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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Feb 13. 2022

모든 말에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나를 힘들게 하는 나의 대화습관을 하나 발견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면, 항상 그 말을 “나한테, 왜,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모든 말에는 의도가 있고 이 말을 함으로써 상대가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기대가 담겨있다고 믿었다. 나는 시선이 대부분 외부로, 특히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향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도나 기대를 내포하며 말을 할 때 대부분의 경우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며, 적극적으로 그를 돕고자 한다. 그것이 어떤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든, 그의 감정적 어려움을 달래고 받아주는 것이든, 필요한 도움과 케어를 제공하는 것이든간에. 나는 무엇을 나에게 바라는지 알면, 그것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는데 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매우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알고,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은 무언가 직무유기같은 느낌이랄까. 몰라서 못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는데 안 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고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벌어지는 불편한 상황을 감당하기 싫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불편한 상황에는 예를 들어 정적이 흐르는 서먹한 순간, 상대의 작은 실망, 내가 안 한 그 행동을 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미래의 예견된 후회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완벽주의자는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항상 주변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책임감을 느끼는 경우가 흔한데, 학생의 말 속에서 이 ‘막연한 책임감’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
 책임감은 다른 말로 죄책감이다. 상황을 해결하는 게 나의 ‘책임’이라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잘못, 그것이 죄책감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책임이 나에게 있다면, 분위기가 어색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바로 이 죄책감이 학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상황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 ‘하면 좋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면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 ‘선의’는 절대 ‘의무’가 될 수 없다. […] 설사 당신을 둘러싼 상황이 엉망이더라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힘들어해도,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 선의가 있다면 기꺼이 도와도 된다. 그러나 선의는 선의일 뿐, 절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p.173-176
그런데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 내 잘못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는데도, 내 잘못이 아닌 것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내 잘못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책임 소재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냥 일어나는 일도 많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게 남겨두는 것이 현명하다.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완벽주의를 탈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p. 185-186​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고 그것을   있을  같다고 해서, 항상 내가 그것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알아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만큼이   있는 만큼인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   있는 만큼인 것이고, 그만큼으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되는 것이다. 하염없이 나에게 높은 기대를 가지는 사람과 친밀해지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한다. 그리고 상대가 작은 기대를 했을  단지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이유로  내키지 않으면서도   있다고 생각하여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상대가 만족감을 느끼며  높은 기대를 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점점  높은 기대를 갖게 만들고  내가 노력하여 억지로  기대에 맞추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결국 나는 지쳐서 놓아버리고 상대는 당혹스럽고 마는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게 만들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있는 만큼 정의를 다시 내리고 싶다. 내가 알아차리는 만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인 것으로 재정의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만큼 알려면, 시선을 나로 돌려야 한다. 하루의 끝에 일기를 쓰면서 돌아보는 것을 넘어서  순간 순간,  상황마다 잠시 멈춰서 시선을 나에게로 돌릴  있어야 한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말을   그냥 오롯이 상대의 말과 표정에 빠져들어 그의 의도와 기대를 찾으려고 집중하며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주는 것이 옳은 거지?’라는 질문을 되뇌이는 대신, 잠시 멈춰서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나는 얼만큼   있지?’하는 질문을 나에게 던질  있어야 한다.

[…] ‘ 지금보다  낫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과정을 스스로  나가야 합니다. 아주 잠깐, 아주 잠깐만 멈춰 보면 됩니다. 잠깐 멈추면 이전 방식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반응이 나오는 것을 막을  있어요. […] 멈춰서 생각하면 순간 평정심이 다시 찾아옵니다.  창을 만들려면 이런 경험을 쌓고  쌓아야 해요.
 잠깐 멈추고 생각하는 것은 자주 하면 자주 할수록 좋습니다. 사람은 하루 종일 잠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이 깨어 있는 한은 어떠한 상황이든 마주하게 되지요. 이럴   번이라도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세요. 물론 처음에는    거예요. 노력하는 와중에도 쉽게 옛날 패턴으로 돌아가서 뒤집어질 때도 있고  관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살리려면 앞으로 ‘인생의 흐름의 근간은 이렇게 가야 합니다.
 특히 살아가면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우울해지거나 괴로워지거나 마음이 좋지 않을 , 언제나 ‘잠깐만, 잠깐만하면서 스스로를 멈추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물어야 합니다.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KOREA.COM) p.261
 결론적으로, ‘감정형 언어’를 쓰다 보면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 나아가 일상의 모든 언어에서 주어를 분명히 할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모든 문장을 ‘나’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걔 참 괜찮은 애야”보다는 “나는 걔가 참 괜찮더라”, “여름에는 역시 공포영화지”보다는 “나는 여름에는 공포영화가 좋더라”라고 말하라. 작은 차이 같지만 감정의 주체를 명시하는 것이 훨씬 친근감 있고 매력적인 언어다. 주어를 생략한 문장에는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리가 은근히 감춰져 있다. 판단을 앞세워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인데, 결국 이런 언어습관이 감정을 메마르게 한다.

