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후기(1)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셰익스피어적 드라마

by 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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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던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오펜하이머의 조합이라니!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자체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과학과 전쟁이라는 끔찍한 혼종이 탄생시킨 원자폭탄 이야기는 충격적인 미학과 풍부한 드라마의 최정점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과 전쟁은 사실 인류 역사 초기부터 뗄 수 없이 얽히고설킨 관계였다. 겉보기에는 전혀 닮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커플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떠먹여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빨대를 꽂아아 상대의 정수를 쪽쪽 빨아먹으며 함께 성장해온…그런 관계?


나는 두어달 전 부터 이 영화를 기다리며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의 <원자폭탄 만들기(The Making of Atomic Bomb)>를 읽기 시작했다. 영화의 원작은 <어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오펜하이머의 전기이지만만 이 주제에 있어서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내지는 “교과서”와 같은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를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터라 영화를 계기로 읽어보았다. 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함께 영화를 봤던 남편은 폭탄이 발사되는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거기까지 재미있었고 그 다음 조사위원회, 청문회 장면은 너무 길고 지루했다고 한다. 대중적 흥미만을 놓고 본다면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을 확인하는 폭탄 발사 장면을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잡고 그 이후는 분량을 최소화해서 간단히 정리하고 지나가는게 흥행공식에 맞는 연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짝 지루할 수도 있는 조사위원회와 청문회 장면을 길고 비중있게 가져간 것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독특한 성격이 가져온 비극적인 추락, 과학자가 사회와 맺는 관계, 그리고 주인공(protagonist)과 대립자(antagonist)의 드라마틱한 갈등 구도를 놀란 감독이 매력적인 이야깃거리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원자폭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냥 잘 만든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영화밖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셰익스피어적 드라마로 만든 요소는 바로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두 인물의 갈등일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몰락에 스트로스라는 인물이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두 사람의 갈등구도를 영화의 중심축으로 삼은 것은 놀란 감독의 천재적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물과 기름과 같이 너무 다른 성향으로 서로 섞일 수 없었던(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닮은 점도 풍부하게 공유한) 두 사람의 대립이자, 정치사회적 집단을 대표하는 두 인물의 대립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만큼이나 시대를 초월해서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듯...


둘의 삶과 성격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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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과 1958년의 오펜하이머)


예민한 부잣집 도련님


비범한 천재들이 독특한 면이 있게 마련이지만 오펜하이머(이하 오피)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섬세하고 예민하고 복잡하고, 불안정한 캐릭터였던것 같다. 오펜하이머는 집에 피카소와 반 고흐의 그림이 걸려있을 정도로 부유한 뉴욕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물 수입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고 어머니가 굉장히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어서 아들을 집안에서 꽁꽁 싸서 키웠다고 한다. 로즈의 책에 따르면 오피가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정하고 친절한 소년이었고 잔인함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처할 방법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 뭐 이런 식으로 회상했다. 청소년기에 방학때 캠프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따돌림과 폭행을 당하자 멀리 뉴욕에서 부모가 한걸음에 달려와서 데려간 일도 있었다.


한편으로 오피에게도 나름의 잔인함과 폭력성, 똘끼도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영화에서 지도 교수(패트릭 블래킷)를 독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여기서 닐스 보어가 먹으려는 순간 오피가 재빨리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린 장면은 영화적 허구이다. 그렇다면 오피의 독살 시도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독극물 사건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 조금씩 다른데 오피의 절친이었던 프랜시스 퍼거슨이라는 사람은 오피가 시안화물을 사과에 주입해 블래킷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진짜로 했고, 다행히(!) 블래킷에게 발각되어 사고를 피했지만 오피가 큰 곤경에 빠졌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실제로 수면으로 드러났고, 오피의 부모들이 뉴욕에서 날아와서 캐임브리지 대학에 로비를 해서 가까스로 기소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 결과로 오피는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기로 했고, 의사는 오피를 조현병에 해당되는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시절에 가장 힘든 나날을 보냈다. 오피는 하버드를 졸업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쉬 연구소는 당시 현대 물리학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20세기 초 전자를 발견한 J. J. 톰슨, 원자핵을 발명한 어니스트 러더퍼드, 중성자를 발견한 제임스 채드윅 등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이 곳에서 원자의 비밀을 파헤쳤다(러더퍼드 제자 중 11명이 노벨상을 받았다고). 그런데 캐번디시 연구소는 실험 물리학 전통이 강한 곳이었기에 실험을 좋아하지 않고 서툴렀던 (아마도 곰....손....? 반갑구랴^^) 오피에게는 굴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캐번디시의 분위기 자체가 뭐랄까...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차갑고 콧대 높은 영국인 과학자들의 태도로 이방인들이 처음에는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뉴질랜드 출신의 러더퍼드도,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도 처음에 모두 겪었던...) 자신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먼지처럼 하찮은 존재 취급을 받는 시간이 미국 상류층 가정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사회성 부족한 오피에게는 이래저래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예민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오피에게 안식처가 되어준 것이 바로 뉴멕시코주의 로스 앨러모스이다. 오피의 부유한 부모님은 오펜하이머 형제(로버트와 프랭크)가 어릴 때부터 가정교사를 붙여서 뉴멕시코주 사막, 로스앨러모스 근처의 별장에 보내주곤 했다. 오피는 이 사막지대의 안식처를 매우 사랑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이곳에서 재충전하고 힘과 용기를 얻어 다시 삶으로 돌아가곤 했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지만 "물리학과 사막, 그것이 나의 두 가지 열정(사랑)인데 그 둘을 함께 갖지 못해 슬펐다. 그런데 맨해튼 프로젝트로 그 둘을 함께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무튼,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캐번디시에서 고통받던 오피는 그 곳을 방문한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의 조언으로 이론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떠난다. 이곳에서 막스 보른의 제자가 된다. 당시 괴팅겐 대학교 역시 캐번디시(케임브리지)와 쌍벽을 이룰만한 물리학의 성지였다. 이곳에서 나중에 원자폭탄 개발의 맞수가 되는 독일측 대표 과학자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동료가 될 엔리코 페르미, 유진 위그너 등과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오피는 미국으로 돌아와 UC 버클리와 캘텍에 동시에 교수가 된다(당시엔 그게 가능했나봄). 유럽에서 막 피어난 양자역학이론을 미국 서부에서 가르치면서 인정과 인기를 얻으며 차츰 불안정한 유년기를 거쳐 정서적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리잡았다. 이 때 버클리의 물리학과 동료 교수 어니스트 로렌스와 친구가 되었다.


