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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다시 암담한 현실로

다시 암담한 현실로    

   

  대학생이 되어 우리 가족은 두 번 이사했다. 드디어 지하 아닌 지하에서 빠져나와 오랜만에 깔끔한 집에서 일 년을 살았다. 내 방은 햇볕이 잘 들어왔다. 무엇보다 바닥이 매끈한 모노륨으로 깔려 있어서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고등학교 삼 년을 칙칙하고 컴컴한 곳에서 지내다 밝고 깨끗한 집으로 이사 오니 얼마나 흥분이 되었는지 모른다. 내 방 한구석에는 시골에서 보낸 쌀가마니가 놓여 있었다. 덕분에 종종 쥐 한 마리가 방을 드나들었다. 그래도 나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새라 크루의 방에는 비교할 수 없었어도 그 정도면 대만족이었다. 

  일 년을 지내고 근처에 있는 빌라로 다시 이사했다. 주인이 아버지 때문에 전세 기간을 연장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새집에서는 주인이 방 두 개를 쓰고 우리가 방 두 개를 썼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내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 자주 다가와 이야기를 걸었다. 대학생이 되어서인지 이제 주인집 아주머니와도 말을 트고 대화 상대가 되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늘 민소매 런닝에 긴 속바지를 입고 다녔다. 거실은 그저 통로 역할만 했기 때문에, 아저씨를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기숙에게 전화를 건 후 빌라 정문을 통과하여 집 쪽으로 향하는데 어둠 속에서 “누나!”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이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 무슨 일 있어?” 그 시각에 동생이 밖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건 뭔가 집에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큰일 났어. 집에 불났어.”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불이라니? 

“언제? 어떻게? 누구 다쳤어?”

“아니, 다친 사람은 없어. 아까 저녁에 불나서 소방서에서 왔다 갔어. 안방이 다 탔어.”

“아버지는?”

“괜찮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건데?”

“아버지 말로는 안방에 불이 나서 바로 밖으로 도망쳤다는데. 소방서에서는 전기가 누전된 것 같대.”

  일단 내 눈으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야 했다. 밖에서는 집에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다른 집까지 불이 번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집 문을 여니 탄내가 진동했다. 이게 뭔 일이야. 최루 가스를 실컷 마시고 왔더니 집에서는 불이 나고. 거실 벽과 천장에 검은 그을음이 음울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거실의 등이 꺼져 촛불을 켜 놓았다. 우리 집 안방은 완전히 다 타버렸다. 다행히 주인집 방과 내 방은 무사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안방의 시커먼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인이 방 하나를 내주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그 방에서 당분간 생활하기로 했다. 내 방에 들어가 보니 책꽂이에 꽂아둔 책들과 노트들의 표지가 전부 검게 그을어 있었다. 열어보니 안은 멀쩡했다. 고등학교 때 수해가 나서 책과 노트를 다 버렸던 기억이 났다. 특히 아까웠던 일기들. 대학생이 되어 나는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벌써 두툼한 노트로 몇 권이 되었다. 그 일기도 겉만 그을었고 속은 괜찮았다. 나의 보물 1호였던 일기가 살아남아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횡설수설하기만 했다. 불이 날 당시 집에는 아버지 혼자 있었다고 했다. 화재의 진원지는 우리 집 안방이었으니 원인을 짐작할 만했다. 골초였던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다 실수로 이불에 불똥이 튀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내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낮에 있었던 시위 현장은 꿈결과 같이 느껴졌다. 우리 집에 일어난 이 사건을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잠을 도피처로 삼았다. 도저히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다. 어떻게든 되겠지, 더한 일도 겪었는데 뭐. 그럴 때면 오히려 내 속에서 알 수 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자꾸만 나에게 시비를 걸고 못살게 구는 불운에 대고 해볼 테면 해봐라, 내가 지나, 그런 말을 퍼붓고 싶었다.

  다음날 주인집 아주머니는 내게 거실과 부엌을 수리해야 하니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했다. “얼마나 들까요?” 물으니 수백만 원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의 표정은 피해자니까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살갑고 잘 웃던 아주머니가 너무나 쌀쌀해져서 서운하다 못해 서러웠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디서 그 돈을 마련한단 말인가. 내가 홍대에서 받고 있었던 매달 장학금은 절반은 생활비로 쓰고 절반은 꼬박꼬박 적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깨야 하나. 속이 쓰라려 왔다. 그게 어떤 돈인데...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일단 집수리를 시작하시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대대적인 집수리가 시작되었다. 이참에 주인집은 잘 되었다는 듯 아예 부엌 가구를 교체하고 거실 벽지와 바닥재까지 싹 갈아버렸다. 우리 집은 벽지와 장판을 간 게 전부였다. 비용 대부분이 주인집 수리에 들어갔다. 그래도 불을 낸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억울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우리 집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그 집에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실직 상태에 아이들이 셋이라는 소문까지 함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을 가져오고, 어떤 사람들은 이불을 사주었다. 며칠 뒤에는 장롱이 들어왔다. 이웃들이 돈을 모아서 샀다고 했다. 텅 비었던 안방이 빠르게 채워졌다. 남에게 물질적인 도움받는 걸 내켜 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사람들은 “학생, 용기 내요.”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제 웬만큼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TV가 없었다. 한 달이 지나서 TV를 다시 샀다. TV 없이 한 달을 견디는 게 그리 힘들지 몰랐다. 

