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김치, 사랑, 결혼 그리고 앞치마

by 김소연 빛나는 숲


“엄마! 나도 김장해보고 싶어.”


아이가 막무가내 떼를 쓴다.

아빠를 닮아 심지가 굳다. 물러서는 법은 내가 배웠다.


“어머님, 김장 언제 하실 거에요? 수아가 김장해보고 싶대요.”

8년을 기다린 듯 수화기 너머 반가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결혼 전 시댁에 처음 인사드리러 간 날이었다.


어머님이 정성껏 차려주신 밥상 앞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오리백숙에 황기, 당귀, 감초, 녹각, 능이버섯이 가득 들어가 깊고 진한 국물맛이 일품이었다. 반찬도 맛있었다. 오가피순, 다래순, 머윗대, 취나물은 봄에 나온 새순을 따서 염장해 만든 거라는데 염장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봄나물을 여름에 먹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밥상 축제의 꽃은 물김치였다. 커다란 대접에 무심한 듯 담긴 동치미 물김치가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얼음 폭죽처럼 시원하고 맵싸한 게 중독되는 맛이었다. 시부모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영준 씨, 물김치 좀 싸달라고 해요.”


물김치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던 걸까. 만난 지 5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내 판단은 큰 착오였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 어머님의 손맛을 평생 누릴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내가 놓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미 어머님의 밥상을 평생 맛보며 자라온, ‘맛을 좀 아는 남자’였던 것.


시댁에서는 밥을 두 그릇씩 뚝딱 비우던 그가, 결혼 후에는 입 짧은 남자로 변했다. ‘맛있어?’ 하고 물으면 그는 짧게 ‘응’이라 했고, ‘더 줄까?’ 하면 어김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애매한 표정만큼이나 내 마음도 복잡했다. 마치 예견이라도 하신 듯, 어머님은 손수 끓인 고깃국과 나물, 멸치 반찬들을 부지런히 택배로 보내셨다. 그 정성이 고맙기도 했지만, 때로는 야속하기도 했다.



나는 매일 밥만 했다. 시댁에 가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방의 주인은 언제나 어머님이셨고, ‘앞치마’ 또한 어머님의 몫이었다.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솜씨도 기술도 부족한 나는 두 손을 모아 쥔 채 불안스레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새 어머님 어깨너머로 눈길이 닿았다. 소금 약간, 버섯가루 한 숟가락, 물엿 한 바퀴…. 그렇게 나는 어머님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맛을 조금씩 마음에 담아 두었다.


몇 해가 지나자 반찬 택배가 끊겼다. 힘이 부치셨던 걸까, 아니면 며느리의 마음을 살며시 헤아리신 걸까. 그때부터 맛이 있든 없든, 내가 만든 음식들이 식탁을 채우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국도 찌개도 제법 끓여낸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외국인들의 한식 먹방 영상을 보게 되었다. 요즘은 외국에서도 한국 음식이 큰 인기를 끈다고 한다. K-콘텐츠의 흥행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의 밥상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다니 놀라웠다. 그 순간 아주 작은 부끄러움이 내 안에서 일렁였다. '정작 나는 한국 사람인데, 그 유명한 김치조차 만들 줄 모른다니… 한국 아줌마 체면이 말이 아니군.'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던 찰나,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딸아이가 외쳤다. ‘나도 김장해보고 싶어!‘


김장하는 날 아침,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깨워 서둘러 집을 나섰다. 운동회를 앞둔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또 긴장됐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자 생각보다 일찍 문경에 닿았다. 차가 멈추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댁 현관문이 열렸다. 늦은 밤까지 배추를 절이셨을 텐데, 시부모님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이들의 포옹을 받으며 지난 고단함을 씻은 듯, 두 분은 진심이 담긴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잘 왔다! 우예 올 생각을 다 했노. 기특하데이!”

어머님은 반가움 가득한 눈빛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 순간, 김장 때마다 아이들을 핑계 삼아 오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용서를 구하지도 못한 채 멋쩍게 웃으며 어머님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다.


“어머님! 저 김장은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이번에 어머님 비법 전수받을 거예요!”

시작부터 거창한 포부를 내뱉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의외로 고요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고무 대야 두 개에 가득 담긴 엄청난 양의 절인 배추뿐.

이 많은 배추들이 어떻게 김치가 되는 걸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괜히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 나갔다가 너 줄려고 사왔다."

어머님은 찻잔을 꺼내듯 조심스레, 그러나 환하게 웃으며 예쁜 앞치마 하나를 내보이셨다


"마음에 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