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엄마 어디 가?”
“아빠 왔으니까 이제 아빠랑 있어. 엄마는 책 좀 보고 올게.”
아이는 붙잡을 수 없는 이유에 아쉬움과 체념, 미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자연스레 단골 카페로 향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코너 자리에 앉았다.
모이고 흩어지는 수많은 삶이 스쳐간 공간, 언젠가 나도 사라지겠지. 소스라치는 감정을 뒤로한 채 책을 펼쳤다.
빙글빙글 책 속으로 떨어진다.
이번 주인공은 『안나 카레니나』.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흐른다. 책의 힘이자, 책의 마법이다.
스무 살 이후 나는 책의 권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언제나 가방 속에 책을 모시듯 지니고 다닌다. 어린 시절 ‘책에 길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길은 늘 출세와 성공을 향해 있었다. 마음을 위로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 젊음의 반작용처럼 찾아온 불면의 밤 덕분이었다.
그리고 책에서 길을 찾았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볼 거예요. 외로울수록, 친구가 없을수록, 의지할 데가 없을수록, 나는 나를 더욱 존중할 거예요.”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우리는 스스로를 잊기 위해 사랑에 빠진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살고 싶어요. 생의 전부를 사랑해요.”
(루이제 린저, 『생의 한가운데』)
문장들은 깊은 밤 내 마음의 등불이 되어주었고, 나는 책 속에서 스스로를 보듬는 방법을 배웠다.
책의 위로와 공감이 주는 치유의 능력이었다.
그런데 책이 가진 능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잠을 잘 수 없어서, 삶이 무료해서, 혹은 더 큰 자극을 찾아 마약에 손을 뻗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끝은 중추신경계의 손상과 파멸이다. 하지만 몸을 해치지 않고도 황홀과 환희, 환각에 가까운 세계에 닿을 수 있다면 믿겠는가?
나는 수년 동안 책을 통해 그 세계를 맛보았다.
책 속 이야기가 내 안으로 온전히 스며드는 순간, 황홀함과 짜릿한 기쁨을 맛보았고 “제인 에어”의 한 대사가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아, 남자 주인공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대목을 읽을 때면 내 머릿속의 고성능 영사기가 작동해 넷플릭스보다도 더 다채롭고 생생한 화면을 펼쳐내고 어느새 내 얼굴은 불그스레 물들였다.
먼 길을 갈 때도 책을 펼치면 한 시간이 삼십 분처럼 짧아졌고, 시끌벅적한 지하철 안에서도 책 속에 빠져들면 마치 내 주위에만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드리워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가 날 때도 책은 통한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 한 알의 안정제처럼 마음을 다독여주며 평화를 되찾아 주었다.
(TIP: 물론 좋은 책을 만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반드시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니다. 서점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무명작가의 책, 낯선 외국 소설가의 작품이 오히려 최고의 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서점으로 향하라. 베스트셀러도 살펴보고, 오래전에 출판되어 책꽂이 뒤편으로 밀려난 책들도 찾아보라. 그리고 마침내 책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다면, 속으로 조용히 ‘야호!’를 외쳐라.)
"아내의 감정적인 태도에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물, 화, 외면 모두가 자신에겐 해석 불가능한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는 논리와 이성으로 반응했지만,
그것이 그녀를 더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안나카레니나 中-
얼마 전 부부싸움 후 『안나 카레니나』를 펼쳤다. 일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남편 카레닌의 좌절을 읽으며, 내 남편의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의 눈물과 분노가 해석 불가능한 언어처럼 느껴진다는 대목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행성에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독서가 실생활까지 손을 뻗친 그런 날은 내가 먼저 남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고집 센 아내의 변화를 실감한 남편은 나의 독서생활에 호의를 갖게 되었다.
오늘은 호르몬의 영향인지 며칠째 지속된 독박 육아에 지친 탓인지 유난히 예민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남편은 아내의 표정과 말투에서 불필요한 감정 다툼을 예상했는지 급히 아내의 등을 떠밀었다.
“애들은 내가 재울 테니, 나가서 책 좀 보고 와.”
주섬주섬 책가방을 둘러메고 나서려는 순간, 아이가 막아섰다.
“잠깐만! 엄마 어디 가?”
책 속으로 뛰어드는 나의 도피와 위로는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