닌가. 신발도 옷도 모두 남모르게 닦고 세탁하곤 하였으나 법정스님은 그 스님의 선행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소유의 마음에 출발하는 무주상 보시이기도 남이 모르게 하는 밀행이기도 하다. 그 스님의 법명은 ‘수연’스님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수연스님의 무주상보시가 만나 아름다운 이야기로 탄생하게 된다.


 길상화 김영한씨도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정신을 배우고 깨달아 막대한 재산을 보시하게 된 것이다. 대원각을 기부하여 불사를 맡아달라는 김영한씨의 부탁을 받고 몇 번을 고사하다가 보살의 간절한 염원에 마음이 움직여 결국 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투명하고도 사심 없는 청정보리심을 발휘하여 불사를 원만하게 이루어 현재의 길상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길상사와 대원각에 대해 얽힌 이야기가 있어 적어 본다. 고급 요정인 대원각은 처음에는 조그만 음식점으로 출발하였었다. 김영한 보살이 화류에 있던 시절 음식점의 주인은 뜻밖에 남로당 총수 박헌영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박헌영의 어머니에서 파생된 성이 다른 누이가 운영하여 나중에 대원각에 대한 송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 송사의 당사자는 박헌영의 아들이자 출가스님인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을 지낸 원경스님이다. 원 소유주는 박헌영의 어머니이지만 서로가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대원각을 크게 일으킨 건 김영한씨이기에 매우 어려운 송사이었다. 김영한 보살은 대원각을 법정스님을 통해 길상사로 탄생시켜 같은 조계종에 보시한 셈이니 이미 출가한 원경스님은 불법의 대의를 따라 송사를 접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여기에 등장하는 원경스님은 어떠한 속가의 인연을 갖고 출가하였는지가 궁금해진다. 남로당 총수 박헌영은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자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정신병자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교묘하게 출옥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두만강을 급히 건넌다.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의 님이 바로 박헌영이며,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이 바로 김정구 선생의 친형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박헌영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그에게 새로운 젊은 시골 소녀가 붙여진다. 그 소녀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기구한 운명의 원경스님인 것이다. 그는 월북한 박헌영이 북에서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숱한 고뇌와 긴 방황을 접고 불가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껏 송광사를 몇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송광사에는 법정스님이 오랫동안 수행하던 불일암이 있어 그 의미는 크다. 송광사에서 굴목재를 넘어 선암사로 가기도, 거꾸로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기도 하였다. 나는 최근에는 송광사에서 굴목재를 거쳐 선암사로 넘어간 적이 있다. 때는 4월 초여서 아직도 잔설이 응달에 쌓여있고 계곡에는 산수유가 봄이 이미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송광사 경내를 벗어나 조계산을 우측으로 돌아가는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시간은 12시경으로 식사를 굴목재에서 하기로 하고 천천히 계곡길을 걸어 올라갔다. 1시간여 만에 굴목재에 다다르니 유명한 보리밥집은 등산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이곳은 조계산을 오르고 선암사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중간 휴식처이기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보리밥 한 그릇을 먹고 내려다 보이는 풍광을 감상하기도 하며 생각에 잠겨본다.


