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지는 아이

25화 나는 네 엄마

by 별지킴이


나는 네 엄마야


다음 주 금요일, 희야가 다니는 유치원의 발표회가 열렸다. 여름부터 아이들은 두 개의 큰 행사를 동시에 준비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희야는 ‘에델바이스’와 함께 크레용 팝의 ‘빠빠빠’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선유는 장난스럽게 “한번 해 볼래?”라고 했고, 희야가 춤을 추기 시작하자 금세 “다시, 다시”라고 외치며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희야가 이렇게 춤을 잘 출 줄은 몰랐어!”

선유는 희야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카메라를 빠르게 따라갔다. 희야는 속으로는 수줍어했지만, 몸은 음악에 맞춰 저절로 움직였다. “점핑 예 점핑 예 에브리바디...” 이 부분에서 희야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무릎을 구부렸다가 다시 쭉 펴며 탄력 있게 튕겨 올랐다. 선유는 “어머, 어머”를 반복하며 감탄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호진도 놀란 눈치였다.

“희야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끼도 넘치네.”

희야는 ‘끼’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칭찬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아져 어깨를 으쓱였다.


호진은 출근 때문에 발표회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선유 혼자 C 시 기차역 근처에서 학교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희야가 다니는 유치원은 초등학교와 함께 운영되는 병설 유치원이었다. 가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작은 동네를 지나 길 끝까지 걸어가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누렇게 물든 논 한 가운데 파란색 지붕을 가진 학교 건물과 넓은 운동장이 보였다.

선유는 어떤 길로 가야 그 학교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논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길은 없었다. 10시부터 시작인데, 이미 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목적지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선유의 걸음으로는 십 분 안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선유는 초조한 마음에 길을 재촉했지만,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논을 둘러 가는 길이 더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구두를 신고 달리다 보니 발뒤꿈치가 까져 피가 나고, 이마에서는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늦으면 희야가 실망할 거야...아, 이런 일이!’ 선유는 한 번 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불안감을 삼켰다.

선유는 “어떡해, 어떡해?” 하며 헉헉거리다 결국 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희야 어머니, 지금 어디세요?”

“여기서 학교가 보이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늦어서 어떡하죠?”

선유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곳이 어딘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선유는 선생님이 알려준 길을 따라 땀을 흘리며 거의 달리듯 초등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2층 건물인 작은 학교였는데 운동장은 왜 이렇게 넓은지. ‘벌써 발표회가 시작됐을 텐데, 희야 순서가 끝났으면 어쩌지.’ 선유는 조바심이 나서 구두를 벗어들고 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올 걸. 희야가 춤추는 걸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맥이 빠졌다.

까진 뒤꿈치가 아파 절뚝거리며 뛰다시피 하는데, 저쪽에서 선생님이 선유를 맞이하러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제 곧 희야 순서예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휴, 다행이다!”

선유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선생님을 따라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 강당으로 올라갔다.

“희야가 엄마가 온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한가 봐요. 많이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요?”

뜻밖이었다. 한 주 전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더니,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지난 토요일처럼 외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대신, 마음이 기대로 출렁였다. 목구멍이 울컥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선유가 학부모 자격으로 학교에 오는 것은 48년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낯설고 묘하며 흥분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2층에 있는 작은 강당은 입구부터 북적거렸다.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무대복을 입은 아이들이 좁은 문으로 들락거려, 선유는 겨우 문을 통과했다. 땀을 닦고 숨을 고르며, 희야가 어디 있는지 작은 강당을 살펴보았다. 저 앞쪽 유치원 아이들 사이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희야가 눈에 들어왔다. 선유는 그 순간 희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꼽이 드러나는 흰 크롭티와 짧은 검은 치마, 선글라스에 빨간 립스틱까지. 선유가 알고 있던 희야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게 희야의 또 다른 모습이구나.’ 선유는 놀라우면서도 한편 우습기도 해 절로 피식 웃음이 났다.

“희야야, 잘해! 파이팅!”

선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희야가 들었는지 선유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선유를 알아보고, 그 순간 발그레한 볼이 상기되었다. 선유가 보기에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희야의 표정을 본 선유의 가슴에 잔잔한 물결처럼 기쁨이 퍼져나갔다. ‘오늘은 반가워하는구나. 아, 다행이다!’

