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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Apr 18. 2023

나는 코아였다. 1장 괴물 아버지

8화 서울에 가고 싶어

서울에 가고 싶어  

   

  비둘기호 기차가 영등포역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 기차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았던 사람들, 문 옆 좁은 공간에 내내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열린 기차 문 사이로 빠져나왔다. 장관이다. 이렇게 많은 인파를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역사 건물로 들어갔다. 역사 내부는 학교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과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척 봐도 표가 났다. 얼굴이 거무데데하고 시골티가 잔뜩 묻은 여인네들은 머리 위에 보자기를 이기도 하고 손에 짐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을 맞이하는 서울 사람들은 얼굴이 하나같이 하얗게 보였다. 서울의 해는 시골보다 더 뜨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이구, 오랜만이여!”

  “잘 오셨습니까? 무슨 짐이 이리도 많아요?”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말이 들려 왔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선화야!”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 사람처럼 얼굴이 검은 외삼촌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 엄마 얼굴은 하얀데 삼촌 얼굴은 왜 저렇게 검을까? 나는 삼촌을 더 닮았나?’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쑥스러워 고개만 꾸벅하고 삼촌을 따라 역사 문을 나섰다.

  우와! 언제나 영등포역을 나설 때면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역사 안도 그랬지만 역 광장이 이렇게 탁 트이고 넓을 수가! 내 가슴은 흥분으로 터질 것 같았다. ‘서울이야, 서울!’ 서울의 공기는 시골과 전혀 달랐다. 폐 가득히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는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했다. 나는 한달음에 약간 경사진 광장을 가로질러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내달렸다.

  서울은 내게 동경의 장소였다. 내가 본 서울이라야 고작 영등포 일대가 전부였지만, 내게 서울은 모든 게 신기하고 흥분을 일으키는 도시였다. 방학 때마다 서울에 갈 때면 ‘나도 서울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직장이 평택에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이사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6학년 여름 방학에 외사촌 여동생이 시골 우리 집을 다녀간 후 나는 마음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애와 지낸 시간이 꿈만 같고 그 꿈에서 깨어난 나는 도저히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매일 그 아이가 생각났다.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것도, 혼자 산으로 밭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 아이를 그리워하며 허전한 가슴을 달랠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 속내를 감추고 끙끙거리던 나는 마침내 엄청난 방법을 생각해냈다.

“엄마, 나 서울 가서 공부하고 싶어.”

“서울? 갑자기 왜 서울은?”

“서울 가서 공부해야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공부하면 서울대 못 갈지도 모르잖아.”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역정을 내시며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야단을 칠 줄 알았다. 그래도 끝까지 졸라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내 얘기를 듣기만 했다. 그날부터 나는 엄마를 졸졸 쫓아다니며 서울 노래를 불렀다. 내가 무엇인가 그렇게 집요하게 졸라본 것은 실로폰을 사 달라고 조른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혼을 내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놀라운 말을 했다.

“우리 서울로 이사 가자.”

“엄마, 정말?”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어머니의 말은 실언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후 일사천리로 서울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내 공부도 공부지만, 아버지의 알콜 중독을 고치려면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로 이사 가는 게 좋겠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시골 사람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아버지가 술 마실 기회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또 시골 사람들은 술에 대해 관대해서 아버지가 창피함을 몰라 더 술을 마신다고 했다.

  어머니는 서울 외삼촌과 의논을 한 것 같았다. 이사 갈 곳이 바로 내가 그렇게 꿈꾸던 영등포 외사촌들이 사는 동네였다. 외삼촌 가까이 살면 어머니가 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외삼촌이 어머니를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날아갈 듯이 행복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이 이루어졌으니. 내가 서울에 가서 살고 공부할 수 있다니. 그리도 좋아하는 외사촌 동생과 같은 동네에 살고 싶어서 졸랐다는 것은 끝까지 비밀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당시 아버지는 교사로 18년 근무했었기에 이 년만 더 지나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두고두고 아까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시 교사로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아버지가 알콜 중독을 끊어버리게 하겠다는 어머니의 결심이 컸던 것 같다. 시골집도 팔아야 하고 정리할 것이 많았다. 나는 당장 서울로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중학교에 가기 전에 가야 진학이 수월하다는 이유였다. 속마음은 어서 외사촌 동생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머니는 6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자마자 나를 먼저 영등포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켰다. 때는 1979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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