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 위에 세워진 빛을 부정한다. [공연]

날 불태워도, 난 원해. 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by 손현진


[주의. 본 리뷰는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 잘 봐. 여기 이 '타오르는' 어둠을.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거라고. 해가 뜨기 직전이 원래 가장 어두운 법이라고. 어디에나 명과 암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런데 이거, 대체 누가 해준 말이더라.


믿고 싶은 것들이 있다. 언젠가 빛을 보기 위해 이렇게 힘든 거라는 믿음. 또는, 곧 빛을 볼 날이 찾아온다는 희망과 같은 말들. 하지만 결국 어둠 속에서 끝까지 발버둥 치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면? 차라리 그게 진리에 가깝다는 소문이 마치 병처럼 퍼지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뉴프로덕션


빛을 위해 어둠에 부딪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어둠에 낙관하는 사람도 있다. 그 타오르는 혼돈 속에 선 인물들이 바로 여기 있다. 까를로스이그나시오. 뮤지컬<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손을 들어주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


이토록이나 치열하게 싸우고 고통받고 흔들리는 인물들을 통해, 당신들은 정말 이대로 안주하고 있을 거냐고. 고통에 눈을 감고 취하는 행복을 정말 '행복'이라 부를 수 있겠냐고 말이다.


암전 뒤 막이 오르면, 가장 먼저 나무에 조명이 들어오며 극은 시작된다. 천천히 켜지는 조명들 속 '돈 파블로 맹인학교'의 전경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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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위에 세워진 학교를 향해 틱탁. 틱탁.


첫 장면. 확신에 가득 찬 학생들은 등장과 동시에 선언한다. '난 알 수 있어'라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날씨가 좋은 걸 알 수 있으며, 저 끝엔 가지가 무성한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있고, 의자와 테이블은 제자리에 있음을 안다. 거침없이 무대를 오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이 학교 학생들의 자신감과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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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늘 마지막에 등장한다고들 하던가. 학생들은 뒤늦게 등장한 까를로스를 반긴다. 방학 동안 도시에 갔다 온 까를로스는, 그곳이 '우릴 위한 세상'이 아니며, 바로 여기 '돈 파블로 맹인학교'만이 우리 세상이라고 말한다. 극의 배경이 되는 이 학교는 유일하게 앞을 보는 '도냐 페피따'의 가르침 아래 '우린 불행하지 않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도냐가 대표하는 정신은 바로 '철의 정신'. 넘어져도 좋다. 이 어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의지가 중요하다는 도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우린 스스로를 장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린 그저 앞을 못 볼 뿐이다.
우린 바깥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도냐는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다. 학생들의 보라색 교복을 보다가, 도냐가 신고 있는 보라색 신발을 보면 어쩐지 묘한 감각도 든다. 마치 학생들을 발로 짓누르는 것 같다는 섬뜩한 예감 때문일까.


도냐를 비롯한 학생들은 확신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순간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한 치의 오차 없는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불행이 끼어들 틈 없이 완벽해 보이는 이 학교에, 어딘가 불안한 소리가 들려온다.


틱탁. 틱탁.


ⓒ(주)뉴프로덕션


'이그나시오'. 학교에선 좀처럼 듣기 어려운 지팡이 소리와 함께, 1막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지팡이를 버리지 않겠다' 선언한 그에 대해 적개심을 품지만 '후아나'는 진심 어린 우정과 선한 영향력으로 그를 바꿀 수 있다며, 이그나시오가 학교를 떠나려 할 때도 그를 붙잡는다. 이그나시오는 제 고통과 갈망까지 끌어안을 사랑이 필요하다 고백하고, 후아나는 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이그나시오는 말한다. "난 이곳에 혼란을 불어올 거야."


그렇게 플롯은 한 번 꺾인다. 그의 영향력은 학생들이 '알 수 없다'라고 선언하기까지 만든다. 그런 이그나시오가 원하는 것, 그 욕망은 '앞을 보는 것'. 이곳의 즐거움은 위선, 거짓, 현실을 잊게 하는 속임수. 내가 원하는 건, 오직 앞을 보는 것. 때문에 이 안은 불타고 있으며, 나는 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 앞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와 싸우자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기와 믿음, 우리도 앞을 보는 자들과 똑같다는 자신감이라고. 극단에 선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는 '결투'하고, 2막이 시작된다. 2막의 주인공은 까를로스다.



행복은 (눈을 감는) 것


2막의 첫 넘버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압축적이다. 그건 도냐가 '행복'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는 넘버로, 행복은 고통에 눈을 감는 것. 더 바라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전한다. 하지만 이그나시오는 여전히 앞을 보기를 소망한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눈을 감으라는 도냐와 앞을 보겠다는 이그나시오의 대답은 이 뮤지컬 전체를 관통하는 넘버가 된다.



ⓒ(주)뉴프로덕션


학생들 대부분은 이그나시오를 따르며 고통을 마주한다. 흔들리는 분위기 속 까를로스는 제 자리를 찾겠다 선언하고, 도냐는 그에게 이그나시오를 쫓아내 달라고 부탁한다. 박해받던 예수를 처형한 건, 그의 동족들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면서. 완벽히 이해했다는 까를로스는 후아나까지 이그나시오에게 넘어갔다는 말을 듣지만, 초연한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그나시오가 추락한다.



까를로스는 누군가 위로 올라가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말하고, 이그나시오를 따르던 미겔린은 그가 비참함을 못 견디고 그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학생들은 이그나시오의 죽음 앞에 순식간에 돌아선다. 그래, 예수를 죽인 건 동족들이구나.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그 순간을 담은 넘버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 시작되면.



내 주어진 의미를 찾아 / 내 허락된 의미를 찾아


까를로스에게 의미란 '주어진 것'. 이그나시오에겐 '허락된 것'. 주어진 것은 어쩌면 신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뜻하고, 허락된 것은 선지자를 뜻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이그나시오를 밀어 죽인 까를로스는 이제 자신에게도 그의 병이 옮아 왔음을 직감한다. 지금쯤 저 별은 환하게 빛나고 있겠지... 만약 볼 수 있다면... 저 빛을 볼 수 있다면!


갈망하던 그는 끝내 그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인다'라고 발화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


모든 고통은 '앞을 보는 것'이라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갈망은 병적인 것이라 손가락질받지만, 이내 모두를 전염시키기에 이른다. 스스로를 불쌍한 장님이라 인정하는 그 정직이 환상과 이상보단 백배 나은 것이라 주장하는 이그나시오의 어둠은 불같이 타오른다. 이곳의 안전과 평화를 사랑하는 까를로스가 지팡이를 버리라고 주장해도 그는 이 지팡이만 있다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 반박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행복'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게 왜 당연한 건지. 우리는 계속 이 타오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건지. 이게 인생의 진리라면, 우리는 그 어둠을 외면해야 하는 건지. 또는, 그 어둠에 부딪히며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건지. 대체 행복이랄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고민하고 고뇌하며 사는 게 인간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였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9600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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