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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1장 괴물 아버지. 중독의 시작

중독의 시작


 내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오후가 되어 학교 뒤편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채기라도 한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집 앞 댓돌 위에서 얼굴이 벌건 아버지가 길길이 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손을 휘저으며 발로 무엇인가를 걷어찼다. 누군가 나뒹굴었다. 자세히 쳐다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등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입에서는 신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내 가슴은 얼어버렸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는 걸까. 어머니는 왜 맞고 누워만 있을까.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어. 그러나 나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그저 서 있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괴물같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버지는 1937년에 황해도 수안에서 출생했다. 열네 살에 6·25가 일어났다. 아버지는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형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맏형과 누나는 북한에 남겨졌다. 아버지 가족은 밤으로 유명한 공주 정안에 정착했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는 평택군 청북면 어연리의 작은 시골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 마을에서 여덟 살 어린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키가 훤칠하게 큰 편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 미남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눈썹은 검고 균형이 잡혔고 머리숱은 풍성했다. 

  60년대 중반 시골에서 잘생긴 총각 교사는 훌륭한 신랑감으로 꼽혔다.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어머니를 선택했다. 그 이유가 재미있었다. 어머니의 학력은 국민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과부가 된 외할머니 혼자 세 아이를 키웠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는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국민학생 때부터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을 했다. 어머니는 어찌나 총명했던지 국민학교 내내 일등을 했다. 아버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미래 자식들의 지능을 생각해서 어머니를 배우자로 골랐던 게 분명하다. 외가 쪽 친척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게 “네 머리가 좋은 건 엄마를 닮아서야.”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연리 국민학교 선생님에게서 술을 배웠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 선생님이 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니 자꾸 술이 늘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인연이었다.

  아버지가 결혼하자마자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매일 마을 뒷산 할머니 묘를 찾아가 목 놓아 울었다. 일 년 이상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꼭 술을 마셨다. 결국 술을 끊을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나는 친할머니를 본 적도,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 인생의 미스터리 하나가 우물 속에 던져진 돌처럼 영원히 가라앉은 채 떠오르지 않았다.

  “얌전하던 사람이 달라졌어.”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시골에서 술을 많이 마시던 사람이 아버지 한 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점잖았던 학교 선생이 술만 마시면 돌변하니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결혼한 후 부모님은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 그곳이 내가 태어난 집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학교 뒤쪽으로 난 길을 올라가면 사택이 나타났다. 방 둘과 작은 부엌이 딸린 소박한 집이었다. 초가로 지붕을 엮고 벽은 흙으로 바른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그곳에서 나와 두 남동생이 태어났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을 내려뜨리면 몇 초가 지나서야 첨벙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려다본 우물 속은 악마의 피부처럼 검었다. 까마득히 깊은 우물 바닥에 물이 찰랑거렸다. 우물 밑은 들어가 볼 수 없는 인간의 마음속과 같았다. 발가락을 곧추세워 우물 바닥을 내려다보면 등골이 오싹해져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졌다. 나는 종종 도르래를 이용해 직접 두레박을 퍼 올렸다. 두레박에 담겨 철렁대는 물은 이를 시리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밤이 되면 우물 근처에 가는 걸 피했다. 조심하지 않았다가는 그 우물에 빠져 영영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포라는 감정이 우물을 통해 내 영혼에 침입했다. 

  그 집과 관련해 또 기억나는 것은 토끼들이다. 어머니가 앞마당에 토끼장을 만들고 토끼를 키웠다. 나와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자주 토끼장에 가서 토끼들을 살펴보았다. 어느 날 손가락 크기 정도 되는 작은 토끼 새끼들이 어미 토끼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토끼가 새끼를 낳았어!”

“아, 귀여워.”

눈을 뜨지 못하던 토끼 새끼들은 며칠이 지나자 제법 꼬물꼬물 움직이며 토끼장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토끼풀을 뜯어와 문을 열고 토끼들에게 내밀었다. 새끼 토끼들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풀을 뜯어 먹었다. 동생이 타던 네 발 자전거 뒤에 토끼풀을 싣고 오던 모습이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박혀있다. 아직은 불우함을 맛보기 전 유년의 행복했던 일상의 토막이었다.   