 굴목재에는 여러 이야기가 숨어있고 그 사연을 알면 마음이 아파온다. 옛날부터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이 화전마을 이루고 살았으며, 6.25 동란 전후로 빨치산의 비트이기도 하였다. 여순사태로 발생한 군경과 반란군과의 전투는 유격전을 띄며 남도를 일대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천년 고찰인 송광사는 불타고 수많은 양민들이 빨치산에 협조하였다 하여 생사를 가른 일이 허다하였다. 광양 백운산과 조계산은 빨치산의 거점으로 토벌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으며 대부분은 쫓겨 지리산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장기전을 펼쳤다. 곳곳의 사찰은 빨치산의 은신처가 된다고 하여 불질러 버렸고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투 중에도 지휘관이 지혜로운 판단을 하여 사찰을 보존한 경우도 있었으니 천만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경우가 화엄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리산의 화엄사에는 밤에는 빨치산들이 거처를 삼고 낮에는 산중으로 피하여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휘부에서는 화엄사를 불사르라고 하는 작전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면 화엄사의 국보인 각황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들이 불타버리게 되니 천년고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상황이었다. 그때 지휘관인 차일혁 총경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각황전의 문짝 하나만 떼어내어 불살라 명령불복종이 아니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고찰이 불타는 것은 한나절이요, 새로 짓는 데는 백 년이 걸릴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하여 받아들여졌으니 그의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머지 지리산의 암자는 화마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고 후일 신도들의 중창불사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다시 차일혁 총경에 얽힌 이야기를 해본다. 그는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일제에 대항하여 무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 토벌을 담당하는 책임을 맡는다. 그런 과정에서 동족 간에 의미 없는 피를 흘리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군경에게 빨치산을 최대한 귀순토록 유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현상은 지금의 충남 금산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6.10 만세운동 참여와 이후 동맹휴학 주도, 노동운동 등으로 장기간 투옥되는 등 그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서로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에 의해 양분된 진영의 전투책임자이었지만 동질의 피와 애국혼이 살아 흐르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체제에 의해 고귀한 영혼이 손상된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빨치산이라는 이름은 일반에게 불순한 적색분자로 각인되어 있으나, 그 유래를 알면 다소 반감이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은 적국에 저항하여 유격전을 치르는 비정규군인 파르티잔에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파르티잔은 나치 독일에 저항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스페인 전쟁 시의 게릴라와 비슷한 비정규군이다. 다만 유고슬라비아, 소련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빨치산과 연결되었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사상도 빨갛게 물들었다는 뜻의 ‘빨갱이’라는 또 다른 이름과도 연결시키니 투쟁의 대명사가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오염되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차일혁 총경의 군경과 이현상의 빨치산은 피아골, 대성골, 빗점골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그러나 군경의 압도적인 병력과 무장으로 빨치산은 토끼봉에서 쫓겨 대성골로 모여들고 여기서 폭격과 사격으로 괴멸되다시피 하여 지리산 골짜기로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마침내 빗점골에서 은신하던 이현상이 군경에 의해 사살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인수를 거부하여 차일혁 총경이 섬진강변에서 칠불사 스님의 독경으로 유품인 염주와 함께 화장하여 골분을 자신의 철모에 담아 섬진강에 흘러 보낸다. 체제에 의한 노선은 달랐지만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사명에 동참한 동지로서의 예의를 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두 사람은 이데올로기는 달랐지만 서로의 인간미를 존중하는 포용력에서 나타나는 불자로서의 면모도 읽을 수 있다.  


 차일혁 총경은 말하고 있다. “아침에 논밭을 가는 농부에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과연 몇 명이 답할 수 있을 건가? 지리산 계곡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은 군경과 빨치산에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느냐고 물으면 과연 몇 명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서로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체제를 선택받도록 요구받아 서로의 피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운의 시대에 대한 소회라고 생각된다. 그의 말속에서 사상과 체제가 과연 민족과 동포애만큼 귀중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게 한다. 사상과 체제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하고 인위적이지만, 민족과 동포애는 항구불변한 자연적인 것이니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인위적인 세상사가 혼돈으로 다가와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 자연의 법칙을 참고하는 게 현명하다. 인위적인 것은 조작이 가능하며 영속성이 없으나 자연의 법칙은 있는 그대로이며 항상성을 갖고 있기에 그러하다.


 이데올로기는 상대를 배척하고 포용하지 못하며 극단적인 광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좌. 우라는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에서 보았듯이 어느 한쪽도 진리일 수는 없다. 그러나 좌. 우는 양극(兩極)으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것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진리를 향해가는 진로를 찾을 수 없기에 새의 날개와도 같은 것이니, 서로가 각각의 역할을 하여야 비상과 비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좌익은 왼쪽 날개요, 우익은 오른쪽 날개이니 그 어느 하나라도 없거나 손상되면 온전한 비행을 할 수 없듯이 필수적이며 상호보완적인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따라 정치도 체제도 그것의 필수성을 인정하여 상호 존중하고 장점을 수용하는 상생의 길로 가야 할 것이다. 진리는 양 끝단에 있지 않다는 중도의 원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리라. 극우는 군국주의를 낳았고 극좌는 일당 독재주의를 불러왔던 것을 되돌아보며 저울의 추처럼 상황에 맞게 좌우로 이동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민족이 분열하고 싸우는 양 끝단의 극단적인 배척을 지양하고 대화하고 포용하는 화합의 길로 가는 것이 지금껏 발생한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차일혁 총경은 공주경찰서장 재직시절 금강에서 수영하던 중 익사하고 말았으니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까지 이어져 온 비극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으니, 동족상잔으로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는 자책감에 시달려 흐르는 세월의 강에 떠밀려 간 것이다.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 승승장구하며 호사를 다 누리고 장수하였다면, 독립운동가 출신인 차일혁 총경은 화엄사 문화재 보호와 동포애에 의한 이현상의 장례가 항명과 불온으로 비쳐져 출세의 길이 막히고 단명한 삶을 살다 갔으니 역사는 항상 공평하게 전개되지 않은 아니러니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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