  어느 날 동생이 내게 “학교에서 누나보고 오라는데.”라고 말했다. 

“왜?”

“학교에서 우리 집 돕는다고 성금을 걷었대. 그래서 누나보고 받으러 오래.”

두 동생은 당시 둘 다 경성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큰동생이 전교 일 이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우리 집 사정에 더 관심을 가졌을까. 전교생이 성금에 참여했다고 했다. 나는 몹시 거북하고 쑥스러웠지만 그렇게 큰 정성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동생 학교 교무실로 찾아갔다. 동생 담임 선생님이 나를 위로하면서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었다. 크게 인사를 하고 학교를 나와 봉투를 열어보았다. 수백만 원의 돈이 들어있었다. 적금을 깰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살면서 물난리, 불난리를 다 겪어 보았다고. 그런데 사람이 다치거나 죽지만 않으면 불난리가 차라리 낫더라고.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려 정리할 것이 없지만 물난리가 나면 버리고 정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수해가 났을 때처럼 다시 폭음을 시작했다. 정확히 삼 년이 지난 후였다. 주기가 들어맞아서인지, 화재라는 사건이 아버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어서인지 몰랐다. 나는 어서 아버지의 증상이 악화해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를 바랐다. 그 방법 외에는 아버지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불같이 화를 내면서 큰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아버지에게는 큰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늘 큰아버지에게 가곤 했던 걸 보면. 저녁이 되자 큰집에서 주인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큰아버지는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를 입원시켰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버지의 네 번째 입원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친구 진숙에게 할 수 있었다. 진숙의 아버지도 알콜 중독자였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나는 이 세상에 알콜 중독자들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숙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와 그리 겹치는 것이 많던지. 비로소 우리 집 가정사를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후련했다. 아버지가 입원한 날, 나는 저녁에 학교 도서관으로 진숙을 찾아갔다. 도서관에 있던 진숙은 기꺼이 나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주었다. 나는 울며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진숙은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찾은 기분이었다. 꼭 필요한 순간에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달쯤 지나 아버지가 돌아왔다. 이제 오십이 넘은 아버지. 아버지는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활동이 적어지고 몇 시간씩 방에 누워 지냈다. 그러다 보니 올챙이처럼 배만 나왔다. 아버지는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서 발끝을 까딱까딱하면서 흘러간 옛 가요를 메들리로 흥얼거렸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섬마을 선생님’과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나는 하도 많이 들어서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를 저절로 외웠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빠, 기분이 좋아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기분 좋지.”라고 답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아요?”

“뭐, 그냥 좋지.”

  약의 부작용 탓인지 아버지와 정상적인 대화가 점점 불가능해졌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이란 걸 하기는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능이 나빠지는 것일까, 인지력이 퇴화하는 듯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을 때도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전에 없던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은 정말 고칠 수 없는 것일까. 저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나. 아버지의 인생이 가엾었다. 

  그 당시 나는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갑자기 신앙의 힘으로 아버지를 고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버지 얘기를 들은 한 선배가 아버지를 모시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 보라고 충고를 해줬다. 정말 그렇게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이었다. 날씨가 청명했다. 여전히 순복음교회를 다니고 있던 나는 오산리 금식 기도원에 가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가겠다고 했다. 나와 아버지가 둘이 어딘가를 함께 가는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기도원에는 이불이 충분하지 않았다. 얇은 이불을 보자기에 싸 들고 서대문 근처 어딘가에서 기도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기도원에 도착해서는 대형 본 예배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중고등학생 시절 여름 겨울 수련회 때마다 온 곳이라 익숙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잠을 자기도 하고, 소리를 높여 기도하기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했다. 아버지는 설교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수시로 드나들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자꾸 왔다 갔다 하는 아버지가 신경 쓰였다. 공연히 왔다는 생각에 낙담이 되었다.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빠, 나랑 같이 기도해요.” 내가 아버지 손을 잡고 기도하면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아버지의 집중력이 곧 흩어졌기 때문에 오래 기도할 수가 없었다. 기도원에 온 게 후회되었지만, 이불까지 싸 왔으니 하루는 지내고 가야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찌감치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넓은 예배당의 한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다음날 나는 그냥 돌아가기가 서운했다. 기도원에는 담당 목사가 기도해주는 사무실이 있었다. 아버지를 데리고 그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젊은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기도를 받고 싶으신가요?”

“저희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세요. 기도로 고쳐 주셨으면...”

“기도합시다.”

목사는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생 때 용인 정신병원의 의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목사는 그저 형식적으로 아버지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아무런 간절함도,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과 그의 가족에 대한 긍휼한 마음도 없었다. 짧고 기계적으로 기도를 마친 그는 이제 나가도 된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너무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아빠, 이제 집에 가요.” 아버지는 순순히 나를 따랐다. 딸이 가자고 하니까 기도원까지 따라오고 가자니까 가는 아버지가 마치 나의 보호에 맡겨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인생을 헛되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고쳐 주실 수 없으신가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글픔과 막막함에 눈물을 지었다. 

  ‘다시는 아빠를 이런 곳에 모시고 오지 말아야지.’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다시 집까지 꽤 먼 길을 돌아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집을 떠나 딸과 하루를 지내고 온 게 좋았었나 보다. 쌀쌀한 날씨에 손과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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