   

공포의 밤     


  아버지의 전근으로 우리 가족은 고향을 떠나 평택군 세교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70년대 중반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나는 습관대로 장독대로 갔다.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된장, 고추장, 간장독들이 열 개 이상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대로 올라가면 담장 너머 길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를 시켜 장독대에 깨끗한 물을 떠 놓게 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할머니의 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놓인 물그릇에 대고 절을 했다. 

  나는 장독대로 올라가서 눈을 크게 떴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길을 통해 아버지가 귀가했다. 나는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보고 오늘은 술을 마셨는지, 마시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취했는지 구분했다. 일주일에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오지 않는 날은 한두 번 꼽을 정도였다. 그런 날 아버지는 성큼성큼 똑바로 걸었다. 아버지 손에는 과자나 사탕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장독대를 내려와 길까지 뛰어나갔다. 아버지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면서 집까지 왔다. 술을 먹지 않으면 말수가 없던 아버지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때로는 나를 어깨 위에 태웠다. 겁이 많던 나는 내려달라고 발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런 날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걸음이 갈지자로 휘청거리면 내 심장은 쿵쿵 뛰었다. 오늘 저녁은 또 끔찍하겠구나. 오늘 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가슴에 무거운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아버지가 많이 취하지 않은 날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 평소와는 달리 말이 많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살살 달래 양복을 벗겼다. 그리고 양은 대야에 준비해 둔 따뜻한 물을 방으로 가져왔다. 아버지는 왕처럼 두 발을 대야에 담그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비누를 묻혀 아버지의 발가락까지 정성껏 손으로 씻겼다. 더러워진 물을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로 아버지의 발을 헹구었다. 발을 씻다가 대야를 뒤집어엎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은 아버지 기분에 달려 있었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은 아버지의 어깨와 발을 주물렀다. 그날의 나머지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면서. 그런 날들만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날은 만취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식사 시간에 정적이 흘렀다. 곧 닥쳐올 폭풍우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아이들도 아버지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밖이 캄캄해지면 장독대에 올라가도 헛일이었다. 철로 된 현관문을 발로 뻥 차는 소리와 함께 집안이 아버지 고함으로 가득 찼다. “다 죽여 버려!” 아버지는 코를 벌름거리고 씩씩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이를 갈았다. 눈은 충혈되어 번득였다. 하마 한 마리가 집에 난입한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간신히 아버지의 양복을 벗기면 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습관이 되어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꼭 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자세로 두세 시간을 오들오들 떨며 앉아있었다. 

  열 시가 넘어서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머니는 아이들을 재웠다. 아이들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운이 좋은 날이면 아버지는 아이들이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날은 어머니 혼자 몇 시간이고 아버지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가서 “일어나!”라고 고함쳤다. 아이들은 잠이 화들짝 달아났다. 벌떡 일어난 아이들은 곧바로 안방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의 길고 긴 술주정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얘기였다. 한두 해 나이가 들어가며 그것이 세상과 정부에 대한 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나쁘∼은 놈들!” 아버지에게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놈이고 죽일 놈들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욕을 많이 해댔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아버지는 대통령에게 울분을 쏟아냈다. 아버지가 “다 죽여 버려!”라고 할 때는 정말 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 몸이 사시나무같이 떨렸다. 가끔 영문도 모르게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서!”라고 말했다. 공포가 아이들의 얼굴을 할퀴었다. 이제 때릴지도 몰라. 맞아서 죽을지도 몰라. 침이 꼴깍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이빨을 드러내고 입 가장자리로 담배를 물었다. 아이들은 얼굴을 피할 엄두도 못 내고 담배 연기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 양반다리로 앉은 아버지는 늘 몸을 한쪽 옆으로 기울였다. 별 모양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유리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재떨이는 아이가 혼자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아버지는 가끔 느닷없이 그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그런데도 재떨이는 깨지지 않았다. 언젠가 저 재떨이가 어머니나 아이들에게 날아올까 봐 나는 그 재떨이를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것에 머리를 맞는다면 박살이 나고 말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두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을 한다. 그러나 나는 동생들이 맞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버지가 난데없이 부엌으로 달려 들어갔다. 칼을 찾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아버지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뒤에 남은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가슴이 콩알이 되어 버렸다. 정말로 아버지가 누구를 죽이고 오면 어떡하지. 현실 감각이 다 없어졌다.

