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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23.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10화. 2장 소녀가장. 초등학교의 마지막 추억

초등학교의 마지막 추억     


  슬픈 회고록을 쓰고 있지만 인생이 어디 슬픈 일만 계속되겠는가. 나의 유년기에도 밝고 기쁜 순간들이 밤하늘 별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이 회고록에 다 담을 수 없을 뿐이다. 시골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언젠가 다시 꺼낼 참이다. 여기서는 짤막하게 마지막 나의 유년기를 보낸 서울 학교에서의 추억을 잠시 들추어볼까 한다.

  전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친구들이 생겼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난 후 가끔 분식집이라는 곳엘 갔다. 시골에서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달고나를 사 먹는 것이 유일한 군것질이었다. 가게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심스럽게 달고나 조각을 떼어내는 게 매일의 즐거움이었다. 어쩌다 성공하기라도 하면 어찌나 신이 나던지 의기양양해지곤 했다. 혀에 착 달라붙던 달고나의 쓴 듯 단 그 맛에 중독되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

“선화야, 우리랑 분식집 가지 않을래?”

  어느 날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설렘을 안고 친구들을 따라갔다. 처음 가 보는 분식집이라는 곳이 어떤 곳일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이 있었다. 어머니의 양말을 샀던 그 시장이다. 그 시장 주변에 분식집이 있었다.

“아줌마, 떡볶이 주세요.”

떡볶이가 뭐지? 잠시 후 접시에 가늘고 긴 흰 떡을 빨갛게 버무린 음식이 나왔다.

“선화야, 먹어 봐.”

그 떡볶이라는 것을 입에 넣은 순간 나는 세상에 이런 맛도 있었나 싶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매콤하면서 달콤한 희한한 맛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떡볶이 마니아가 되었다. 떡볶이 때문에 서울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느 날 아침 담임 선생님이 두 팔 가득히 편지를 안고 교실로 들어왔다.

“허 선화, 이게 다 너한테 온 편지다.”

“??”

이게 무슨 일이람. 선생님은 내 자리에 와서 책상 위에 편지를 쏟아놓고 갔다. 수십 통은 되어 보였다. 주소와 이름을 보니 전학 오기 전 평택의 우리 반 아이들이 쓴 편지였다. 각기 다른 필체로 내 이름과 아이들의 이름이 편지 봉투에 정성껏 적혀 있었다. 반 아이들이 “와아~”하며 탄성을 질렀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 그 편지들을 서둘러 책가방에 담아 넣었다. 노는 시간에 한 통씩 열어서 읽어보는데 아이들이 옆에 다가와 “어디서 온 편지야?”하고 물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 우리 반 애들이 보낸 거야.”

“대단하다, 야. 이렇게 편지를 많이 보냈어?”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는 내가 전학 가서 무척 아쉽다고 하면서 반 아이들 소식을 전해 주었다. 어떤 아이는 아주 짤막하게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만 적었다. 그러다가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남자아이가 ‘사실은 이 편지 담임 선생님이 숙제로 내주셔서 쓰는 거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피식 웃음이 났지만, 숙제로 내주었다고 실제로 편지를 쓴 아이들의 정성과 그걸 모아 부쳐준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떠난 학교와 친구들을 전혀 그리워하지 않은 내가 좀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 정도로 나는 서울의 매력에 홀딱 빠져있었다.

  당시 <들장미 소녀 캔디> 만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캔디>의 만화 주제가를 따라 부를 때마다 나는 그 가사가 나에게 하는 말같이 들렸다. 서울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과 확실히 달랐다. 시골에서는 TV로 방영되는 만화만 봤었는데, 서울에서는 아이들이 만화책으로 <캔디>를 읽었다. 어느 날 남자아이들이 노는 시간에 한자리에 모여 킥킥거리고 있었다. 반에서 키도 크고 하는 행동도 다소 성숙한 아이들이었다.

“뭐야, 쟤들 왜 저래?”

여자아이들이 눈총을 주며 궁금해했다.

“야, 너희들 <캔디> ○○ 페이지 봤냐?”

한 아이가 여자아이들에게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뭔데? 뭐가 나오는데?”

“한번 봐라. 푸하하.”

한 아이가 책을 펴서 슬쩍 보여주자 남자아이들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무슨 일인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여자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휴, 저질...”

“왜? 뭔데?”

“캔디랑 테리우스랑 키스하는 장면...”

“아~”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을 벌레 보듯 하며 눈을 흘겼다. 나는 그 상황이 참으로 낯설었다. ‘이 아이들은 참 조숙하구나.’ 싶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다.’ 오히려 아무 상관 없는 내가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몇 반의 누가 몇 반의 누구랑 연애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심심찮게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시골 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나에게는 어른의 세계를 엿보는 것같이 신기하기만 했다.

  학기 말이 되었다. 기말시험을 끝내고 반마다 학예회 준비로 바빠졌다. 나는 연극의 조명을 맡았다. 매일 같이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연습했다. 조명이라야 커다란 플래시를 켜서 비추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또 내가 준비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동화를 써서 아이들에게 읽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해서 다소 슬픈 내용의 동화를 한 편 썼다.

