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광복을 위한 발원, 백용성 조사
광복을 위하여 몸 바친 스님들
나는 책의 마무리 단계에서 독립운동에 모두를 다 바친 선각자들과 무력항쟁을 펼친 의열단을 비롯한 의사들, 해방공간에서 좌우대립으로 억울하게 숨진 양민들을 포함한 남북군인들의 영령을 달리기 위해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평화통일의 당위성과 방법론에 대해 나름대로 적어보았다.
첫째, 민족은 한 핏줄이고 근본적으로 적대감이 없으니 연민으로 서로 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체제에 의한 이념대립으로 한국동란이 발생하였고, 각 진영의 지도층을 제외하면 모두 피해자일 뿐이다. 그들은 혹독한 36년간의 일제치하를 벗어나자마자 분단과 동란을 맞아 혈육을 잃고, 이웃을 적대시하는 체제의 희생자가 되었으니 연민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민족은 그대로이고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고 오로지 서로의 상처를 씻어주는 포용의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체제가 미워도 그에 속해 있는 백성들에 대해선 일체의 반감은 없고 오직 동포애만 존재할 뿐이기만 하다. 수많은 이산가족의 그리움을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통일을 앞당기는 평화의 가교를 놓는 것이 아닐까.
둘째, 진정한 화합을 위해서는 친일청산이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이 화학적으로 융합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에 의해 훼손된 민족정기 회복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광복이었건만, 한편에서는 독립을 방해하던 친일지식인층과, 독립운동가를 살상하고 체포하여 고문하던 친일군인과 친일경찰들이 호사를 누리고도 반성도 없이 엄연히 사회지도층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예들은 대대손손 부귀와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모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민족의 한이 되어 수십 년간 응결되어 지금도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고 반목질시로 기득권층 대 양심세력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친일세력에 대한 소급적인 응분의 조치와 후예들의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져야만 민족화합의 길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친일청산은 남과 북의 공통적인 과제로서 북쪽은 일정 부분 이루어졌으나 남쪽은 반민특위의 강제 해체로 원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족정기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남북은 자료를 공유하며 엄중하고 공정한 잣대에 의해 미루어진 친일청산을 완료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남북한의 대화에 의한 평화적 통일 기반을 조속히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를 훨씬 넘어 곧 한 세기를 넘길 상황에 이르렀다. 그간 이산가족 상봉이니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운영 등으로 민족 간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경제교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왔었다. 그러나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도층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 인권문제와 안보문제를 빌미로 그간의 실적과 기회적 요인이 무너지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분단된 독일이 민족의 동질성을 귀히 여겨 경제력이 월등한 서독이 동독을 포용하여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았는가. 그들은 분단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을 알기에 세대가 교체되어 민족동질성에 대한 의식이 쇠잔하기 전에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역사적 명제에 순응한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독일의 통일정책을 반면교사로 삼아 세대가 교체되기 전에 신속히 통일을 추진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
다음은 1990년대 말에 빗점골 아래 의신마을에서 대성골을 거쳐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길에 처절한 비애를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보고 적어 놓은 시를 올려 본다.
대성골
유월이 다가오면 가고 싶은 곳
흐르는 계곡물에 담긴 고혼
쫓기는 군화 발자국 소리가 있어
이 깊은 지리계곡 팔부능선에
피아를 구분키 어려운 녹음
저격병의 총성 뒤 쓰러지는 비명들
산너머 거림골에서
산 건너 피아골에서
삼신봉 토끼봉 거쳐 이곳으로 모였네
살기 위해 모였건만
죽음은 더 가까워
요란한 엘엠지의 불꽃 속으로
지금도 영신봉 아래
원혼 가득 모여
지나가는 산객을 현혹한다네
유월이 되면
의신사 절터에 철쭉꽃 피니
그때 흘린 피 아직도 다 안 말랐나
나는 다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굴목재를 넘어 선암사로 내려가는 순한 길이 나서준다. 잘 정도 된 등산로로 무리 없이 선암사 경내에 도착하였다. 선암사는 대처승을 허용하는 태고종의 본산으로 남도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절이다. 특히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는 석조 아치형으로 구도가 아름답고 그 아래로 흘러가는 계류의 소리는 정신을 맑게 해준다. 송광사에서 굴목재를 거쳐 선암사로 가는 코스는 6.5킬로미터로 비교적 수월한 길이다. 완만한 경사를 오르며 세속의 탁한 잔재를 토해내고 평평한 길에서 사색을 하며 내리막길에서 적당히 집중을 할 수 있는 만행코스라고 할 수 있다.