  집 밖에서는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박정희 독재 정권 타도하자!”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동네에 아버지 목소리만 쩌렁쩌렁 울렸다. 길은 텅 비어있었다. 도와주러 오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이 야속했다. 누구라도 와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는 야수에게 잡힌 인질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밤에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모두가 무관심했다. 알콜 중독자의 가정은 그 폐쇄성 때문에 포로수용소, 그 가족은 포로로 비유되곤 한다. 밤마다 우리 집은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쥐새끼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는 포로수용소 그 자체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소리만 지르다 돌아왔다. 칼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어린 내가 어찌 알았으랴. 아버지가 사실은 여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걸. 그렇게 유약한 사람들이 술의 힘을 빌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겁 없이 한다는 것을 말이다. 

  밤 열두 시가 넘으면 어머니가 아이들 학교 가야 한다며 아버지를 달랬다. “그래 학교 가야지. 이제 가서 자.” 그제야 해방된 우리는 뻣뻣해진 다리를 펴고 날쌔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날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막막함이 영혼 밑바닥에 짙은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인생에서 힘겨운 시기가 닥칠 때마다 나는 ‘지나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코아의 경험이 가져다준 잘못된 신념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나았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것은 아버지의 술 심부름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와서도 밤에 혼자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런 날 아버지는 더 난폭해졌다. 처음에는 내가, 나중에는 동생들도 술 심부름꾼이 되었다. 

  동네에서 하나뿐인 가게를 향해 컴컴한 밤길을 걸었다. 불이 밝혀진 다른 집을 쳐다보면서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아이가 맥주 달라는 말을 하기가 창피했다. “저, 아버지가...” 하면 주인아저씨는 “술 사 오라고?”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들 생각해서 술 좀 줄이지, 참.” “아저씨가 가셔서 우리 아버지 좀 말려 주시면 안 돼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팔뚝이 굵은 아저씨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분명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누구도 우리 집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로는 술 문제는 순전히 집안일로 남이 상관할 성질이 아니었다.  

  때로는 막걸리를 사러 갔다. 막걸리는 가게가 아니라 어느 집에서 만들어 팔았다. 그 집은 동네 정반대 쪽에 있었다. 하늘에 둥근달이 떠 있으면 내 그림자가 나를 따라왔다. 어느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서 나는 밤에 동네를 돌아다녀도 무섭지 않았다. 술을 사 가면, 아버지가 어떻게 할까. 그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돌아오면서 나는 그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언제나처럼 무릎 꿇고 앉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는 혼자 술을 마셨다. 어머니가 “여보, 그만 좀 마셔요.”라고 말할라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해 욕을 해대고 눈을 부라렸다. 아버지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쓰러져서 곯아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마루 아래 댓돌에 술병이 하나둘 늘어갔다. 아침이 되어 보면, 열 병도 넘게 술병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그 술병을 모아다가 가게에 가져가 돈을 받아오거나 아이스께끼를 사 먹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버지가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아이들을 마당으로 모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아버지가 마당으로 아이들을 불러내는 일은 없었기에 웬일일까 두근두근하며 마당 한 가운데 섰다.

“여기 있던 수국 어디 갔어?”

수국? 수국이 뭐지? 아이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겁에 질린 눈길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우리 집 마당 화단에는 계절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다. 아이들은 우리 집에 수국이 피었는지 몰랐다. 수국이 정말로 있었을까. 누가 그 수국을 없앴을까. 어머니가 뭐라도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한테 그 수국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평소 꽃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아마 화풀이를 위해 트집 잡을 필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범인으로 아이들을 지목했다. “누가 그랬는지 말해!” 아는 게 없었기에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눈치만 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빨리 말 안 해? 이 새끼들이.” ‘오늘 드디어 맞나 보다.’ 두려움이 몸을 마비시켰다.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동네 열 바퀴 돌아! 느리게 뛰면 죽어!”

  아이들은 맞을까 봐 부리나케 집 밖으로 나왔다. 줄을 지어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저녁 무렵이어서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낮이었으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런데도 아이들은 무서워서 창피함을 잊었다. 왜 뛰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아버지의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뛰어야 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기진맥진해진 아이들을 보고 아버지는 화를 가라앉혔다. 아버지는 집에서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아버지를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밖에서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집에서는 폭군으로 군림한다는 사실을 나는 차츰 알아갔다. 수국을 볼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 어린 세 아이가 무서움에 떨면서 동네를 뛰던 모습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다.