  학예회 날 연극은 성공적이었다. 친구들과 한 팀이 되어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이 몰려왔다. 우리 반에서 춤을 제일 잘 추는 여자아이는 혜은이의 가요 <제3 한강교>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시골 학교에서는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고전무용만 보던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그 아이의 춤을 보았다. ‘어떻게 춤을 저렇게 잘 출 수가 있지?’ 춤을 잘 추는 사람은 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왠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느낌을 주곤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동화를 읽어주는 시간이 되었다. 서울에 와서도 반 아이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읽어주게 될 줄이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동화를 읽어 내려갔다.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나의 낭독을 들었다. 낭독이 다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빨개진 나는 황급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순서가 다 마쳤다. 그때 우리 반에서 꽤 공부를 잘하던 한 남자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안경을 끼고 늘 반듯한 재킷 차림을 해서 어린 신사 같은 느낌을 주던 아이였다.

“선화야, 네가 쓴 동화 너무 재미있더라. 감동적이었어.”

“그~래? 고마워.”

“너는 꼭 나중에 좋은 작가가 될 거야.”

그 아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평소에 나에게 말을 걸지 않던 그 아이가 씩 웃으며 해주는 그 격려의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나는 그 말을 마치 예언처럼 소중히 내 마음 깊이 새겨 넣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 말을 해준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에 보석을 박아넣는 일이다.      


대통령의 죽음과 중학교 진학


  1979년 10월 어느 날 학교에 간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이 죽었대.”

“누가 총을 쐈대.”

믿어지지 않는 그 말에 너무 놀란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선생님이 뭔가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지만, 선생님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수업을 진행했다. 대통령이 죽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 집에 가서 TV를 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집에 돌아간 나는 뉴스를 보고 아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육영수 여사가 암살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와 함께 TV를 본 기억이 났다. 그때 나는 왜 대통령의 부인이 죽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떤 존재였던가. 초등학교 내내 박정희 대통령이 일으킨 새마을 운동에 대해 귀에 못이 닳도록 들었다. 매년 수출이 늘어 우리나라의 경제가 점점 발전하는 것은 모두 대통령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날카로운 눈빛과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대통령의 얼굴과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초등학생인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우상까지는 아니었지만, 절대적인 존경과 권위의 대상이었다. 그런 대통령을 욕하고 다니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대통령이 잘 죽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며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한편으로 그렇게 미워하던 대통령이 죽었으니 이제 아버지가 술을 마실 이유가 사라진 것일까 그런 기대가 생기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집에서는 슬픈 기색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왠지 눈물이 나고 마음이 허전한 듯도 했다. 며칠 동안 아무런 대화나 놀이에도 끼지 못했다. 아이들은 벌써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했다.

  대통령이 죽었다고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며칠 울적했던 기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다.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린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겨울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1980년이 되어 나는 영등포 여자중학교로 진학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들이 들렸지만 나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바뀌었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었다.

  중학교에 전교 2등으로 입학한 나는 1등으로 입학한 아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별다른 라이벌 의식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늘 전교 석차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나는 일등을 차지했고 일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만 전념했다. 점점 내 꿈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섬으로 떠난 아버지     


  우리가 새로 이사한 집은 그 전 집만 못했다. 아버지가 일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안 형편이 더 나빠진 것이다. 그 집에는 변변한 마당도 없었다. 대문을 열면 오른쪽으로 돌아 주인집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나왔다. 그 주인집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었다. 왼쪽으로 돌면 우리가 세를 사는 공간이 나왔다. 미닫이문을 열면 곧바로 커다란 부엌이 있었다. 석회와 시멘트로 엉성하게 발라놓아 만든 부엌이었는데 집 전체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사용하던 아궁이 대신 연탄을 넣어 불을 때는 부엌이었다. 부엌 한쪽으로는 계단을 올라가 마루를 대신해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엌 오른쪽으로 난 통로를 통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다시 단칸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래도 방이 보통 크기 방 두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 컸다. 우리 식구 다섯 명이 지내기에 그리 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조금 가난해졌다는 걸 실감했다. 집안은 낮에도 컴컴했고 환기가 되지 않아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집안에서는 늘 연탄이나 뭔가 썩는 듯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리 살림꾼인 어머니로서도 어쩔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있었기에 집안 경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취직되었다고 말했다. 전라남도에 신안군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러 섬으로 된 군이라고 했다. 거기에 장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 있는 중학교 영어 교사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면 그 먼 섬에 있는 학교의 정보를 알아낸 것일까. 나는 사회과 부도를 펴서 우리나라 지도를 살펴보았다. 정말 신안군이 있었고 장산도라는 섬이 있었다. 평택과 서울 외에 가 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그곳이 너무나 멀고 먼 곳으로 느껴졌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위해 그 먼 섬에 가서 일한다니 아버지가 조금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먹지 않는 아버지와 지내는 것은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좀 아쉬웠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곳에서 한 일, 이년만 근무하면 더 조건이 좋은 육지로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곧 섬으로 떠났다. 이제 아버지가 돈을 버니 생활이 좋아질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버지가 집에 없어도 별로 허전하지 않았다. 어머니만 있으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의 기억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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