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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1. 2023

나는 코아였다. 1장 괴물 아버지

6화 책으로 달랜 슬픔


책으로 달랜 슬픔     


  알콜 중독자 가정의 아이들은 슬픔의 바다에 빠져 산다고 말한다. 혼자 슬퍼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이들은 슬픔을 삼키고 때로는 슬픔을 잊기 위해 도피하기도 한다. 나 역시 슬픔에 잠겨 있지 않기 위해 도피처를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현실이 두렵고 막막할수록 나는 책 속에서 위안과 환상을 퍼 올렸다. 책 속의 세계는 아름다웠고 결말은 항상 해피엔딩이었다. 주인공은 고난과 시련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우리 가정의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책은 『소공녀』, 『키다리 아저씨』, 『빨강머리앤』, 『작은 아씨들』같이 역경을 이겨내고 행복한 삶을 찾게 되는 소녀들에 대한 소설이었다. 나는 새라, 주디, 앤, 조와 나를 동일시했다. 특히 미래에 작가를 꿈꾸었던 나는 조를 내 모델로 삼았다.

  나는 위인전 읽기도 좋아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위인전은 하나의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 위인은 반드시 역경을 겪게 되어 있고, 그 역경을 통과하고 나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나 나라, 인류를 위해 큰일을 했다. 위인전을 읽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자꾸만 위인들과 나 자신을 견주어 보곤 했다. 내 나이 또래에 위인들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비교하면 내가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위인들을 동경했고 그들처럼 훌륭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만한 능력이나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시기심의 벌레가 내 가슴을 갉아 먹는 것같이 괴로웠다.

  나는 위인전을 통해 야망을 키웠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게 되었다. 과대 자기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과대 자기란 실제 자신보다 엄청나게 크고 위대한 자기다. 과대 자기를 가진 사람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실제 자기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그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으며 내게 과대 자기가 생겨났다. 문학이 좋았던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는데, 아마도 위인전을 읽고 노벨상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 나는 노벨 문학상을 받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아버지의 딸다운 꿈이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내 나름 많은 생각과 분석을 통해 결론을 얻었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내가 겪어야만 했던 가정의 불행을 해석할 틀이 필요했다. 위인전을 읽으며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내게 그런 시련이 주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현재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어 큰일을 해내면 현재의 시련은 충분히 보상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어린아이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어 그 시절의 내가 짠해진다. 아무도 나의 이런 생각을 알지 못했고 그 생각을 수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생각의 틀 속에서 살았다. 그 생각은 과도한 칭찬과 마찬가지로 내게 독이 되었다.

  성인이 된 내가 충분히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이유, 뭔가를 이루어내도 시시해 보이고 대단한 것을 성취해야만 내 삶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 같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좀처럼 나 자신에게, 내 삶에 만족할 수가 없다. 이런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하게 여겨지지만 나는 아직도 이 찌질한 자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의 의미

     

  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산을 넘어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보다 훨씬 먼 동네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는 항상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학교는 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였고,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돋보일 수 있는 무대였다. 밤에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다음날 학교에만 가면 그 전날 밤 있었던 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버지가 지독한 술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나는 그 사실이 창피해서 대학에 갈 때까지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괴물 같은 아버지가 있는 집은 이 세상에 우리 집뿐인 줄 알았다. 우리나라에 그런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된 나에게 놀라운 발견이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내게는 즐거웠다. 공부를 잘해서 나는 선생님들의 주목과 칭찬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다. 나는 집중력과 성취동기가 매우 높은 아이였다. 공부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책과 더불어 내가 슬픔에서 도피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피난처가 공부였던 셈이다.

  시험이 다가오면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밥상 아래 책을 펴고 공부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꾸짖지 않았고 아버지는 대견하게 여겼다. 한번은 곧 시험 기간인데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고 와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걸리면 공부할 시간을 빼앗길 게 뻔했다. 나는 책과 작은 상을 가지고 집 뒤 담벼락 쪽으로 숨었다. 등을 담벼락에 댔다. 집 벽에 상을 대고 가슴으로 받친 뒤 그 위에 책을 놓고 공부했다.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험 때는 아버지의 긴 술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무릎을 꿇고 술주정을 들으며 나는 애가 탔다. 그러면 어머니가 조심스레 “내일 애 시험이라 공부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럼, 공부해야지. 가. 공부해.”하고 나를 놓아주었다. 어찌나 좋았던지 나는 신이 나서 책상으로 달려갔다. 시험이 없는 동생들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붙잡혀 있어야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군 단위에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학생 수가 꽤 많았다. 3학년 무렵부터 나는 전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나와 라이벌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지금껏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가 이겨보지 못한 아이는 그 애가 유일했다. 여자아이 중에서는 나를 따라올 수 있는 아이가 없었다. 얼굴은 비록 예쁘지 않았어도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설명에 집중하는 나를 선생님들은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