   “얘들아, 빨리 나가!”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역시 기억에서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건 다급하게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몰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우리보고 도망치라고 했다. 

“애숙이네로 가 있어! 엄마도 갈게.” 

  애숙이는 내 친구였다. 아이들은 부리나케 집을 나와 아버지가 쫓아올까 뛰었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애숙이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불쌍한 것들!” 상황을 짐작한 애숙이 어머니는 아이들을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미 밤이 깊었다. 동네는 늘 그 시간이면 그렇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다 잠들었다. 아이들은 언제 어머니가 오는지 연신 고개를 돌려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살며시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들어왔다. 동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해서 도망을 올 때는 기꺼이 피신처를 제공해줬다. 애숙이 어머니가 깔아주시는 요에 몸을 눕혔다. 혹시나 아버지가 우리를 찾으러 올까 봐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우리가 집을 도망 나올 때면 아버지는 체념하고 혼자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잠시 후 길에서 아버지의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애숙이 집의 창문은 큰길 쪽을 향해있었다. “어디 있어? 안 나와? 안 나오면 다 죽여 버려!” 아버지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가며 소리쳤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이 집으로 불쑥 들어오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다른 데로 도망가야 하나.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긴장한 얼굴로 내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버지는 한 시간 정도 큰길을 오가며 괴성을 질러댔다. 사람이 아닌 괴물이었다. 언젠가 저 괴물이 어머니와 우리를 잡아먹을지도 몰라, 지금이 그때인지도 몰라. 애숙이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를 보호해 줄까. 숨겨주기는 했지만,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줄 수 있을까. 경찰이라도 와서 아버지를 잡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시골 마을에는 경찰도 없었거니와 누구도 경찰에 신고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동네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워도 정적만이 답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혀를 내두르는 술꾼이었고 선생이라는 직업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혼자 고래고래 온갖 위협을 하던 아버지는 마침내 포기했다. 목소리가 잦아들며 집 쪽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애숙이 어머니는 어머니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밤 한 시가 넘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방금 있었던 소동은 꿈속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현실일 리 없어... 나는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잠을 청했다. 아침에 집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숙취가 남았지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또 한 번은 아예 다른 동네로 도망을 갔다. 그날은 어머니가 먼저 집을 나갔다. 상황이 다급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황 선생님 댁으로 오라고 했다. 황 선생님은 아버지와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아버지는 황 선생님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시며 그 선생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황 선생님의 부인과 언니, 동생 사이로 지냈다. 어머니는 그분을 친언니처럼 의지했다. 

  황 선생님 가족이 사는 동네로 가려면 우리 동네에서 나지막한 산을 넘어야 했다.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나는 아버지가 잠시 딴 데로 주의를 돌리는 틈을 타서 동생들을 데리고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왔다.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학교에 가는 길이라 익숙했다. 동네를 벗어나면 밭 사이로 길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밭에는 계절마다 옥수수, 무, 열무, 배추가 자랐다. 산에는 꽤 큰 소나무들이 검은 자태를 드러내며 꼿꼿이 서 있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저 아래로 우리 동네가 보였다. 고요했고 불빛이 다 꺼져 있었다. 우리 집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우리가 사라진 것을 알 텐데.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진 못하겠지. 

  누런 달이 떠 있었고 하늘은 검고 푸르렀다. 달빛만이 아이들이 가는 길을 친절히 비춰주었다. 달조차 아이들이 안타까워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산에서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지 그런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빨리 어머니한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황 선생님 집에 가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는 기대에 발길을 재촉했다. 어린 동생들은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영화의 한 장면 같던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해리되는 느낌이 든다. 정말 그 일이 있었을까. 아이 셋이 한밤중에 산을 넘어 이웃 동네로 갔다니. 가슴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는다.

  황 선생님 댁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황 선생님 부인 품에 안기다시피 하고 울고 있었다. 

  “언니, 언니...”

  “그래, 그래...”

함께 울면서 두 사람은 밤을 지새웠다. 

  황 선생님 댁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한 여자아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그들과 노느라 무서움도 잊었다. 엄마와 이 집에 살면 좋겠다. 우리 집에 영원히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다...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을수록 이런 불가능한 소망이 몽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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