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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뤼미쌤 Oct 10. 2021

나는 몇 명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2학기에는 책의 글씨가 읽히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지만, 요즘은 책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전에는 나 혼자 책읽는 시간과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 중 선택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기를 선택했었다. 외향성과 내향성이 매우 반반인 내 성향 상 ‘소수의 사람과 도란도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최고의 타협안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완전히 혼자인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것도 아닌 적절한 중간 온도의 선택지였기 때문에. 하지만 상담교사가 된 이후부터 소수의 사람(선생님, 학생, 가족, 친구, 연인 등등)일지라도 누군가와 대화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이 확보가 되었고, 그러고 나니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나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혼자만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치는 않기에 책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것 같다.


책을 읽는 것은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책의 구절들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나의 현재를 점검하기도 하고, 나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나에게 와닿는 구절을 서걱서걱한 샤프심으로 밑줄치면서 이 구절이 지금 나에게 와닿는다는 사실을 통해 비로소 나의 지금 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우수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글을 빨리 읽는 능력이 많이 발달한 나에게 책은 여지껏 내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 같다. 꼼꼼하면서도 빠르게 읽고 정확히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는 텍스트. 그렇기에 책을 펼치기까지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려웠고, 하나의 책을 다 읽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했으며, 이 책을 완벽히 공부하고 나서야 다음 책으로 넘어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의 책읽기는 조금 다르다. 동시에 여러 책을 펼치기도 하고, 하나의 책을 다 읽지 않았는데도 다른 책을 읽기도 한다. 꼼꼼하거나 빠르게 읽기보다는 천천히 한 문장 한 문장에 수채화 붓으로 물감을 칠한다는 느낌으로 글을 읽는다. 격식을 차려서 책상을 치우고 앉아서 책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틈틈이 무언가 다른 것을 하다가 휴식이 필요할 때 책갈피를 꽂아둔 페이지를 펼쳐서 글을 읽다가 다시금 금방 덮기도 한다. 오히려 이렇게 느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책을 읽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이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게 된다는 게 조금 웃겼다. 이상하게도 완벽주의를 내려놓으니 더 온전하게 책을 품게 된다. ‘perfect’와 ‘complete, full’는 다른 것 같다. 요즘의 나는 후자가 더 좋다.


거진 한달에 걸쳐 다 읽은 책이 바로 ‘당신이 옳다’라는 책이다. 심리학 책이라고 할 때 꽤나 유명한 책인데 나는 놀랍게도 이번에 처음 읽었다. ‘공감’이라는 게 뭔지, 어떻게 하는건지, 왜 필요한지 등등을 온 마음을 다해 역설하는 책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료해지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상담교사로서 내가 하게 되는 고민을 다룬 부분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어졌다.


공감의 외주화, 남에게 맡겨버린 내 마음

중2 아들의 우울증이 심각한 정도라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 상담 교사로부터 들었는데 우울증 측정 결과 자살 충동 요인까지 있으니 전문가를 찾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엄마는 충격 속에서 청소년 전문 정신과 의사를 폭풍 검색했다.

첫 진료에서 의사는 우선 아이의 심리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심리 검사 날짜를 예약해서 일주일 후 검사를 받았고 다시 십여 일을 기다려 검사 결과를 들었다. 결과는 우울증이었고 짐작대로 부모의 오랜 갈등이 아이에게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진단을 받았다.

약물치료도 필요하다고 해서 약을 처방받고 다음 상담 날짜를 예약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아이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약도 먹기 싫다고 했다.

—중략—

내 존재에 주목하지 않고 내 아픔에 마음을 포개지 않는 사람이 주려고 하는 도움에 아이가 끌리지 않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의사뿐 아니다. 상담 교사는 자살 충동이라는 지표에서 겁을 먹었고 엄마에게 배턴을 넘겼다. 엄마는 더 나은 전문가를 찾는 일에 열심히 매달렸고 의사에게 다시 배턴을 넘겼다. 그러는 동안 교사와 엄마의 시선에서 아이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상담교사나 엄마는 더 나은 전문가를 찾기보다 우선 아이를 만나야 한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자신의 눈을 맞춰야 한다.아이가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아이의 비명을 들었는데 왜 그에 대해 아이에게 한 번도 직접 묻지 않는가. 아이의 비명을 생생하게 들었는데 왜 아이만 빼놓고 주변만 분주한다. 변죽만 울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오브코스다.

