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감정에 대하여
아빠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건 오래전이었다. 하지만 차마 쓰지 못하고 외면했던 이유는 내가 늘 닮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빠와 너무 닮아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담을 받을 때도 아빠의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내 어린시절의 감정과 많이 얽혀있는 사람이었고, 그 기억들이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랬던 내 감정들을 이제는 꺼내고 싶어졌다. 글로써 꺼내놓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과거의 내 감정들을 정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리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빠는 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와서 나를 비롯한 가족들을 괴롭혔다. 사실 본인이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를 것이다. 그만큼 아빠는 본인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혀가 꼬일정도로 술에 취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말들을 내뱉는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아빠가 너무 미웠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빠가 밖에서 일이 힘들었나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술의 힘을 빌려서 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해하려할수록 더 깊게 다치기만 했다.
어떤 날은 과자를 사왔다며, 언니와 내가 자고 있는 침대 머리맡에 과자봉지를 던졌다.
"야 먹으라고, 빨리 먹으라고!!"
머리만 대면 깊게 잠들던 언니와는 달리 잠결이 예민했던 나는 그 장면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새벽에 본인이 사온 과자를 머리맡에 던지는 것도 모자라 우리가 그 과자를 먹어야한다며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었다.
어느 날은 책상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짧은 테이블의 네 다리에 가지고 있는 책은 모두 쌓아서 억지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책상을 하나 만들었다. 집에 피노키오 책상은 하나였고, 언니가 사용했으므로 나는 늘 책상이 갖고 싶었다.
"이게 책상이냐? 뭐냐?"
비웃음이었다. 나는 설마 아빠가 나를 비웃는 건가 싶어서 아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해하지는 않을까. 이런 모습을 보면 아빠가 책상을 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비웃음만 남기고, 남의 일인듯 뒤돌아 가버리는 아빠를 보며, 그렇게 책상을 만든 내가 한심하고 초라해보였다. 결국 며칠을 못 견디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었던 책상을 없애버렸다. 책을 쌓아 만든 책상 다리는 조금만 건드려도 흔들려서 책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니가 몇학년이지?"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 창피했다. 마치 남인듯 자식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모른다는 것은 내가 아빠를 무시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빠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관심이 없으면 없는대로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마음놓고 미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런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내가 평발이라며 많이 걸으면 발 아프다고, 내 발을 주물러 주기도 했다. 핸드폰이 없던 고등학생 시절 갑자기 새 핸드폰을 사준 적도 있다. 그런 아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늘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혼란스럽기만 했다. 양가감정이었다.
아빠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의 장남이었지만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기 시작했다. 늘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던 할아버지의 모습에 외로웠을 것이다. 명절만 되면 아빠는 시골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본인의 작아진 모습이 싫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누가봐도 너무 좋은 사람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족에게는 칭찬이나 사과한마디조차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가족을 등한시하고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던 것처럼 그도 그랬다.
내가 스무살이 될 무렵, 아빠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그렇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같은 공간에 살았지만 각자 따로 생활했을 정도로 네 명이 같이 있던 기억이 없다. 힘든 상황 속에서 서로가 위로는 커녕 늘 냉랭하기만 했으므로 혹여나 그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골집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했다. 사실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벌어놓은 돈도 별로 없을텐데 시골집에 내려가 혼자 산다는 게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혼자서 노력하며 사는 모습에 어린 시절의 미움은 서서히 내려가는 듯 했다.
"뭐? 네가 어떻게?"
아빠는 내가 편입을 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나라는 사람은 항상 불만이 많고 화를 내며, 아무것도 할줄도 모르고 뭘 하기도 싫어하는 그런 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가부장적인 아빠가 싫었고, 아빠의 결정에 늘 불만을 표현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에게 인정받은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자랑을 하고 다니는 아빠의 모습이 생소하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나는 회사 게시판에 아빠가 농사짓는 농작물의 판매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빠라는 사람 자체는 미웠지만 그 미운 마음들을 정리하고, 그 때부터 나는 어떻게든 아빠에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관계 회복의 시간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너 창녀라던데?"
시골집에 내려간 내게 아빠가 했던 말이었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빠가 엄마 얘기를 안좋게 하는 걸 보고싶지 않아서 그만하라고 소리쳤을 때의 대답이었다. 나는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아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알고계셔"
내가 믿었던 누군가의 말을 듣고 다시 시골집에 내려갔을 때, 아빠는 이미 어디선가 들은 사람들의 말로 나를 판단하고 있었다.
"얘기해봐. 니가 내 욕했잖아."
"무슨욕? 내가?"
"말이 안통하네. 그래 알겠다. 그럼 나도 말 안하지."
"아빠 내가 기억이 정말 안나서 그래. 무슨 얘긴지 말을 좀 해줘."