 […] 행복은 아이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온다. 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말투를 갖자. 그러기 위해 모든 문장을 ‘나’로 시작하자. 감정의 주인을 분명히 할 때, 그 감정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마법을 경험할 것이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p.244-245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1차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지적해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자신의 감정이 1차인지 2차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특히 판단이 습관화된 완벽주의자의 경우, 생감정과 가공감정의 경계가 모호하다. […] 나는 리처드 라자루스가 주장한 15가지 기본 감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감정을 표현할 때 되도록 아래 단어 중 하나를 사용하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행복하다(즐겁다), 기대된다(희망차다), 고맙다, 사랑한다(좋아한다), 자랑스럽다(뿌듯하다), 안심이 된다, 책임감(죄책감)을 느낀다, 부럽다, 질투난다, 화난다, 불안하다, 불쌍하다, 슬프다, 부끄럽다(창피하다), 무섭다(섬뜩하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p.247-248

게슈탈트 상담에서 다루는 ‘자각’과 ‘알아차림(awareness)’에 나는 매우 취약하다고 느낀다. 나의 느낌, 감정, 욕구에 대해 민감하게 그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다. 상담을 하면서도 경계를 세우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이입되거나 과한 책임감을 느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도, 사실은 이 알아차림에 서툴러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명확한 경계선(clear boundary)을 긋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의 테두리가 어디까지인지 알아야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상담이라는 분야에서는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아야 내담자에게 우선 무해하고 나아가 유익하기도 한 상담을 제공할 수 있다. 때때로 내가 상담을 업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나에 대해 잘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의외로 매우 잘 지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의 감정, 기대와 생각을 빠르게 이해하고 더 많이 배려하고 분위기를 잘 맞추기에 사회생활은 무리없이 잘 했을 것 같기 때문에. 그래서 작년에는 상담이라는 전공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상담이 업이 아니라면, 나는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고 잘 배려하는 좋은 사회인으로 지금보다 가볍게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나에 대해 파헤치고, 나라는 사람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모든 작업들이 (상담이 직업이지만 않았더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처럼 느껴졌었다. 변화는 익숙함을 탈피해야 하는 것이라 필연적으로 거부감과 저항을 수반한다. 나에게 그 저항은 ‘상담’이라는 전공분야에 모든 탓을 돌리는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내가 힘든 이유는 ‘상담이랑 나랑 안 맞기 때문이야’ ‘상담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렇게 어둡고 힘든 사회의 면면을 모른 채 그저 즐겁게 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등등. 아직까지도 완전히 그런 저항과 탓하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아마 이렇게 글로도 적을 수 있게 된 것일테니.

“방학 동안 너무 집에만 있는 것 같아 어제는 무작정 혼자 나가봤어요. 전시회도 가고 커피도 마셨는데, 막상 돌아다니니까 너무 덥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집에 있었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했어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여기에는 가정법의 함정이 숨어있다. 내 선택이 정답이 아니리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는 좋은 것만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상상, 이런 것들이 완벽주의자의 전형적인 ‘자기비하적 사고’다. 가정법을 쓰지 않고 “밖에 나갔더니 너무 더워서 힘들었어요”라고 말했다면 그저 ‘좀 힘들었던 외출’로 그칠 것을, 굳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옵션과 비교함으로써 스스로를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학생들은 가정법을 수시로 사용하는데, “만약 이렇게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식의 후회가 대부분이다. ‘상상’을 위해 만든 가정법이 실제로는 ‘후회’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후회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선택을 해서 결과가 달라졌을지는 오직 신만이 아는 일이다. 인간은 그저 자신의 선택에 집중하며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발표나 토론처럼 논리적인 말하기가 아닌 이상,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가정법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유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p.233-234​
 그녀가 후회하는 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습니다. 잘못된 결정이 없어요. 우리 주변에는 그녀처럼 지금까지 그리 잘못 결정한 것이 없음에도 막연한 후회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한 모든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아마 당신이 내린 결정 하나하나를 따져 보면 다 그녀와 같을 겁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럴 겁니다. 모두 당신에게 필요한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 자신이 그렇게 느껴야 합니다.
 막연한 후회란 후회할 만한 일이 아닌데 습관적으로 하는 후회입니다. 매순간 내가 후회할 만한 일이 아닌데 습관적으로 후회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해요. 막연하게 ‘내가 그러는 경향이 있지’해서는 오랫동안 습관화된 것을 고치기기 쉽지 않아요. 후회가 들 때마다 그것이 후회할 일인지 수시로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오은영의 화해(오은영 지음, KOREA.COM) p.166

