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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Nov 28. 2023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회심

회심     


  1학년 여름방학의 신비한 체험 이후 나는 마치 돌다리를 건너듯 하나의 철학에서 다른 철학으로 신속하게 옮겨갔다. 최초의 범신론은 곧 불가지론으로 변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실존주의에 이끌렸다. 아버지가 입원한 후 한 달간 나는 철저한 허무주의자로 변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이런 사상의 편력을 거치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이전의 순진한 신앙을 이미 버렸지만, 교회를 떠날 용기까지는 없었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한갓 신화이고 인간이 만든 고등종교에 불과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신 같지는 않았다. 내가 곧 신이라는 미망에서는 이미 벗어난 지 오래였다. 내가 기독교를 완전히 부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 주위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정말로 자신을 신앙에 헌신한 사람들, 나는 그들이 믿는 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단순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죽음이 정말 끝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가 있는지. 진리가 있는지, 있다면 진리란 무엇인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내게 일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겉으로는 남들처럼 먹고 자고 공부했지만,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시도 이 문제가 떠나질 않았다. 이때 나는 C. S. 루이스를 발견했다. 『단순한 기독교』에서 그는 예수에 대한 세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예수는 사기꾼이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의 주장처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루이스의 추론처럼 나 역시 예수를 사기꾼이나 정신병자로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 걸까. 앞의 두 가정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저절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긍정할 수는 없었다. 예수는 나를 몹시도 괴롭히는 존재였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예수를 믿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성경에 쓰여 있어서?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조소를 일으킬 뿐이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설득력 있는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때 나는 루이스에 이어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었는데 사실 그 내용을 당시에는 이해하지는 못했다.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섣불리 기독교를 내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영원히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고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캄캄한 절망이 나를 덮쳐왔다. 나의 표정은 늘 심각했고 양 눈썹 사이에는 깊은 미간 주름이 접혔다. 


  우리 과에 세학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한 선배가 세학 선배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서 나에게 소개했다. 세학 선배는 작은 눈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늘 혼자 다녔다. 종종 그 선배를 도서관에서 만났다. “커피 한잔 마실까?” 세학 선배는 나에게 다가와 대화를 청했다. 커피 자판기가 있던 도서관 휴게실은 공부하다 잠시 나와 쉬면서 대화하는 학생들로 늘 북적였다. 커피 냄새와 담배 연기, 학생들의 대화로 그 공간은 늘 활기찼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한 음식점 구석에서 신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 유명한 ‘대심문관 전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세학 선배는 가볍고 재미있는 대화가 어울릴만한 공간에서 나에게 성경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성경을 잘 읽지 않았다. 복잡한 철학 서적들에 비해 성경은 시시하고 믿음을 강요하는 따분한 책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세학 선배가 이야기해 주는 성경 내용은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내가 물으면 선배는 직접 성경을 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로 내가 짧게 질문을 하고 선배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선배의 이야기는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는 쉽고 단순하게 신앙에 이른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성경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진짜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믿음이 없는 것은 제대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선배는 어쩌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아는지. 지금껏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게 부끄러워졌다. 나도 선배처럼 굳건한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살아가는 목적을 아는 사람으로 보였고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런 식으로 간간이 선배와 대화를 나눴지만, 나의 깊은 의심들을 솔직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 선배조차 내 의심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7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가버린다는 것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이 끔찍했다. 나는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가방에 큰 성경을 넣어 다녔다. 도서관에서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이 드는 내용들을 노트에 적었다. 그렇게 12월을 보냈다. 24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보통 교회에 가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밤새 하곤 했었다. 그해 나는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동생들이 교회에 가고 나는 집에 남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TV에서 예수의 생애나 성경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외화를 보여주곤 했다. 그해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라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도 그 영화가 어느 나라 영화인지, 감독이 누구인지 모른다. 흑백영화였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우연히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나는 곧 홀린 듯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전쟁에 나가 심한 부상으로 집에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병중에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병에서 낫자마자 광장으로 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옷을 다 벗어버린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제부터 나의 진짜 아버지십니다.”라는 말을 하고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난다. 이후 그는 탁발수도사가 되어 일정한 거처도 없이 세상을 떠돌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는 해를 형제라고, 달을 자매라고 부르고 새들과 대화를 나눈다. 점점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여 무리를 이루게 되자 교황이 그를 소환한다. 교황은 그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어떻게 수도회를 이끌 것인지 묻는다. 프란치스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늘에 나는 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십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입히십니다.”라며 교황 앞에서 설교한다. 교황은 “감히 내 앞에서 복음서를 설교하는가?”라고 말하지만, 결국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하고 축복한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영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한순간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단순하고 청빈하게 살았다. 교황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체화한 그의 삶이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저런 삶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것도 저런 삶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결코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나 높은 곳에 서 있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슬프고 절망스러워 한참을 통곡했다. 

