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불면의 밤
불면의 밤
“그런 아인 이 도시에 없습니다.”
아쉽다는 듯,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소장은 말했다.
“우리에겐 신생아만 있어요.”
맥이 탁 풀렸다. 축구공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설렘이 한순간에 주저앉았다.
“신생아로 하시죠.”
소장은 선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몸이 힘들지, 마음이 힘들지 생각해 보세요.”
“아니요. 안 하면 안 했지, 신생아는 못 해요.”
선유는 확고하게 응수했다. 잘못 찾아왔나 보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긴 난관이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실망한 선유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 때였다.
“C 시에 여자아이가 한 명 있긴 한데, 알아보시겠어요?”
소장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몇 살인데요?”
“한 다섯 살쯤 되나...”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뒤지더니 한 장의 종이를 빼 들고 돌아왔다.
“희야라는 아이입니다.”
선유는 떨리는 손으로 소장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희야. 희야라는 아이가 있었다. 선유는 종이를 손에 든 채 물었다.
“이 아이가 어디에 있죠?”
“요새 잠이 안 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선유는 소파에 꺼지듯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를 응시하는 선유의 침울한 눈초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호진은 거실과 서재를 몸집 큰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노란 표지의『쇼스타코비치』가 들려있었다.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한 책장 한 칸에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심지어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까지, 작곡가 이름이 적힌 알록달록한 책들이 빽빽했다. 서재에서는 차이콥스키 4번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보, 나 잠이 안 온다고!”
선유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그제야 호진은 책에서 고개를 들어 큰 눈을 끔뻑거리면서 그녀 쪽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음악 소리 좀 줄여! 시끄러워 죽겠어!”
선유의 말에 호진은 서재로 들어가 노트북 스피커의 볼륨을 낮추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잠이 안 온다고? 왜요?”
호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버릇대로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물었다.
“당신은 워낙 깊이 자니까 내가 못 자는 것도 몰랐지.”
선유는 약간의 비난을 섞어 투덜댔다. 호진의 어깨가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선유의 공격을 예상하고 긴장하는 듯했지만, 태연한 척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잘 모르겠어.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가 봐. 이런 적이 오랫동안 없었는데.”
“왜 그러지?”
호진은 짐작이 안 된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긴장하면 눈을 깜빡이는 습관이 있었다. 선유는 ‘어머니 기가 세서’ 그런 거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별일 아니야. 나중에 다시 얘기해”.
그녀는 호진이 더 물어주길 바랐던 걸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된 적이 있었던가. 역시 그는 선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일어나 서재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쉰 뒤, 선유는 멍한 눈길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소박한 이십 평 남짓한 아파트 거실이었다. 거실 바닥과 베란다는 몇 년 전 이사할 때 리모델링 해 오래돼 보이지 않았다. 선유가 고가구점을 뒤져서 구한 소파는 누워서 잘 수 있을 만큼 길었다. 짙은 갈색 가죽으로 덮인 튼튼한 소파였다. 소파 맞은편 흰색 거실 장 위에는 TV와 작은 오디오 세트가 놓여 있었다. 그 옆 폭이 좁고 기다란 책장에는 클래식 음악 CD와 지난 시절의 자취를 담은 카세트테이프가 먼지를 이고 꽂혀 있었다. ‘도대체 저 테이프들 언제 거야. 버리든지 해야지. 집도 좁은데...’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소파 위 벽에는 그들의 결혼사진이 걸려있었다. 검은 턱시도 양복을 입은 호진은 지금보다 숱이 훨씬 많았고, 눈, 코, 입이 큼직하고 시원시원했다. 그의 손은 부드럽게 선유의 허리춤을 감싸고 있었다. 눈이 큰 선유는 작은 키에 짧은 드레스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약간 통통했다. 머리숱을 위로 틀어 올리고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해서인지 지금 보면 좀 촌스러웠다. ‘저 사진은 십사 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구나.’
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옆에 붙은 작은 방문을 열었다. 깔끔한 거실에 비해 방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작은 옷장이 벽 쪽에 붙어있고 그 옆으로 낡은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창문 아래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캐리어와 상자들이 방을 꽉 채워, 옷장과 책상으로 가는 두 갈래 짧은 오솔길만 남아있었다. ‘이 정신없는 방에서 번역일을 했다니. 하긴 서재보다 혼자 일하는 여기가 더 집중이 잘 되니까.’ 그녀는 지난 이 년간 무려 400페이지가 넘는 러시아어 원서를 그곳에서 번역했고, 이제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는 게 새삼 뿌듯했다.
“휴...도저히 안 되겠어.”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방에 누군가 살게 될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몇 년째 그 생각에 묶여 꼼짝하지 못했다. ‘정말 안 될까. 짐을 치우면 되는 거잖아.’ 그녀는 어지러운 짐들이 사라지고 정돈된 방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방 문제가 아니야. 이제 결정해야 해. 움직여야만 해...’
그날 밤도 선유는 잠들지 못했다. 호진은 금세 잠들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 벽을 응시했다. 검은 벽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만 망설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걸까.’ 그녀의 눈앞에 돛이 부러져 좌초된 배처럼 갈 곳 잃은 초라한 두 노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아니야.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끔찍해. 무서워...이제 시부모님도 더는 뭐라 하지 않는데...더 늦추면 안 돼.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그녀는 한참 뒤척거리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내일 선교사님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 생각이 뒤척임을 멈추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