초연이가 남자아이와 사회를 봤다. 토요일에 희야가 옆에 붙어 다녔던 그 초연이였다. 동그란 눈, 항상 웃는 표정의 초연이는 어두운 그늘이 전혀 없었다.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묻어났다. ‘부모와의 연락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 수 있구나.’ 비록 초연이 부모는 발표회에 오지 못했지만, 그 아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빛이 났다.

“이제 귀여운 유치원 친구들의 공연이 시작됩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초연이의 소개가 끝나자 아이들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배꼽이 보이는 옷에 거꾸로 쓴 모자, 선글라스 차림.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일곱 명 중 여자아이는 희야와 다연만 있었다. 희야는 무대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섰다. 음악이 흐르고, 빨간색과 파란색 조명이 번쩍였다. 아이들은 손을 휘젓고 다리를 흔들며 춤을 췄다. 선유는 희야만 지켜봤다. 희야는 무대에서 자신감 있게 춤을 췄다. 선유는 감탄했다. ‘진짜 무대 체질이네.’ 선유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희야가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선글라스 덕에 희야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희야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할까?’ 오직 자신을 위해 온 유일한 사람. 희야의 감정을 알기란 해저를 탐험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공연 중 갑자기 희야 머리에서 모자가 벗겨져 무대 위로 툭 떨어졌다. 모자를 주울 틈도 없이 희야는 그저 바닥에 내버려 두고 계속 춤을 추었다. 모자가 사라지자 희야의 머리카락은 자유롭게 공중을 헤집으며 나부꼈다. 선유는 희야의 머리칼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그 아이 속에 숨겨진 대담함을 느꼈다.

‘빠빠빠’가 끝나자마자, 곧이어 또 다른 곡이 흘러나왔다. “울 엄마 울 아빠 정말로 사랑해요...”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선유는 희야가 이 곡을 집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일곱 명의 아이 중, 두 명을 제외한 모두는 소망원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 이런 곡을 부른다는 사실에, 선유의 가슴은 아리면서도 분노가 치밀었다. 어른들은 가끔 아이들에게 너무도 무심하다. 소망원 아이들을 배려했다면, 그들에게 더 나은 곡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종달새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희야는 저 노래를 부르며, 나와 호진을 떠올리고 있을까?’ 선유는 마음속으로 희야가 그런 생각을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공연이 끝나자, 희야는 재빨리 손을 뻗어 떨어진 모자를 주워들었다. 퇴장하면서 희야는 흰 장갑을 낀 손을 들어 객석 쪽으로 가볍게 흔들었다. ‘저 손짓이 혹시 나를 위한 걸까?’ 선유는 그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희야의 마음을 읽으려 애썼다.

“우리 희야, 정말 잘했어.”

선유는 미소를 지으며 강당 앞쪽으로 다가가, 엄지를 치켜올리며 희야의 품에 꽃다발을 안겼다. 희야는 얼굴이 빨개져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그나마 덜 불편하구나. 정말 다행이다.’ 행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노란색과 회색이 섞인 유치원복으로 급히 갈아입었다. 선생님이 선유를 유치원 교실로 안내했다. 소망원 다음으로, 희야가 매일 지내는 중요한 공간을 들여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선유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교실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희야가 그린 그림들과 종이접기, 만들기 작품들이 선반 위에 정렬돼 있었다. ‘이 작은 교실 안에도 희야가 남긴 흔적이 이렇게나 많구나.’ 선유에게는 그 흔적들이 희야를 한층 더 가까이 느끼게 해주는 듯했다. 어쩌면 이곳이 희야에게 또 다른 집처럼 따뜻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선유는 책꽂이에서 희야 이름이 적힌 파일을 조심스럽게 꺼내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넘겨보았다. 선유가 그동안 유치원에서 한 활동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동안, 희야는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희야의 흔적을 이렇게 세심히 살펴본 사람은 아마도 지금까지 선유가 유일했을 것이다.

선유는 자주 희야에게 유치원 담임 선생님 얘기를 듣곤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선생님은 늘 희야를 귀여워하며 아끼는 분이었다. 선유는 첫눈에, 피부가 고운 오십 대의 선생님이 자상하고 친절한 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희야가 정말 야무지고 똑똑해요. 말도 잘 듣고, 착하고 배려심도 많고 아이들하고도 잘 지내죠.”