       요즘은 상대방의 표정을 덜 살피려고 노력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고 예민하게 상대방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이 들어서다. 꼭 모든 것을 다 알 필요도 없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많다. 또 뭔가를 안다고 해서 모두 다 행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상대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내가 알아차린 것이 모두 맞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교만아닐까), 또 알았다고 해도 모두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끝까지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과한 배려와 기대충족은 내게도 상대에게도 오히려 독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여부가 아니라 끝까지 변함없이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의미한다. 내가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정도의 그만큼이 ‘내가 진짜 할 수 있는 만큼’이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내가 해야할 것 같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우러나와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지는 않을테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구분하기

[…] 어떤 일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면, 이것이 나에게 ‘해야 하는 일’인지 ‘하고 싶은 일’인지 구분해보자. 실제로는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경우도 많지만, 우선은 무 자르듯 정확히 구분해보는 것이 좋다. 그래서 해야 하는 일로 결론이 나면, 정확한 목표치를 정한 후 효율적인 방법으로 성과를 내면 된다. 오직 ‘효율성’에 집중하고 그 외의 것들은 잊어라. 반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즐거움’에 집중하라. 그리고 즐거움 외의 것들은 신경쓰지 마라. 이것이 인생을 심플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219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많은 상황은 ‘대체 나한테 왜 저러지?’하는 생각이 솟구쳐오를 때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의 의도가 읽히지 않을 때. 첫째로 왜?, 둘째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나한테? 저러는 걸까 하는 의문과 의구심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 크기가 커져서 내게 크나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때가 많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의 의도나 기대가 이해가 되면 그런 의도나 기대를 맞출 수 있으면 맞춰주면 되고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면 그 사람을 탓하고 그냥 멀어지거나 맞춰주지 않으면 되는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점점 더 감정이 고조되는 것 같다.  대체 왜? 왜..? 나한테..? 뭘 바라지..??? 대체 왜?!?! 점점 이런 식으로 사고가 비약된다. 하지만, 모든 말에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고 싶다. 그저 그 사람의 말버릇이거나 푸념일 수도 있고, 별 의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걸 수도 있다. 나한테 무엇을 기대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모든 말에 뼈가 있고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내가 알아차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알 필요가 없을 때도 많다. 그냥 모른 채 지나가는 것이 현명할 때도 많듯이.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은 종합적인 것이지,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로 딱 정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꼭 질병뿐이겠는가. 우리는 갑작스레 우리를 찾아온 수많은 불행 앞에 종종 “왜 하필……”이란 말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왜 혼자서 이런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걸까. 온 세상의 불운이 오직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것만 같다.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그런 생각에 휩싸이다 보면 ‘왜’에 집착하게 되고, 이런 집착은 곧 우울한 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왜’를 아무리 외쳐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는 없으니까.
 고통과 불행이 없던 시절을 자꾸 떠올리게 되겠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머릿속에서 자꾸 원인을 찾으려고 할 때 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싹둑 자르고, 냉정하게 ‘원인 따위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임세원 저, 알에이치코리아)
 완벽주의자에게는 매사가 너무 복잡하고 피곤하다. 그래서 쉽게 지치고 우울하며, 때로는 화가 난다. 상담을 하다 보면 애인의 어떤 행동 때문에 화가 난 학생들이 많은데, 대부분 “이래서 화가 나요”라고 말하지 않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습관, 이것이 전형적인 완벽주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지 판단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심스럽게 충고한다.
 세상 대부분의 일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며 일상에는 당위성이 낄 자리가 없다.

어린 완벽주의자들(장형주 지음, 지식프레임) p.116


다시 한 번, 모든 말에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말에 기대가 담긴 것은 아니다. 있으면 또 어떤가. 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도나 기대조차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남보다 나의 마음에 순간순간 귀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그래서 내가 조금씩 더 편안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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