“상담 선생님께 얘기를 듣고 엄마는 진짜 놀랐어. 네가 그렇게 힘든 줄 엄마가 미처 몰랐어. 미안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네 마음은 지금 어떠니?”

아이의 눈에 엄마가 눈을 맞추고 그렇게 직접 물어야 한다. 엄마든 교사든 아이가 힘들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면 누구든 제일 먼저 할 일은 아이에게 눈을 포개고 아이에게 묻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핵심적인 어른의 반응이 그것인데, 모두가 그것을 건너뛰었다.

—중략—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아이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주목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 옆의 어른들은 수건 돌리기 하듯 아이의 고통을 다음 사람에게 순차적으로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상담 교사는 부모에게, 부모는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과 의사는 약물치료와 다음 만남으로 공을 넘겼다. 이런 형태는 ‘일상의 외주화’다.

아기 때부터 도리도리와 걸음마를 과외 교사가 가르치고 연인과 사랑하는 법조차 학원에서만 배울 수 있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일상적인 외주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비전문적이고 별것도 아닌 엄마의 반응이 아이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였다. 흔들리던 엄마의 눈동자, 돈가스 집에서 엄마와 마주하고 밥을 먹던 시간은 가는 숨을 몰아쉬던 아이에게 호흡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압 산소통이었다. 엄청난 치유적 효과가 있는 행위다.

-당신이 옳다 (지은이 정혜신, 영감자 이명수, 출판사 해냄) pp.71-77


생각보다 길게 인용을 했다. 그만큼 이 부분이 와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어머니 역시도 사람이기에 완벽하진 않으셨겠지만, 나의 마음에 눈을 떼지 않으셨고 눈을 맞추어 나에게 직접 물어봐주시던 분이셨다. 그렇기에 마음이 힘이 있고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할 만큼. 그리고 지금은 상담교사로서 내가 어머니같은 역할을 맡아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과연 정말 이게 가능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신규로서의 올해는 서투를지언정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피하지 않고 내가 만나는 여러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진실된 관심과 애정을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의 소진감은 어쩔 수 없이 커진다. 내가 미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아이가 한 명이라면 또 모를까 수십명이 되어가니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론적으로는 이토록 힘든 아이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물어봐주고 공감해주는 그 한 사람이 부모가 되고, 상담교사는 부모님이 그런 한 사람이 될 수있도록 아이의 마음와 부모의 마음 사이의 벽을 부수고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쟁터이고, 그 한 사람이 부모가 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아이들이 없지 않다. 그런 경우에 상담교사가, 담임교사가, 학원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그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나는 몇 명의 아이들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의 크기는 얼마만큼일까. 내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더 무섭기도 하다.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을 여기저기 흩뿌리다가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배신감을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어렵다. 어려운 직업이다. 상담이라는 거 그냥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하는 거 아니야? 적극적 경청과 공감적 이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온 마음 다해 정확히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은 상당히 큰 에너지와 힘이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지나가듯이라도 이렇게 말을 내뱉더라도 나는 크게 기분 나빠하거나 화내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그 사람의 배경에는 온 마음 다해 공감받아보거나 공감해본 경험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기에. 상담이라는 분야가 그런 것 같다. 나 역시도 상담을 받아보고 해보기 전까지는 온갖 오해와 루머와 편견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리 말로 싸우고 설득해봐야 그 편견은 깨지지 않고 그 사람과의 관계만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이 미래에 언젠가 온 마음 다해 공감받는 경험을 하고 그 때 비로소 자신의 지난 날의 생각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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