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뤼미쌤 Oct 11. 2021

무거움만큼의 가벼움

깊이 있어지는 만큼 가벼워지는 것도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며 깊이를 더해가는 만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가벼움도 필요하다. [중략] 무거움만큼 가벼움도 우리를 잘 살게 하는 힘이다.
 
-불안이라는 위안(김혜령 저, 웨일북 출판)



“무거움만큼 가벼움도 우리를 잘 살게 하는 힘이다.”라는 책의 구절이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나는 무거움을 인생의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가볍고 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그들의 삶을 보게 되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개방적인 사람인듯 말하면서도 내심 그것보다는 무겁고 신중한 삶을 더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말의 무게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지키지 못할 말이나 약속을 남발하는 것을 싫어하고 또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미 한 말이나 약속과 불일치하는 행동을 하고 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 같다. 내게 말과 행동은 내가 주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누구나 어떠한 것을 말로 내뱉기 전에 적어도 나만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은연 중에 나를 넘어 타인에게까지 당위를 부과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높은 기준과 나의 성향을 당연한 것인 마냥 다른 사람에게도 부여했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되돌아본다.



나는 특히 공적인 사이에서 어떤 말이나 의견을 이야기하기 전에 필요 이상으로 고민하는 성격을 지녔다.  말을 듣게  상대의 성향을 고려하고, 그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마일드한 표현을 고르고 골라서 나의 의견과 감정을 돌려서 전달하고자 했다. 나는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보다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렇기에 충분히 생각했더라면  부드럽게 말할  있었음에도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다가 상대의 반격에 상처입는 사람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크게 느꼈다.  나는 굉장히 관계 중심적인 사람이고 당연하지 않을 만큼 상대를 배려하고  말의 무게를 과대추정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또한 내가 어떤 말을 내뱉었더라면 반드시 그것을 지키고자 했다. 살다보면 말을 바꿀 수도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고 은근슬쩍 말과 다르게 행동하고도 모른척할 수 있는 건데, 조금은 고지식하다고 할 만큼 내 말을 지키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어쩌다가 피치 못하게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도 묻지 않아도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 아닌 해명을 늘어놓으며 내 말의 무거움을 유지하고자 조금은 과하게 노력했다.


내가 무거움에 이렇게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말이 씨가 된다”는 어머니의 한결같은 가르침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 고지식한 나의 기본성향때문이기도, 그리고 이 둘의 상호작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무겁고 신중한 모습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감을 얻고 지지 및 격려를 받기에 적합한 모습이기에 살면서 여러 이득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우선 밝히자면, 나는 나의 무거움이 좋다. 다만 지금쯤 되니 이러한 무거움이 나를 짓누른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생겨 가벼움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가벼움 없는 무거움은 스스로의 몸집을 점점 더 불린다. 내 말의 무게를 지키기 위해 체력적 정신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한 말을 반드시 지켜내고, 내 말이 상대에게 미칠 영향을 미리 예상하여 부정적인 반응이나 분위기를 예방하고자 말을 삼키고 고를수록, 어떠한 말도 편안하게 하기 어려워졌고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거기에 더해 듣는 것이 많은 상담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수많은 인풋 속에서 아웃풋 없이 속으로 삭히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 같다.


무겁고 진지한 모습만을 가진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느끼기에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하다. 진지함과 무거움은 상담 중 필요하고 또 중요하지만, 경계심이 많고 초반에 테스트를 많이 하는 청소년들을 만나고 그들과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벼움과 유머도 분명 필요하다. 상담가는 때로는 무겁고 진지하면서도 때때로 가볍고 유머러스해야 하며, 자유자재로 적재적소에 자신의 다양한 면모를 유연성있게 발휘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찾는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가벼움은 타인의 반응을 깡그리 무시하고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패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벼움은 너무 먼 미래의 짐까지 미리 떠안아 고민하지 않고 현재 지금-여기의 내 욕구와 바람들을 알아차리고 이를 미루지 않고 충족시키며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말한다. 필요 이상으로 심각해하거나 파국적 사고를 보이는 내담자를 만났을 때, 유머러스하게 비유도 사용하고 장난도 던져가며 정상화하여 내담자의 짐을 덜어내 줄 수 있는 그런 가벼움을 말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딱 그만큼씩 공존해야 비로소 균형이 맞는 관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벼움 없는 무거움은 점점 불어나고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짓누르는 무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반면, 무거움 없는 가벼움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나 존중을 받기 어렵게 하며 진솔한 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도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움’이 디폴트이고 ‘무거움’이 노력하여 늘려야 할 부분이지만, 내게는 ‘무거움’이 디폴트이고 ‘가벼움’이 노력하여 늘려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내게는 ‘무거움만큼의 가벼움’이 필요하다.


가벼움, 유머, 장난 등도 많이 해봐야 는다. ‘나는 원래’ 라는 표현을 기본적으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비록 내가 원래 무거운 사람일지라도 의식적인 노력과 많은 경험 속에서 모델링을 통해 가벼움을 배우고 내 삶 속에서 가벼움의 비율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무거운 만큼 가벼워지려고 노력 중이다.



제로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zero-sum은 네이버사전에 따르면 ‘게임, 관계 등이 쌍방 득실의 차가 무(無)인’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엇이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장점을 뒤집어 보면 단점이 되기도 하듯이, 삶의 무게도 제로썸인 것이 아닌가 싶다. 무거울 때도 있지만 가벼울 때도 있어야 숨통이 트일 수 있고, 가벼울 때도 있지만 무거울 땐 무거워야 보다 진실된(authentic) 삶을 살 수 있기에.


나뿐만 아니라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삶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내는 많은 사람들이 0(zero)의 균형 속에서 무거움만큼의 가벼움, 가벼움만큼의 무거움을 지닐 수 있기를, 그래서 제로썸의 무게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