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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9.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9화  2장. 소녀 가장. 꿈에 그리던 서울 생활

꿈에 그리던 서울 생활     


  영등포구 신길동. 우리 가족이 서울에 처음 터를 잡고 살게 된 동네였다. 동네의 경계에는 높고 흰 벽돌 담벼락이 마치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듯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담벼락 너머로 매일 기차가 내는 소음이 들렸다. 담벼락 앞에 길게 난 길에서 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그 길 안쪽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산동네는 아니었지만 80년대 가난했던 전형적인 서울 동네였다. 골목길은 시골 동네의 골목보다 더 좁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작은 집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기찻길에서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제법 큰 길이 나왔다. 그 큰 길가에 외삼촌네 집이 있었다.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외삼촌네 집에서 나는 한 달 정도 함께 지냈다. 내가 좋아하던 외사촌 동생과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나는 나의 유년기를 다 보낸 시골, 그 산과 들판, 개천, 그리고 친구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서울 생활의 황홀함에 빠져들었다.

  한 달 후 가족이 이사했다. 외삼촌네 집에서 다시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우리 집이 나왔다. 시골에서는 제법 넓은 마당을 가진 집에서 살았지만 서울에서는 남의 집에 세를 내어 살아야 했다. 주인집은 중앙에 있는 마루와 방 두 칸을 쓰고 우리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왼쪽, 오른쪽에 있는 방 두 칸을 나누어 썼다. 더 큰 왼쪽 방에 부엌이 붙어있어서 그곳이 안방이 되었다. 남자 동생들만 있고 이제 더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는 처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나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전학한 학교에서는 처음에 나를 시골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내 짝이 된 남자아이는 산수 시간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배울 때 내게 물었다.

“너 이런 거 알아? 양수, 음수라고 부르지 않고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하는 거야. 시골 학교에서는 그런 거 안 가르치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도 다 배웠어.”

그때 나는 첫 번째 시험을 기다렸다. 그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첫 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6학년에서 일등을 했다. 나도 깜짝 놀랄 결과였다.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고 죽어라 공부했지만, 학년 일등일 줄이야. 시골 학교에서도 늘 학년 2등이었는데.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모두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공부를 잘하던 반 아이들은 바짝 긴장하는 투였다. 짝이었던 아이는 그때부터 공부에 관한 한 내 앞에서 잠잠해졌다. 공부 잘하는 여자아이들은 내게 함께 시험공부를 해서 잘난 척하는 남자아이들을 이기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그 청에 응했고 우리는 매번 시험 때마다 집에서 모여 함께 공부했다. 나는 한번 잡은 일등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매번 분해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일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내 얼굴을 구경하려고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을 기웃거렸다.

“쟤야, 저기.”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누구냐고 묻는 다른 반 아이들에게 나를 가리켰다. 그 모든 관심을 의식하면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책을 보고 있었다. 우쭐대거나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나의 외모에 관심을 보일까 봐 얼굴을 더 깊이 숙였다. 시골 아이라서 새까맣다는 말을 듣기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깜씨’라는 별명으로 나를 놀리던 아이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학년이 끝나갈 무렵 선생님이 아버지를 호출했다. 하필 그때 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시골에서는 아버지가 학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혹시나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술을 먹고 올까 봐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약을 먹고 있던 아버지는 그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황토색 점퍼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조그만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마음졸였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 “우리 선화가 졸업식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더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걸 알려주려고 아버지를 불렀다는 게 이상했지만, 나는 승리했다는 묘한 쾌감을 맛보았다. 서울 아이들을 이겼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도 서울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대의 목표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거의 매달 상을 받았다. 운동장에 모여선 수백 명의 전교생 앞에서 이름을 호명받으면 혼자 걸어 나가 단상에 올라갔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뒤돌아 고개 숙여 인사하면 전교생의 박수 소리가 귀에 들렸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나에 대한 뿌듯함으로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 비록 그 느낌이 하루 만에 사라졌을지라도 매달 맛보는 그 쾌감에 나는 중독되었다. 어머니의 기쁨과 자랑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그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느껴졌다. 일등이 아니면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점검받지도 않은 채 내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혔다. 성인이 되어 그 왜곡된 가치관이 두고두고 나를 갉아먹고 괴롭히리라는 걸 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지독히도 알뜰했던 어머니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백수가 되었다.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지만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 그 평화로운 생활이 나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오랫동안 편물 일을 했다. 시골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 집은 그리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시골에 논도 사고 산도 조금 사 두었다. 커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재테크에 대한 감각이 있었던 분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훌륭한 요리 솜씨도, 타고난 재테크 감각도, 알뜰한 경제관념도 모두 물려받지를 못했다.

  어머니의 알뜰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 푼도 허투루 돈을 쓰는 법이 없는 분이었지만, 서울에 와서 모든 수입이 끊어졌을 때 어머니의 생활력은 빛을 발했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일 년 정도 어머니는 한 달에 단 육만 원으로 다섯 식구의 생활을 감당해냈다. 주위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당시 물가가 아무리 쌌다고 하더라도 다섯 명이 육만 원으로 서울살이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시쳇말로 ‘똑순이’라고 불리던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니에 비한다면 나는 영 생활면에서는 그다지 똑소리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생활비를 극도로 아꼈어도 나는 우리 집이 그다지 궁핍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밥을 굶지도 반찬이 한 가지로 줄어드는 일도 없었다.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도 다 살 수 있었다. 물론 새 옷을 산다든가 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더 돈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는다. 돈이 부족해도 다 살 구멍이 있다는 신념을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같다. 돈이 없어도 집안이 조용하고 평안하니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전혀 새로운 생활로 접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행복했던 그 시간은 너무나 짧게 끝나버렸다. 그것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곧 그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벌써 가슴이 아려온다.

  어머니의 가출 이야기를 쓰다가 나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도서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남편이 내 글을 읽어주고 그도 울고 위로해줘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내 이야기의 가장 슬픈 부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무사히 넘어가야 이 글을 마칠 수 있을 텐데 하는 염려가 앞서는 건 슬픈 회고록을 쓰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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