  한 시간 정도 진정할 수 없는 통곡이 계속되었다. 나는 결코 내가 원하는 숭고하고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자각, 나의 삶은 시시하고 보잘것없이 끝나버리고 말 거라는 쓰라린 인식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나와 프란치스코의 거리가 이 정도라면 나와 하나님은?’이라는 질문이 번쩍하며 머릿속을 관통했다. 우주 저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나의 거리는 수백만 광년으로도 모자랄 듯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죄’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 무엇으로도 좁힐 수 없는 신과 나 사이의 이 무한한 거리. 나는 신에게서 분리되었고 무엇을 하더라도 그 분리를 극복할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서 이렇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다. 두려움이 덮쳐왔다. “아,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 말로 하지 않았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돌이켜 보니 그때가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1일이 지났고 1988년 새해가 왔다. 나는 여전히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열흘이 지났다. 올해도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어. 나는 차라리 죽기를 갈망했다. 내 영혼은 이미 전 생애를 살아버린 노인과 같았다. 인생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삼일 정도 영혼에 칠흑 같은 어둠이 닥쳐왔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지냈던 삼일, 예수님이 무덤 속에 갇혀 있던 삼일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도서관 3층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성경을 꺼냈다. 죽을 지경으로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다시 한번 마음 깊은 곳에서 뜻밖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에게 죽으라고 하시면 죽겠습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성경을 펼쳤다. 사도행전이었다. 성경 중에서 유독 내가 싫어하던 책이었다. 사도들의 행적이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냥 펼쳐진 곳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부활한 예수가 감람산에서 승천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설교하니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 내가 사도행전의 장면 안으로 들어간 듯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설교하던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성경의 구절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다. 이천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너무나 생생한 그 현장에 가 있었고 예수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말들이 다 믿어지는 것이었다.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뭔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어, 이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다니. 내가 얼마나 원하고 원했던 평화였는가. 그런데 그 평화가 내 영혼 속에서 생겨나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쁨, 기쁨. 이런 기쁨이 있었다니.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터질 듯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는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이 경험이 뭔지 몰랐지만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았다. 내 주위는 고요했다. 다른 학생들은 각자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 그 공간에 있었지만 동시에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 있었다. 누구에게서도 이런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미쳤거나 비정상적인 경험을 한 거라기엔 마음의 상태가 너무나 평온하고 기쁘고 고요했다. 터질듯한 기쁨을 느꼈지만, 전혀 흥분되지 않았고 들뜨지도 않았다. 이 년 전의 신비로운 체험과는 분명 달랐다. 그때는 내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고양된 느낌, 어떤 것도 나를 제약할 수 없다는 자유로움에서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요한이 고백했듯이 나도 예수를 보고 듣고 알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성경의 구절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움직이니 더 이상 과거의 의심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꽤 넓은 골목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 길 전체가 융단처럼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밟고 걸어가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혼자 춤을 추었다. 골목 안에서 나 혼자 춘 그 춤은 내게 과분한 은총을 내려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을 찾아 읽었다. 그 글에서 루터가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로움과 자유에 대해 나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기쁨이 그치질 않았다. 혹시 자고 일어나면 기쁨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나의 경험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한 달 동안 나는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성경의 내용들이 다 이해되었다. 마침내 믿음이 찾아왔고 나는 그렇게 멀리 느껴졌던 하나님이 나의 마음속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저 공식 같기만 했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삼 개월 정도 나는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겪은 일이 거듭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놀랍고 놀라웠다. 그동안의 모든 불운했던 과거의 일들이 다 보상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앞에는 긴 순례의 여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을 뿐이며, 거듭남의 기쁨이 아무리 경이롭고 황홀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사그라질 것이고, 신앙의 여정은 너무나 혹독하고 험난하다는 것을. 인생의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삶은 나에게 계속 어려운 시험을 보낼 것이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확실히 변화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견고한 성에 갇혀 누구와도 마음을 드러내고 소통하지 않던 내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나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었다. 이제는 이웃사랑이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삶의 목적이 생겼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의 뜻을 위해, 그의 나라를 위해 살고 싶었다. 

  그 이후 다시 회의와 의심이 찾아왔을 때도 그 사건은 잊어버릴 수도, 부인할 수도 없이 견고히 내 신앙의 이정표로 남았다. 그 사건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심리적인 어떤 작용으로도 설명될 수 없었다. 다시 인생이 캄캄한 밤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형국이 되었을 때도 예수를 만났던 그 사건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등대처럼 저 멀리서 불빛을 비추었다. 덕분에 나는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홍대에 간 사건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내가 서울대에 가서 어릴 적 꿈을 이뤘다면 얼마나 오만해졌을까. 아마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내 잘난 맛에 살았으리라. 나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해 하나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했다. 시간이 지나서 그 해석은 폐기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큰 위로가 되는 생각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우리 아버지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변화되어 사람들에게 간증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올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생각만 해도 벅차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있다고 믿게 될 거야,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해 주었다. 아버지는 내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너무나 단단한 껍질이 있어서 어떤 말도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주의를 흩뜨렸다. 그때마다 깊은 비애를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해 봄 어느 날, 아침부터 술을 먹고 낮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신세 한탄을 했다. 늘 기분이 좋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좀처럼 진정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빠,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아버지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크고 거무스름한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도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아버지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내 눈에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는듯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리 아버지 어떡해요? 저를 만나 주셨잖아요. 아버지도 만나 주세요.” 

  기도가 끝나도 아버지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토닥여 주고 손을 잡고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어떻게 갑자기 터져 나온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나는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리 배우자가 된 것 같았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어 나의 위로를 구하고 있었다. “아빠, 좀 누우세요. 제가 좋은 책 읽어 드릴게요.” 나는 그때 읽고 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가져왔다. 그 책의 내용이 아버지의 슬픔을 진정시켜 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좀 지쳤는지 내 말대로 자리에 누워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낙담하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어쩌면 그때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이곳저곳 펼쳐 위로될만한 구절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훌쩍이면서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계속 책을 읽었다. 시간이 참 더디 갔다. 진정되는 듯하다가 다시 터져 나오는 울음.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아버지가 잠이 들었다. 나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잠든 아버지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혼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날 내가 한 행동은 이전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 지독한 미움이 다 사라져 버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남았다. ‘내가 진짜 변했구나.’ 힘겹고 마음 아픈 하루였지만 ‘이제는 이렇게 아버지를 사랑해 드려야지,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야지’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하고 무서워하지 않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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