"난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니 엄마가 너를 그렇게 키운거야.
너랑 밥먹으면 밥맛 떨어져서 못먹겠어. 넌 언니랑 형부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소문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려 떠보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비꼬는 사람들, 훈수두려는 사람들 속에서 아빠 또한 그랬다는 것은 분명 상처였다. 하지만 아빠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적이 없던 나는 그 상황이 익숙했다. 내가 피해자임에도 숨어야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때문이었다. 그 기억에 대한 반항으로 나는 그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술먹고 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했다.
"대기업에 가면 뭐하냐고. 창녀 됐는데."
나는 대학 동창이 했던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넘겼던 그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아빠에 대한 미움은 다시 커지기만 했다.
'그래. 아빠는 늘 그래왔지. 내가 힘들 때 지켜준 적도, 내가 아플 때 나를 봐준적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지.'
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갈 때조차 병원까지만 태워다주고,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가버리던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 장염에 걸려 병원에 며칠 입원하고 왔을 때에도 나 때문에 병원비로 돈이 많이 나갔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아빠는 다 알고있어."
그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이상한 소문에 휩싸여 힘들어하고 있음에도 나를 지켜보며 그 말만 반복 했다. 뭘 알고 있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사람이 니 아빠가 맞아?"
나중에 이 말을 기억해 냈을 때, 나는 너무나 큰 슬픔에 무너졌다.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나는 아빠가 또다시 나를 모른척 했을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창녀도 아니었고, 술집에서도 일한 적이 없으며, 클럽조차 가본 적 없는 너무 열심히만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말들이 오갈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넌 친구도 없냐?"
하지만 아빠는 결국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 누군가 나한테 약을 먹인거라고 했음에도 그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아무 말도 안할수록 나와 우리집에 대한 이야기는 공격하기 좋은 가십거리로 떠돌았다.
"아버님이 교육을 엄하게 시키시네~"
"시골이 여기보다 소문이 얼마나 빠른데~"
"아버지가 너 족보에서 빼버리겠다고 하지는 않니?"
"아빠는 용서 못하지~ 엄마는 용서하지 무조건"
또한 비웃음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그 소리는 한결같았다. 평소의 목소리와는 다른 높은 하이톤의 격앙된 웃음소리. 본인들 생각으로는 내가 괴로울거라며, 그게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내 앞에서 대놓고 하는 그 말들의 수위는 갈수록 심각했다. 처음에는 내 눈치만 보며 아무말도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나를 어떻게든 까내리고 싶어서 안달난 이 사람들을 나 또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화를 낼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들이 하는 말 또한 헛소리라고 생각해서 반응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불쌍하다는 말, 대단하다는 말들이 오가던 그 관계속에서 어쨌든 나는 그럼에도 괜찮다는 걸 계속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니가 그렇게 마음이 약한 애인줄 몰랐어. 니가 아픈거 니 친구들한테는 얘기하지 말아라."
암환자가 되고, 내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온 아빠는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것조차 나는 무슨 얘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아빠가 병원에 와줘서 반가울 뿐이었다. 치료에만 관심을 뒀을 뿐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을 때였다. 결국 나는 내가 아프다는 걸 나를 괴롭히던 그 친구들에게 말했다.
"아빠가 니 친구들한테 얘기하지 말랬잖아! 그걸 왜 얘기를 해!!"
몇 달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아빠는 전화해서 다짜고짜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는 무슨 소린지 얘길 해보라는 나의 말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나를 보며 답답했겠지. 그만큼 나에게 아빠는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물학적 아빠일 뿐, 그동안 나를 비웃던 아빠의 모습, 책임을 지지 않던 모습, 우리에게 모진말을 하던 모습을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나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아빠가 보기에 나라는 사람은 그런 괴롭힘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고, 내가 아픈 걸 알고 나서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나에게 얘기해줘야 한다는 삼촌의 말을 듣고도 나는 그렇게 약한 애가 아니라며 손사레치던 아빠였다.
좋은 아빠는 아니였지만, 한편으로는 결혼을 하고, 자식들을 책임지기에는 어린 나이였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내 결혼식에는 가지 않을 것이므로 엄마에게 이혼해달라고 하는 아빠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아빠의 자식이지만 장애물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안의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내가 가족들은 나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에게 상처되는 말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아빠를 찾아가지 않았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정말 내 아빠일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수년간 생각하며 내린 결론은 내 아빠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아빠라는 존재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생각하기조차 힘들어하는 지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그렇게 미워했지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지난 날 내 모습들이 있었다. 자식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용서하고 싶었다. 그래도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양가감정은 늘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제는 놓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와 닮은 아빠를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아빠와 닮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를 미워하는 내 감정을 직면할수록 지난 일들이 자책으로만 남아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정리가 된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놓아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