이왕 남도로 갔으니 다음은 일제강점기에 3.1 운동 독립선언서 33인 중 한 분이신 백용성 조사를 만나본다. 그는 현대 불교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다양한 활동을 한 분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출생하여 전생의 인연에 따라 스님으로 환생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어렸을 적에 자신의 집 가까이에 있는 암자에 대해서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전생기억으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백용성 조사에게 선사가 아닌 조사를 붙이냐 하면 그의 업적을 보면 이해가 된다. 불경의 한글 번역, 찬불가 제정, 선농일치, 독립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근대 한국불교 발전의 초조(初祖)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백용성 스님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일제의 한국불교 말살정책에 대응하여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스님들에게 계율로써 지키게 하였고, 일제의 대처승에 대한 배척을 벌인다. 조계종으로부터 축출되어 부득이 대각교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법맥을 이어가는 외로운 투쟁을 하였다. 3.1 운동 독립선언서 33인 중 일원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과 참여하여 모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10대 유훈을 남겨 그것을 실행토록 하였는 데 ‘용성조사 유훈 10사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 유훈을 지키기 위하여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동헌완규 스님에서 불심도문 스님에 이르기까지 실천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스님의 많은 상좌 가운데서 주목할 분은 동산 혜일, 동헌 완규 스님이다. 동산 스님은 범어사에서 주석하면서 성철, 광덕 등 특출한 스님들을 배출하였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결사라는 불교정화운동을 펼치고 백일법문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화두를 던졌다. 광덕 스님은 보현 10대 행원품을 실천하기 위해 불광법회를 만들어 도심에서 주로 학생들을 상대로 불교교화를 펼치셨던 분이다.
동헌완규 스님은 용성 조사가 3.1 운동 가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자 출옥 때까지 몇 년간 옥바라지를 하였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겼다. 동헌완규 스님이 백용성 조사의 법맥을 이어받아 용성 조사의 생가터에 죽림정사를 창건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동헌완규 스님의 상좌인 불심도문 스님이 현재 죽림정사의 회주를 맡아 유훈 10 사목을 실천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이처럼 백용성 조사는 꺼져가던 한국불교의 법등을 굳건한 신심과 불타는 의지로 되살렸던 진정한 조사인 것이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화두참선에 집중하였다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로 갔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그는 산속에서 갇혀있는 정적인 수행을 떠나 속세로 나와 대중과 함께 하는 열린 포교를 실천한 불교지도자이다.
백용성 조사와 같이 독립운동을 한 승려는 또 누가 있는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든 스님은 만해 한용운, 운암 김성숙, 김법린 등이고, 산문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한 스님은 통도사의 구하 스님과 상좌이던 경봉 스님을 빼놓을 수가 없다. 만해 스님은 익히 잘 알고 있으나 나머지 분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기에 적어본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승려로서 강력한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이회영, 신채호 등과 함께 의열단을 이끌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의 환국을 준비하면서 ‘약법 3장’을 통과시키고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대립이 아닌 통합의 길로 가도록 노력한 민족주의자이다.
김법린 선생은 범어사에서 출가하여 3.1 운동 때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만해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여 일제에 대항하다 투옥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구하 스님은 통도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은밀히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참히 처형된 불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는 등 애국애족 정신이 넘쳐났으며, 시인이기도 한 스님의 글 속에는 조국광복을 발원하는 내용이 깊은 법문처럼 은밀히 도사려있다. 상좌인 경봉 스님도 일제가 구하 스님의 독립운동을 한 혐의를 파기 위해 양산경찰서에 불려 가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 당시 양산경찰서에 근무했던 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사람이면 그렇게 혹독한 고문에 목숨을 잃었을 텐데 경봉 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버텨낸 정신력과 맷집에 감탄하였다.”라고 하였다.
나는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영규대사가 나서 왜군과 싸우고, 독립운동 전선에서 무장투쟁을 한 운암 김성숙 선생을 보면서 불교의 대의에 맞는가 의문을 품어온 게 사실이다. 승려는 출가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본래의 대의이다. 평화 시에는 물론 전시에도 살생을 하지 않도록 계율을 지키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적에 의해서 죄 없는 양민이 무자비하게 살상을 당하고, 수탈과 겁탈이 횡행해져 인륜이 파괴되는데 더 큰 죄업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나서서 큰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조기에 전황을 반전시켜 적을 물러나게 하여 살생을 최소화시키는 게 무자비를 자비로 돌리는 방책이라고 여긴다. 지극한 인이 의를 낳듯이 지극한 자비가 희생정신을 통해 불살생의 계를 지키려는 지혜가 아닌가 감히 말해본다. 비록 자신은 일시적으로 살생의 길을 갔지만 그에 대한 죄업을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면서 큰 살생을 막는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고 믿는다. 불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이니 전쟁으로 인한 살생을 막고 인류가 더불어 사는 상생의 길을 가도록 꺼지지 않는 법등을 밝혀야 할 것이다.
다음은 통도사 입구 무풍교 아래 반석에 새겨진 구하스님이 지은 한시 한수를 소개한다.
파수천년 통도사(波水千年 通度寺)
낙화삼월 무풍교(落花三月 舞風橋)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간결한 문장이지만 깊은 시정이 배어 있다고 여겨진다. ‘천년 고찰 통도사에 바라밀이 물처럼 흘러가고, 춘삼월 송홧가루 날리는 무풍교 주변은 솔바람이 시원하구나.’ 이 시는 구하스님이 깨달은 오도송과 같은 것인가, 물과 바람이 천년역사를 지켜보면서 현재에 이르니 오늘도 변함없이 물은 흐르고 바람은 흘러간다는 뜻이라 여겨진다. 시간은 흘렀으데 여전히 물은 제갈길로 흘러가고 바람은 쉼 없이 불어오니 변화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실상은 현재도 그대로 전개되고 있도다.
통도사 경내에 펼쳐진 무풍한송로는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는 부드러우면서도 치열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비의 바람으로 마음을 적시게 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정진하는 도반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으로 투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