선생님은 침이 마르도록 희야에 대해 칭찬을 쏟아냈다. 희야는 소망원에서도 국장님과 이모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 아이였다. 희야가 입양된 후, 가정에서 잘 지낼 거란 걸 의심하는 선생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선유는 선생님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은근히 희야가 자랑스러웠다. 선생님들의 말에 기대를 걸며, 희야와의 적응이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낙관했다. 사실, 희야를 보면 무슨 일이 어려울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후에 그 기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선유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얼마나 큰아이 입양에 대해 무지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선유는 교실 곳곳을 사진에 담았다. 곧 유치원을 졸업할 희야가 언젠가 이곳을 그리워할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창가에 놓인 선인장과 제라늄 화분들, 아이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붙어있는 벽, 작은 책상과 의자들, 선생님의 탁자 위에 늘어놓은 책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희야의 모습까지, 선유는 이 모든 순간을 사진에 담았다. 희야는 유치원 졸업식을 맞아 부를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 그 가사와 멜로디가 마치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아침마다 모여서 재미있게 지내던 사랑하는 유치원을 떠나가게 되었네...” 희야는 구슬픈 가사와 멜로디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그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슬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이.

그럴 때마다 선유는 어딘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희야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감내해야 할 이별이라는 통과의례를 떠올릴 때마다, 선유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은 그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가야 할 시간이었다. ‘희야의 나이에 이런 이별이란 너무 버겁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그 슬픔을 씻어내도록 애정을 가득히 퍼부어야겠어.’ 선유는 자신이 가진 이 자신감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 얼마나 큰 쓰라림과 좌절을 가져올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 각오가 필요하다는 경고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선유에게 그 무게를 일러주지 않았다. ‘인간의 결심이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거대한 밀림을 헤쳐 나가려는 결심이 그저 빈약한 장비에 불과한 것처럼.’ 선유는 훗날, 그 결심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잠시 후 희야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 놀이터로 나갔다. 그녀는 잠시 웃고 떠들며 뛰어놀기 시작했다. 선유는 뒤따라 놀이터로 나갔다. 희야가 무리 속에서 노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조금 전만 해도 웃으며 뛰놀던 희야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고 시무룩해졌다.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걸 선유는 직감으로 알았다. 아이들은 모래 속에서 손을 놀리며 신나게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희야는 한 발짝 떨어져서 혼자 앉아 있었다. 고요한 섬이 되어 버린 것처럼. 희야는 어느새 양말을 벗고 맨발이 되었으며, 실내화는 대충 구겨 신었다. 평소와는 다른 희야의 행동에 선유는 충격을 받았다. 희야의 발이 새카맣게 먼지투성이로 변한 것을 보고 선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어져 “희야야, 양말 신고 신발도 제대로 신어야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희야는 들은 척도 없이 선유 곁을 떠나, 놀이터 구석에 있는 둥그런 통 안으로 사라졌다. 마치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 희야는 어두컴컴한 통 안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그 작은 공간은 희야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처럼 보였다.


희야는 갑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기분이 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듯했다. 선유가 공연을 보러 오기 전만 해도 설렘과 기대로 두근거렸지만, 그 후 선유가 계속 따라다니자 왠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나를 보러 온 거야” 그 믿어지지 않았던 감정은 이제 점점 부담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무겁고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감. 이제 나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희야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본래 모습을 숨기고 얌전한 아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희야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선유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고만 싶었다. 그곳에서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저 사람을 믿어도 될까. 희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선유가 언제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희야의 마음을 짓눌렀다. 희야는 자신이 엄마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통 안의 어둠 속처럼 캄캄하고 막막했다. 희야는 그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조금 후 선유는 조심스럽게 통 쪽으로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희야가 깊은 침묵 속에서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바닥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존재처럼.

“희야야, 왜 그래? 이리 나와서 같이 놀자.”

선유는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무언의 몸짓은 차갑게 선유를 밀어내고 있었다. 선유는 통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희야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통 밖으로 기어 나오더니 아이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희야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며, 선유를 거부하는 듯한 몸짓에 선유는 착잡해졌다. 희야의 행동은 햇살 아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끼는 하늘처럼 예측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웃으며 춤을 추던 희야와 지금 축 처져있는 희야, 어느 쪽이 진짜 희야일까.’ 선유는 매번 이런 순간마다 혼란스러워졌다. 희야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선유는 자신이 희야를 품어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선유는 희야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선유는 이 모든 것이 희야 뒤에 부모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희야의 새카맣게 더러워진 발이 선유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 모습을 곧 지나갈 것이라 믿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기다려, 엄마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줄게. 네가 혼자 통 속에 숨어 있지 않게 할 거야. 이제 나는 네 엄마야.’ 선유는 아이들과 다시 어울려 놀고 있는 희야를 멀리서 지켜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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