  어떤 해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교사용 참고서를 주면서 아침에 칠판 가득히 문제를 적어 아이들에게 풀게 시키기도 했다. 답을 알려주고 설명을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신임을 받는 것이 나는 못내 자랑스러웠다. 6학년 때 선생님은 아예 나에게 통째로 수업 시간을 맡기기도 했다. 내게 가는 막대기를 주면서 말 안 듣는 아이는 때려도 좋다고 했다. 한번은 정말로 아이들을 나오라고 해서 손바닥을 때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에게 전권을 부여받은 나는 그게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이들도 아무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한 남자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한테 맞은 데가 아프다면서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했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 아이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시면 어떡하지? 우리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떡하지? 겁에 질린 나는 그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내게 다가와서 이르지 않을 테니 울지 말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이 내게 맡겨준 시간에 나는 종종 반 아이들에게 내가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로는 미리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재미있다며 자꾸만 들려달라고 했다.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함께 가던 친구들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선화야, 오늘도 얘기해 줘.” 그럴 때마다 어깨가 으쓱해지고 했다. 아이들은 내가 커서 꼭 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학교에서 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늘 상을 도맡아 타곤 했다. 특히 일기 쓰기 일등상은 항상 내 차지였다. 어머니는 1학년 때부터 내게 일기 쓰기를 시켰는데 일기를 밀리거나 하면 회초리로 맞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일기를 쓰지 않았다고 왜 맞아야 하는지 억울했지만, 그 덕분에 내게 글 쓰는 솜씨가 생긴 건 분명하다. 나는 크면 꼭 고생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누가 내게 말해준 것도 아닌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서울대에 가는 목표를 정했다. 서울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라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옥스퍼드 대학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꿈이었지만, 서울대는 구체적인 목표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시골에서 서울대에 가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라이벌이었던 아이가 결국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일단 서울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꿈꾸면서도 작가를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를 나온 후 정작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일단은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갈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나서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작가가 되어서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만 나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다 보상받을 것만 같았다. 서울대라는 뚜렷한 목표를 세운 나는 전보다 더 지독한 공부벌레가 되었다.

      

어머니의 가출

     

  누구나 어린 시절에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집에 없으면 온 세상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이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종종 어머니는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고 집을 비우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서 놀아도 마음이 허전하기만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어찌나 좋은지 온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내게 세상 그 자체였다.

  우리 집 부엌은 마루와 연결되어 있었다. 마루 끝에 문이 달려 있었고 그 문을 열고 댓돌을 하나 내려가면 부엌 바닥이 있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면 나는 부엌문 옆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서 어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대꾸도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 시간이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5학년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다녀왔는데 어머니가 집에 없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낯선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있는 것이었다.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비녀를 꽂은 그 할머니는 아주 늙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할머니는 어머니의 먼 친척이라고 하시며 어머니가 어디 가면서 며칠 집에 돌아오지 못하니 살림을 대신 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이나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내 가슴은 무섭게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이런 일은 전에 한 번도 없었다. 전날까지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암시도 주지 않고 어머니가 며칠씩이나 집을 비운다는 게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디 가셨는데요?”

“그것도 잘 모른단다.”

야속하게도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히 대답했다. 나에게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고 갑자기 땅이 쑥 꺼져버리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얼마나 지나면 돌아올지도 알 수 없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아버지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겁이 나서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정말 그날 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할머니가 저녁을 해주셨는데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꾸역꾸역 몇 숟갈 먹다 말았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힘들어서 도망친 걸까. 정말 그런 거면 나는 이제 어떡하지?’ 너무나 무서워서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었는데도 매일 들리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머니의 기척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출근했다.

  내게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며칠 있으면 돌아온다던 어머니는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학교에 가도 즐겁지 않았다. 세상은 내게 캄캄한 어둠으로 변해 버렸다. 어떤 빛 한줄기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가슴 속에 큰 구멍이 나버려서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앨범에서 어머니 사진을 하나 찾아냈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빙긋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가슴 속에 집어넣었다. 사진이 몸에 닿는 것이 매 순간 느껴졌다. 그 감각이 없으면 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 어머니가 있고 곧 돌아올 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 나는 장독대로 올라가 가슴 속에서 사진을 꺼냈다. 웃고 있는 어머니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언제 와? 언제 와?” 한길을 내다보며 사진 속의 어머니에게 나는 대답 없는 질문을 해댔다. 행여나 오늘은 올까 하는 기대는 매일 무너졌다. 이러다 영영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 끔찍한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울다가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열 시쯤 되었을까. 할머니가 나에게 “엄마 오셨다. 너 혼자만 밖에 나가봐라.”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꿈꾸는 기분이 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 대문을 열었더니 거기 어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어머니인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가. 그런데도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지 못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날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엄숙하게 굳어있던 어머니의 얼굴과 어머니가 했던 말만이 기억난다. 내가 울려고 하자 어머니는 울지 말라고 했다.

“조금 있으면 엄마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동생들 잘 보살피고 있어.”

  야속한 어머니! 어디에 있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정확히 얘기해주지도 않고 그 말만 했다. 나는 “엄마, 지금 어디 있어? 언제 올 거야?” 너무나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게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알게 될 수도 있어서 말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묻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다시 가지 말라고 붙잡고 울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어머니 표정에 혼날 것만 같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어머니는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어머니를 따라 뛰어가고 싶었지만, 나를 데려가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어머니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그날의 일은 어머니가 내게 했던 가장 잔인한 일이었다.

  정확히 한 달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왔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기적처럼 집에 있었다.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어머니가 돌아온 기쁨을 표현하지 못했다. 온갖 감정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도 나는 말로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다. 나의 감정을 어머니에게 표현하면 그것이 어머니에게 또 다른 짐이 될 것만 같아서였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도 묻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아무도 그때 어머니의 행적에 대해 밝혀준 사람이 없었다. 친척들에게 그 일을 물어보면 “네 엄마가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니?”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그때 어머니는 한 달 동안이나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으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나의 눈물은 말랐고 사진은 다시 앨범 속에 넣었다. 그때는 굳이 어머니에게 물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어봐서 그 답을 얻어낼 수 없을 거라고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코아의 특징이라는 것을. 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였다는 것을. 어머니가 부재했던 그 한 달은 내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버려진다는 느낌, 그것이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나의 영혼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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