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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Apr 10. 2022

인생은 사실 모순으로 가득해


 자기개방.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것인가.  특히나 나의 불행과 시련에 대하여. 누구에게 어디까지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나의 이십대 동안 지속되었던 고민의 화두였던  같다. 2 말에  읽은 책이지만, 수없이 많은 밑줄을 곱씹고 소화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 글을 쓰기까지   남짓의 시간이 필요했다.


 네이버 사전에 ‘솔직하다’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라는 정의가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거짓말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야기하라’는 어머니의 일관적인 양육에 도덕적이고 다소 융통성없이 강박적인 나의 성향이 합쳐져 ‘솔직하다’는 것은 내게 반드시 지켜야 할 미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리고 이십대 초반에 맞이한 시련은 내게 조금은 왜곡된 하나의 신념을 얹어주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힘들어지고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만큼은 그 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과 맥락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나를 위한 마음과 더불어, 남겨진 사람들이 ‘내가 알아주었더라면, 나는 왜 몰랐을까’하는 자책과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들, 고민과 힘든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늘 솔직하고 나를 있는 힘껏 열어보이는 그런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내 생각이나 마음, 일상을 모두 오픈하는 것에 부담감이 있었고 좋은 것들만 요약적으로 이야기하며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편에 속했다. 자라 오는 청소년기까지 실제로 큰 시련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불편하거나 거북할 수 있는 무거운 고민이나 마음들을 이야기하기는 꺼려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맞이한 성인 초기의 커다란 시련은 나를 가득 메꾸어버렸고 이를 말하고 이해받지 않고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진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고, 나아가서는 반작용처럼 시련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나 생각까지도 모두 말하고 나라는 사람을 알려야 한다는 강한 관념에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이십대 초반의 나는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고 가족과도 밀착되었으며,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으나 친구와 가족에게 연락도 먼저 빈번하게 하였다. 이 시간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솔직한 진심이 통하는 순간을 통해 위로받기도 했고, 내 솔직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의 형식적이기만 한 반응이 돌아오는 순간들을 통해 ‘누구에게 얼만큼 솔직할지’ 그 정도를 조절해갈 수 있게 되었기에.

 그러나 이러한 솔직함을 지속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 설명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인데,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은 내 한정된 에너지와 체력을 계속해서 작은 구멍으로 새어나가게 하는 일이었다. 솔직하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를 열어보이는 것이고, 내가 열어보이는 만큼 상대가 내게 개입하고 이렇다저렇다 말을 얹을 여지를 주는 것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솔직히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상대로부터 수용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에서 고치고 바꾸었으면 좋겠는 상대들의 각기 다른 요구가 들이치는 혼란’으로 귀결되곤 했다. 모순적이지만,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은 부모조차도 해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도 충분히 성공한 삶인 것을 생각해보면 실로 그러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순(양귀자, 쓰다) p. 157



 나의 학창시절에는 내 마음과 이야기를 꽁꽁 숨기고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였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는 내 마음을 한껏 열어제치고 마음껏 상처받았다는 것이 순서가 바뀐 것만 같아 웃음이 났다. 상처를 받기 전에는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조차 고민했지만, 상처를 받고 나서는 내 상처를 이해받고 싶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기꺼이 더 상처 받는 것이 모순으로 느껴졌다. 지금은 숨김과 솔직함을 모두 경험해본 뒤에 솔직함의 정도를 나도, 소중한 상대도 둘 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절하려는 그 다음의 과정에 있는 듯 싶다.



진모 때문에 나는 울지 않았지만, 김장우는 자신의 형 때문에 내 앞에서 눈물을 비쳤다. 진모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나 역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이러이러한 일로 지금 죄수복을 입고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해줄 수 있었다면 김장우의 아픔은 훨씬 가벼워졌을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몇번이나 망설였지만 결국 말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왜 그랬는지, 왜 김장우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지 여행을 떠날 때까지 나는 정녕 알지 못하였다.

모순(양귀자, 쓰다) pp.188-189​

 가끔 이런 생각이 떠올라 고민될 때가 있다. 상담 일을 하면서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내게 솔직하게 보일 때. 위의 말처럼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으니까 “나도 겪었다”라고 나의 상처와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에게 위안이될까 싶으면서도, 단순히 그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나의 상처와 아픔을 솔직히 열어주기에는 그 상대가 나의 마음 역시도 소중하게 여겨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매너)와 관계의 깊이가 구축되었는가 염려스럽기도 하다. 순간순간의 직감과 판단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내가 잘 보이고 사랑받고 수용받고 싶은 상대라면 더 어려워진다. 그 상대가 아픔을 열어보였을 때 나의 아픔도 함께 열어보이고 싶은 충동과 더불어, 나의 상처가 약점이 되어 상대의 나에 대한 마음이 반감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함께 떠오르기 때문에.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여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모순(양귀자, 쓰다) p.218
[…] 그가 하나밖에 없는 형에 대해서 내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듯이 나도 그에게 그렇게 해주길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의 기대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김장우에게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므로 결혼한다면, 결혼으로 서로의 사랑이 물처럼 싱거워진다면.

모순(양귀자, 쓰다) pp.236-237​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은 강렬한 사랑에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책에서 안진진이 김장우에게 그러하듯이. 사랑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은 ‘보다 더 나은 나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있는 그대로 수용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시소놀이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연애할 사람, 결혼할 사람 따로 있다는 말도 나온 것일까. 평생 동반자로 함께 할 사람이라면 나도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이성이 흐려질만큼 강렬한 감정에 지배되는 사랑에서는 도저히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일 수가 없을 것이기에. 사실 그래서 강렬한 사랑 속에서 나의 매력을 뽐내는 시기를 거쳐 따뜻하고 미지근한 온도의 싱거운 사랑이 되어서는 있는 그대로를 품어주고 받아주는 시기로 이어지는 것이 연애-결혼의 흐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련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이 야속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과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시련이 없었다면 이런 고민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고, 지나치게 솔직해져서 기꺼이 상처받아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솔직함의 정도를 조절할 줄도 몰랐을테니까. 여전히 겁을 먹은 채 마음의 문을 걸어잠그고 혼자만 안전하다고 느끼며 상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줄 그릇의 사람이 되지도 못했을테니까. 인생에서 시련은 어쩌면 나를 더 솔직하게 만들고, 그런 솔직함은 나를 비록 더 상처받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더 단단해지게 하여 상대의 시련에서 비롯된 솔직함을 같은 무게로 받아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이로써 더 깊이있는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삶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기에, 어쩌면, 정말 어쩌면, 불행이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모순(양귀자, 쓰다) p.229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모순(양귀자, 쓰다) pp.295-296

​​​


 앞으로 남은 살아갈 시간동안 나는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상처받고 넘어지기를 반복하겠지만, 불행을 통해 행복에 다가가면서, 시련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모순 속에서 성장해갈 것이다. 안진진이 그러하듯, 나도 그렇게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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