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시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이 문장이 처음엔 체념처럼 들렸다. 어쩌면 패배주의처럼 들린다.
영화〈컨택트〉는 인생의 주요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형이다. 칼 세이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외계 문명이 인류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었다. 우주가 이미 짜놓은 패턴이었고, 주인공은 그 흐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시간은 타임라인을 따라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미 거기에 놓여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안에서 인과의 화살이 한 방향이 아닌 원을 그리는 세계관이 된다. 처음엔 SF적 상상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런데 한 지점에서 멈췄다.
우리는 태어날 나라를 결정하지 않았다.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시대도 성별도 내가 고른 게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 억울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처음부터 내 이야기의 일부였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이론에 꽤 큰 점수를 줬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일어날 일을 살아내야 하는 주인공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빅터 프랑클은〈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이 물음에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답한다. 강제수용소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는 극한의 공간이다. 언제 죽을지도, 내일 밥을 먹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프랑클은 한 가지를 발견한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하나만은 빼앗을 수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선택하는 자유다.
세상이 무엇을 던지든, 그것을 어떻게 받아낼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사건을 해석하는 권한이다. 그 틈새에 인간의 존엄이 있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체념이 아닌, 전제로서 읽는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싸우는 데 에너지를 쓰는 대신, 오직 내가 결정할 수 있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나의 태도는 온전히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