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옥 Jan 31. 2022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87)

극성맞은 필립 

12월 20일

# 극성맞은 필립


틀니를 꺼내려하면 틀니를 얼른 뱉어 틀니 꺼내는 일을 쉽게 하게 하고 옛날 일을 지금도 잘 기 억하고 몸에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처한 상황에 익숙해져서 만족함을 배운 시아버지, 지난 일 년 반 동안 건강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진 것 같지 않다. 

나: "이렇게 건강하니 그러다가 '요하네스 헤스테르'처럼 백 살이 되겠네요? 백 살까지 살고 싶으세요?"
시아버지: "그럼"

'요하네스 헤스테르씨'는 네덜란드에서 온 유명한 배우 겸 가수인데 몇 년 전에 '나는 백 살이 될 거예요'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히트했고 올해 백 살이 되어 텔레비전에서 큰 잔치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칠십이 돼서 백 살이 된 아버지를 모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 옴을 느낀다. 

인간은 여지없이 습관의 동물인가 보다. 시아버지도 이젠 처한 상황에 적응이 돼 느긋해졌고 화내는 게 뭔지 잊어버린 듯하고 맘씨가 좋아져 우리가 '간지럽혀도 돼요?' 하면 인심 쓰듯이 '응' 하고 '코 만져도 돼요?' 하면 '응' 하고 '극성맞은 필립이라고 불러도 돼요?' 하면 '응' 하고 뭐든지 허락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졌다. 아버지의 반짝이는 순진한 눈빛이 귀여워 우리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방에서 빈 플라스틱병을 갖고 툭탁거리며 부부싸움을 하는 시늉을 하며 방 중앙에 놓인 아버지의 침대를 뱅글뱅글 돈다. 한 사람은 쫓고 한 사람은 쫓기며 연극을 한다. 인생은 어차피 연극무대와 같은 거니까,, 연극의 주인공은 나와 내 남편, 무대는 아버지 방이고, 관중은 아버지다.  

누군가 오랜만에 만나면 으레 시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느냐고 묻는데 그래서 그렇다고 하면 대개는 잠깐 침묵이 흐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이고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 있어서 우리가 힘들겠다며 동정의 눈길과 말을 전하곤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 한다

그럼 나는 힘들지 않다며 그들을 안심 아닌 안심을 시켜야 하고 시아버지가 식사도 잘하고 아픈데도 없고 기억력도 좋다며 시아버지가 살아 있어도 좋다는 이유를 늘어놓는다. 

어떤 때는 바빠서 시아버지를 잘 못 봐 드리거나 소홀히 했다고 생각될 때, 시아버지가 꽤 우울해 보일 때 동정심, 불쌍한 감정이 분수가 뿜어 오르듯 솟아오르지만 통증이 있어 고통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처럼 진노하거나 끝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사는 자족함을 배워서 웃을 줄도 아니 우리들이 참고 노력한 가치가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인간관계이며 특히 가족 간의 관계이니 다른 사람에게 아니 가족에게 물을 많이 먹는 꽃나무를 가꿔 나가듯 신경을 써주고 사랑을 보여주면 꽃나무가 꽃을 피워 보답하듯 서로의 관계가 아름다워져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아버지를 도우며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쓰다듬기도 하며 좋은 말도 하고 이제는 조용하고 행복해하는 시아버지를 보며 나 역시 '돕는 자' 로써의 행복감을 맛보며 오늘도 우리 시아버지가 우리 집 아이인양 돌본다.  



7월 15일 (2003) 

오늘로 조화 가게문을 닫기로 했다.

그동안 꽃 가지고 일을 많이 해서 실력이 많이 늘었고 재미있어 좋은 취미생활을 했다고 쳐야겠다. 조화가 워낙 비싸고 내가 시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신경을 못 써 겨우 유지만 하느니 문을 닫고 시아버지를 성심껏 돌보기 위해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취미 삼아 꽃꽂이를 하거나 아는 사람들이 결혼식 때 꽃이 필요하면 생화로 꽃꽂이를 해주곤 한다.. 

작가의 이전글 파란 눈 시아버지, 우리 집 아이 (8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