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지는 아이

23화 가락국수와 탄이

by 별지킴이

소망원 주변의 논이 연녹색으로 물들었다. 꼿꼿한 벼 이파리가 작은 창처럼 위로 뻗어있고, 그 아래로 겸손하게 고개 숙인 갈색 벼 알갱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벼 이삭이 녹색과 누런 색조로 가득 찬 논밭이 신선한 바람에 출렁였다. 하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희야를 데리러 오는 호진에게는 계절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희야를 집에 데려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계절의 변화는 그에게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에 다시 C 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호진과 희야는 역 구내에서 가락국수를 사 먹는 게 습관이 되었다. 가게 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뽀얀 김과 구수한 국물 냄새가 넓지 않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희야는 가락국수가 맛있나 보다. 매주 먹어도 질리지 않니?”

호진이 신기해서 입을 약간 내밀며 물어보면 희야는 짧게 “네.”라고 대답했다. 호진은 노란 단무지를 작은 그릇에 잔뜩 담아와 희야 앞에 내려놓았다. 희야는 재빨리 국수를 다 먹고 국물까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웠다. 그리고 냉큼 일어나 소망원에서처럼 빈 그릇을 식기 반납대에 가져다 놓았다. 호진은 뜨거운 김에 코를 킁킁대면서 국수를 먹었다. 그는 국수를 먹는 동안, 식기를 반납대에 올려놓는 희야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런 희야가 기특했다. 입양을 결정한 후로 호진은 희야에게 한결 익숙해졌고, 이제는 희야의 작은 표정이나 행동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지도, 떼를 쓰지도 않는 희야가 편했다. 희야는 묵묵히 자기 일을 처리하는 아이였다.

국수를 먹고 기차를 함께 타고 손을 잡고 논길을 걸을 때도 호진과 희야 사이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호진은 희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호진은 아이에게 말을 거는 법을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는 희야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매주 기차를 타고 두 도시를 오가던 그 가을이 호진에게는 벼가 익어가듯 희야에게 정이 들어가는 시기였다. 시간이 흘러 그날들을 떠올리면 호진은 달콤하고 그리운 추억에 잠깐씩 빠져들곤 했다. 가락국수의 뜨끈한 국물이 목으로 넘어가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통통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식기를 들고 가던 희야의 뒷모습도. 그 순간의 따뜻하고 훈훈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호진의 뇌리에 잔잔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희야와 함께했던 그 가을을 잊지 못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선유가 “오늘은 엄마가 희야 데려다줄게.”라고 말했다.

“아빠가 중요한 교회 회의에 참석해야 하거든.”

선유는 오랜만에 희야와 둘이 소망원에 가게 되어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처음 희야를 만나러 갈 때 탔던 그 다섯 차량 무궁화호가 끼익하고 섰다. 기차 안은 늘 한산했다. 느릿느릿 달리는 창밖으로 불그레한 노을이 회색 조각구름을 물들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한 시간 동안 선유는 최근 소망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어봤다. 희야는 끊임없이 조잘대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희야는 언제부터인지 선유와 있을 때면 저절로 말문이 터졌다. 선유는 희야의 말을 끌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준우랑 다연이가 또 싸웠어.”

“이번에도 싸웠어? 왜?”

선유는 준우와 다연이가 싸우고 나서 눈을 흘기며 끝까지 화해하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왜 싸웠는지는 잘 몰라.”

“걔네 자주 싸우니?”

“응. 근데 다연이가 솔이 언니하고도 싸웠어. 막 솔이 언니 머리를 잡아 뜯었어.”

희야는 두 손을 휘저으며 다연이가 머리를 잡는 흉내를 내면서 깔깔거렸다.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꽉 물고 실감 나게 연기했다.

“다연이 대단하네. 두 살이나 많은 언니 머리를 잡았다고?”

선유는 희야의 몸짓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둘이 이모들한테 많이 혼났어?”

“정옥 이모가 화나서 두 손 들고 서 있으라고 했어. 그래서 다연이가 막 울었는데, 진영이가 달래줬어.”

“진영이가? 진영이가 다연이를 좋아하는 거야?”

“몰라. 둘이 친해.”

진영이도 준수, 다연이랑 같이 희야와 동갑이었다. 펭귄 방 남자아이 중에서 제일 순하고 말수도 적었다. 수줍음이 많고 얌전한 모습이 희야와 분위기가 제일 비슷했다.

“근데 정옥 이모 무서워?”

“장난치다 이모한테 걸리면 무지 혼나. 남자애들도 정옥 이모는 무서워해.”

“너는 이모한테 혼난 적 없어?”

“응.”

선유는 희야가 정옥 이모를 제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옥 이모는 희야를 한 살 때부터 보아온,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 준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정옥 이모는 늘 희야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줬다고 했다. 희야는 종종 “이모가 나한테 먹을 것도 많이 줬어.”라고 말했다. 선유는 희야가 아기 때 정옥 이모와 어느 정도 애착을 형성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기는 누군가 한 명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하는데, 희야는 분명 그런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다행이야.’ 선유는 희야의 7년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그분에게 언젠가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막연히 다짐했다.

희야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엄마, 탄이 알아?”

“탄이? 탄이가 누군데?”

“소망원에서 키우는 개야. 까맣고 이만큼 커.”

희야는 어깨보다 넓게 두 팔을 벌려 탄이가 얼마나 큰 개인지 표현했다.

“탄이는 되게 무서워. 저번에 내 손을 물었어!”

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이가 얼마나 사나운 개인지 표정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선유의 눈에 그런 희야의 진지한 표정이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그렇구나. 정말 무서웠겠네. 엄마도 큰 개는 무서워.”