오펜하이머 vs. 로렌스


버클리 대학교 물리학과의 동료 교수였던 오펜하이머와 로렌스는 제각기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캐번디시에서 지도교수였던 패트릭 블래킷이 오펜하이머를 싫어하고 오피도 그를 증오했듯, 이 두 부류는 같은 물리학자이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는 듯하다. 이론물리학자의 대표적 인물은 아인슈타인이다. 그저 머리속으로 골똘히 생각하고 칠판에 끄적이는 것으로 세상을 뒤집어놓는 놀라운 발견과 통찰을 내놓는 진짜 찐 천재! 한편 실험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을 공부할만큼 충분히 머리가 좋지만, 머리 속의 추상의 세계에 사는게 아니라 맥가이버처럼 뚝딱뚝딱 실험 도구들을 만들어내고, 방사능 물질에 화상을 입어가면서도 수백, 수천 번 물질을 정제하고 분리하는 단순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실험을 수행한다. 이론가들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아테네의 후예라면 실험가들은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에 가깝다. (한 예로, 캐번디시를 20세기 초 실험물리학의 성지로 키워나간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이론물리학자들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닐스 보어는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누군가가 닐스 보어도 이론물리학자 아니냐고 하니까 "그는 달라! 그는 축구선수야!"라고 큰 목소리에 애정을 감추며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닐스 보어는 운동을 잘 했고, 수학자인 그의 동생 하랄 보어는 덴마크 대표팀 축구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 했다고...).


사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괄 관리자 역할로 많은 추천을 받아 물망에 올랐던 인물도 어니스트 로렌스였다고 한다. 그러나 레슬리 그레이브스 장군은 오피를 만나보고 '모르는 것이 없는' 그의의 박식함과 매력에 반해서 그를 발탁했다.


로렌스는 원형가속기인 싸이클로트론을 최초로 만들어내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다. 로렌스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싸이클로트론을 개조해서 폭탄에 들어갈 우라늄 U235 동위원소를 전자기적으로 분리해내는 일을 맡았다. 어니스트 로렌스는 영화 속에서 조시 하트넷이 그려낸 모습처럼 남자답고 듬직하고 원만하고 신뢰 가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오피와도 좋은 동료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오피는 신랄하게 남을 까내리는 버릇이 있었고, 로렌스에 대해서도 그가 물리학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자존심을 건드려서 로렌스도 오피를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영화를 보고나서 해외 유튜버들이 만든 컨텐츠를 이것저것 들어봤는데, 로렌스가 오피를 싫어하게 된 다른 이유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 점을 십분 이용했던 오피는 로렌스와 오피 두 사람의 지인이자 동료인 다른 과학자의 아내와도 불륜을 저질렀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아는 사람들만 포착할 수 있는 장면으로 그려져 있다고.


오펜하이머는 단연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인공이었고, 묵묵히 일한 수많은 과학자들을 대표해서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했으며, 스타 과학자이자 쎌러브리티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인듯 하다(그 중절모만 봐도...ㅎㅎ). 그러나 끝내 그는 정부와 정치인들로부터 팽당하고 몰락했다. 한편 어니스트 로렌스는 노벨상을 받고, 현재 미국 최고의 연구소 두 곳(레이저 핵융합으로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 얼마전 초전도체 LK-99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테마주 열기에 불을 붙였던, 미국 에너지부 산하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과 103번 원소(로렌슘)에 이름을 남겼다. 로렌스는 사실상 "버클리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자자 미국 정부의 인정과 물리학계의 존경까지 모두 받는 위대한 과학자로 남아있다.


인생사 새옹지마...


남을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신랄한 말 버릇을 로렌스는 친구로서 싫지만 참고 넘어갔지만, 참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루이스 스트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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