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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1장 괴물 아버지. 아버지의 두 얼굴

아버지의 두 얼굴   

  

  때로 밤늦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우리 집에는 전화기가 없었으니 아마 동네 이장님을 통해 연락이 왔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입고 아이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종종 싸움을 벌였다. 그럴 때마다 경찰서에 가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데려와야 했다. 동네 사람들은 허 선생이 자꾸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고 다닌다고, 저러다 큰일 난다고 걱정했다. 나는 아버지가 큰 사고를 쳐서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쯤 감옥에 있으면 그동안 우리 집은 평화롭겠지. 그리고 감옥에 갔다 오면 아버지도 정신을 차릴 거야.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필름이 완전히 끊어졌다. 다음날이 되면 전날 일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내가 왜 그랬지? 전혀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이 터질 듯했다. 그런데도 항의는커녕 그저 “아빠, 이제 술 안 드시면 안 돼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래, 이제 술 안 마신다.”라는 대답을 수백 번 되풀이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어머니는 하얀 종이 한 장과 검은 사인펜을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여기에 각서 쓰세요.” 아버지는 고분고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나는 이제부터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날짜를 적고 서명했다. 족히 백 번은 넘게 각서를 썼으리라. 각서를 쓸 때만큼은 아버지도 반성하며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결심을 굳게 했다. 알콜 중독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나는 아버지의 굳은 결심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또 실망하고 다시 희망을 품고 실망하는 과정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어머니도 결심을 굳게 하면 술을 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중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70년대 순박한 사람들이 알 도리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각서를 내밀지 않았다. 삶이 나를 자주 배반한다고 느끼는 것이 이런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술을 마시면 아버지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았다. “내가 말이야, 꿈이 대통령이었어, 대통령!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될 수 있어! 내가 대통령 나가면 나 찍어줄 사람이 수두룩해, 알아? 이거 왜 이래!” 자주 반복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해 보고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는 머리도 영특하고 공부도 잘해서 고등학생 때까지 대통령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이 막혔다. 그게 한이 되어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아버지가 좀 안 돼 보였다. 그래도 말 잘 듣는 자식들도 있고, 교사라는 좋은 직업도 있는데 왜 아직도 옛날 꿈을 못 잊고 술에 빠져 사는지 도무지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술만 아니었다면 우리 집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화목했을 텐데. 아버지는 덜 자란 철없는 사춘기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출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그 많다는 지지자들은 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일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커가면서 나는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깊은 비애를 느꼈다. 아버지의 과대망상은 정상적인 사람임을 의심하게 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저 꿈을 붙잡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알 날이 올까. 그러면 아버지는 그 꿈의 마수에서 벗어나 온전해질 수 있을까. 나의 그 의문은 오랜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풀렸다.     

  술만 마시면 괴물로 돌변하던 아버지도 술의 마력이 지배하지 않을 때는 한없이 자상했다. 아버지는 큰 딸인 나를 특히 예뻐했다. 내가 태어나고 한 살이 지나자 매일 학교에 데리고 가 교무실 책상 위에 나를 앉혀놓았다. 그때 찍은 사진 속 나는 눈이 동그랗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귀여운 아기였다. 나는 특히 눈이 커서 선생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여자 선생님들은 “선화야, 나랑 눈 바꾸자.”라고 말했다. 대학생이었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걷는 모습을 보면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는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예쁜 딸을 어찌 그리 괴롭히셨을까. 

  내가 세 살 때 전국적으로 소아마비가 돌았다. 내가 소아마비에 걸리자 아버지는 나를 업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내가 소아마비를 앓았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걸 보면 아버지의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아버지에 대해 뭐라도 고마운 것이 있나 생각할 때면 나는 이 사실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을 때만큼은 나도 아버지가 좋았다. 멀쩡한 아버지는 내게 혼을 내거나 화낸 적이 없었다. 훈계를 늘어놓지도,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천자문과 바둑을 가르쳐줬다. 나중에 중학교로 옮겨 영어 선생님이 되어서는 가끔 영어책을 가져오게 해서 해석해보게 시켰다. 그럴 때면 나는 신이 나서 실력을 뽐내곤 했다. 

  6학년 때였다.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정문이 큼지막하게 클로즈업됐다. 진리의 전당이 있다면 저곳이 틀림없었다. 그 대학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신비한 느낌에 사로잡혀 “아빠, 나 저 대학 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그래, 보내주마.” 했다. 내 마음은 갑자기 큼직한 날개를 펴고 원대한 미래를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가 나의 미래를 격려하고 믿어준다는 생각에 언젠가 그 일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때부터 옥스퍼드 대학은 나의 동경이자 꿈이 되었다. 훗날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토마스 하디의 소설 『무명의 주드』를 읽었다. 나는 주드의 운명과 나를 동일시하며 속으로 흐느꼈다. 옥스퍼드를 모델로 한 크라이스트민스터가 주드에게 불가능한 꿈이었듯이 내게도 옥스퍼드는 그러했다. 주드에게 그 동경을 포기하는 게 너무나 쓰라렸던 것처럼 내게도 역시 그랬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없었더라면 옥스퍼드가 나의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인기 있던 만화의 캐릭터였던 아수라 백작처럼.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좋아하는 마음과 극도로 싫은 마음 사이를 오갔다. 술에 취하는 날이 많을 때면 왜 내 아버지는 이런 사람일까 억울하고 슬펐다. 분노는 억압했다. 우리 집에서 아이들은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어디에, 누구에게 표출한단 말인가.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깊어 아버지의 죽음을 바랄 정도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은 법정에서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자식이 있는가?”라고 외친다. 그 장면을 읽을 때 소름이 돋았다. ‘도스토옙스키도 이걸 느꼈구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죄책감이 인류 공통의 보편적인 감정이었음을 확인했다.

  어머니가 절에 다녀서 나는 우리 집의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기도를 들어줄 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때로 부엌 아궁이 앞에서 울면서 나는 손을 모으고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술 좀 끊게 해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계시면 혼을 내서라도 아버지가 술을 못 마시게 해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었겠지만 응답해 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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