소망원에서는 개를 몇 마리 키웠지만, 선유는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어서 탄이가 어떤 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탄이를 마주칠 줄이야.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탄 후, 내렸을 때는 이미 사방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해는 어느새 급격히 짧아졌고,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버린 듯했다. 희야는 선유가 평소보다 더 단단히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하는 걸 느꼈다. 그들은 가로등 하나 없는 논길을 뛰다시피 걸어 정문을 빠져나갔다.

“아, 날이 이렇게 빨리 어두워질 줄 알았으면...좀 더 일찍 나올걸.”

희야는 선유의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진 걸 알아챘다. 그러나 희야는 선유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희야는 시간이 늦은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늘 이 시간에 호진과 돌아왔으니까. 정문에서 오리방이 있는 건물까지 희미한 누런 불빛 하나가 비추고 있었다. 모두 건물 안에 있는지 밖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희야는 선유의 손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 빨라짐을 느꼈다.

오리방까지 이십 걸음 정도 남았을 때였다. 불이 켜진 방이 보이고 작은 마당만 가로지르면 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그 정체 모를 물체가 눈을 번득이며 컹컹 짖기 시작했다. 탄이였다.

“엄마, 무서워!”

희야는 순식간에 선유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희야의 얼굴은 공포로 새하얘졌고, 가슴이 급격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 희야야?”

선유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흔들렸다.

“엄마, 저거 탄이야, 탄이! 나 무서워.”

희야의 떨리는 목소리에 선유는 앞을 응시했다. 희야는 시커멓고 거대한 탄이가 두 사람 가까이에서 위협하듯 짖는 것을 보았다. 짖는 소리가 커질수록 숨이 막히는 듯했다. 희야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탄이가 달려들어서 다시 손을 깨물기라고 할까 봐. 희야는 두 손을 꼭 쥐고 덜덜 떨었다. 이모들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의지할 데라곤 선유뿐이었다.

“엉엉. 엄마.”

“괜찮아. 괜찮아, 희야야.”

선유는 희야를 서둘러 두 팔로 감싸 안으며 몸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희야는 고개를 선유의 품에 파묻고 두 손으로 그녀를 꽉 붙잡으며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희야를 안은 선유는 어두운 사방을 둘러보며 발을 굴렀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선유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탄이는 물러설 줄을 모르고 자리에서 빙빙 돌며 두 사람을 향해 짖어댔다. 컹컹!

희야는 파묻은 선유의 가슴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었다.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는 희야를 다시 안는 손도 떨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희야는 선유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희야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선유뿐이었다. 희야는 선유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고 선유에게 더 단단하게 매달렸다.

“여보세요! 도와주세요!”

선유는 간신히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소리는 공기 속에 흩어져 아무도 듣지 않는 것만 같았다. 희야는 울기만 할 뿐 점점 숨이 가빠지며 탄이가 있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선유는 고개를 푹 파묻고 있는 희야를 더 굳게 끌어안았다. 희야는 당장에라도 탄이가 달려들까 봐 오들오들 떨었다. 시간이 너무나 더디 갔다. 선유의 외침은 더 커졌다. 희야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누구라도 달려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엄마는 왜 탄이를 쫓아내지 못하는 걸까?


그때였다. 마당 쪽을 향해 있는 방문이 열리더니 아이들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희야야!”
아이들이 소리치며 달려 나왔다. 곧 희정 이모도 따라 나왔다. ‘휴, 이제 살았다!’ 선유는 희야를 땅에 내려놓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긴장감이 풀리면서 몸에 힘이 풀렸고, 얼얼한 팔에 통증이 퍼져왔다. 평소 같았으면 체구는 작아도 제법 몸무게가 나가는 희야를 안을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탄이 저리 가!”

희정 이모가 막대기를 휘저으며 탄이에게 다가가자, 탄이는 언제 짖었냐는 듯 꼬리를 내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온순해진 패잔병처럼. 선유는 부리나케 희야를 데리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괜찮아, 희야야.”

선유는 희야의 등을 토닥였다. 잠시 후 희야의 흐느낌이 잦아들며 오르내리던 가슴이 멈춰 섰다. 이분 정도 되었을까. 그 짧았던 시간이 선유에게는 몇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많이 놀랐지? 엄마도 놀랐어.”

선유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희야를 꼭 안았다. 그 작은 몸에서 선유는 희야가 겪은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평소에는 묶어놓는데 오늘 어쩌다 풀려버렸지?”

희정 이모는 미안해하며 희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이들은 장난스럽게 “희야야, 탄이 무서웠어?”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희야도 차츰 긴장을 풀고 멋쩍게 웃었다. 좀전의 두려움은 꿈이었던 듯 사라졌다.

선유는 어두운 논길을 걸으며, 희야가 겁에 질려 자신에게 매달리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탄이를 보고 “엄마!” 하며 매달렸던 그 아찔했던 순간. 그 순간 선유의 머리칼이 저절로 쭈뼛하고 섰었다. ‘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선유에게 공포가 전염된 것 같았다. 탄이가 갑자기 달려들면 어떡하나. 머릿속이 새하얘졌었다. 정신이 아찔하고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체되었으면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지, 희야를 안고 뛰어야 할지 판단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렇게 겁에 질려 있던 자신에게 희야가 보호를 청하고 의지했다는 사실이 먹먹하기만 했다. 그래도 용케 공포를 참아낸 자신이 대견했다. 엄마라는 생각 때문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선유에게 세상은 어릴 때부터 무섭고 위험한 곳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희야가 자기 힘만 의지하고 살 뻔했다니.’ 선유는 자신에게 내재한 약자에 대한 보호 본능이 일깨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희야를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스레 벅찼다. ‘남편하고 내가 지켜줄 거야.’ 은은한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논길을 선유는 종종걸음으로 가로지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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