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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02.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12화. 2장. 소녀가장. 끝나지 않는 애도

끝나지 않는 애도    

 

  빗길에 차도를 건너는 어머니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낸 뺑소니 운전사는 곧 잡혔다. 아버지는 육백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합의를 해줬다. 운전사가 고의로 사고를 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장례식 동안 나는 곧 있을 기말고사를 걱정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시험 걱정을 할 수 있는지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고 부끄러웠다. 담임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조문을 왔다. 나는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그게 신경 쓰였다. 아주 슬프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무덤덤한 표정에서 누구도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마치 연극을 하듯이 내가 맡은 역할을 행했다.

  장례식이 이어지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에 어머니가 사 두었던 선산이 있었다. 그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 앞에 어머니의 묘를 쓴다고 했다. 그곳에 도착한 날은 11월이었는데도 날씨가 맑고 청명했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다. 몇 명의 아저씨들이 삽으로 땅을 깊게 팠다. 땅을 파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나와 동생들, 친척 동생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기다렸다. 땅을 다 파고 관을 구덩이에 내렸다. 구덩이가 땅에 닿자 아버지부터 흙을 한 삽 퍼서 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든 뺨을 타고 줄줄 흐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내 눈은 바싹 말라 있었다.

“너도 흙을 퍼서 넣어라.”

나는 아이도 이런 것을 해야 하나 속으로 생각하면서 삽이 무거워 흙을 조금 담아서 구덩이 속에 던졌다. 이것이 어머니를 보내는 마지막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서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마치 마음은 주인이 떠난 텅 빈 집 같았다. 흙을 다 덮고 봉분을 만들 동안에도 나는 어서 이 과정이 다 끝나기만을 바랐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휴 지독한 년 같으니. 어쩜 눈물 한 방울을 안 흘리냐.”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아닌데...그래서가 아닌데.’ 지금 저 땅속에 묻힌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사람인데, 나도 왜 눈물이 나지 않는지 몰라 답답한데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이 야속했다. 좋은 엄마가 아니라서 내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할까 봐 화가 났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울지 않는 딸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어머니는 서른여섯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갔다. 나는 하나님이 왜 어머니를 그렇게 이른 나이에 데려가셨는지 묻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이제 쉬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 더 살아봐야 아버지 때문에 계속 힘들 테니까 이른 나이에 불러주신 거라고. 고생만 죽도록 하다 떠나간 어머니의 고된 삶을 달리 해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해 시한부 종말론이 떠돌고 있었다. 장례식 후 우리 집에 심방을 온 목사님인지 전도사님이 삼 년 후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했다.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엌 쪽에 앉아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어버렸다. ‘그럼 삼 년 후에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겠구나.’ 그러니 그리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마음속은 세찬 바람이 불어 한기로 가득했지만, 나의 이성은 구명튜브라도 되는 양 그 허황한 말을 꽉 붙잡았다.

   내가 어머니의 상실을 슬퍼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 무의식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동안 슬픔을 차단했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압도되어 내 의식이 해리되거나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 강력한 방어기제가 작동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현실로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부모를 잃을 때 울 수가 없다. 무서워서 울 수는 있어도 슬퍼서 울 수는 없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부모를 잃고 아이가 우는 장면을 볼 때 그 연출은 가짜라고 생각한다. 실제 상황에서 아이는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을 처리할 어떠한 방법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슬픔을 꿀꺽 삼켜버린다. 그리고 소화되지 못한 슬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끝나지 않는 애도를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애도는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참 많이도 울었다. 늦게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한번 터지면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울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 곁에서 울었다. 이제 끝났나 싶으면 또다시 애도가 반복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를 잃은 후 나는 상실에 취약한 사람이 되었다. 친밀하던 관계가 끝나버리든, 익숙했던 장소를 떠나게 되든, 학교를 졸업하게 되든, 어떤 목표를 이루든 뭔가를 상실하면 나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힘들어했다.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 익숙해지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은 매번 고통스러운 수술을 하는 것 같았다. 지독한 외로움과 우울감에 시달렸고, 마음을 어디에 붙들어 매야 할지 몰라 정처 없이 방황했다. 울고 그리워하고 댈만한 기슭을 찾는 조각배처럼 헤맸다. 오랫동안 그 이유를 몰랐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해서, 새로운 상실을 마주할 때마다 이전의 아픔이 재활성화되는 것임을, 나이가 들어서야 정신적으로 심하게 아픈 후에야 알았다.

  어머니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났다. 집에 왔는데 놀랍게도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모습 그대로, 인자한 웃음을 띠고 밥을 짓고 있다. 압력밥솥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엄마, 진짜 온 거야?”라고 묻는다. 어머니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엄마, 다시 가지 않는 거지?” 역시 대답이 없다. 나는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어머니는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꿈이겠지? 내가 깨어나면 어머니도 사라지겠지? 그러다가 잠시 후 어머니가 정말 다시 사라져 버린다. 아무 작별 인사도 없이. 나는 예감했던 일이 일어나서 서글피 울기 시작한다. 꿈에서는 목을 놓아 울고 어머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어디 갔어? 왜 또 갔어? 갈 거면 왜 다시 왔어?” 그렇게 울다가 잠이 깨면 내 눈이 젖어있다. 꿈에서나마 어머니의 옛 모습을 본 것이 현실처럼 너무 생생하고 어머니가 다시 떠난 게 슬퍼서 나는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렇게 남편의 잠을 깨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아버지를 애도한 방식대로 풍선을 불어서 작별 인사를 쓴 카드를 매달아 날려 보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헬륨 가스는 구했는데 풍선을 구하지 못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하지?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하지만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더 이상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족시키려는 삶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삶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상실의 파도를 조금은 수월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의 딸이 아닌 나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려고 한다. 이것이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기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려 한다.

  엄마, 안녕. 엄마, 잘 가. 나 이제 엄마 없이 잘 살게요. 이제 엄마 딸 아닌 나로 살게요.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한 이십 년쯤 있다가 하늘에서 만나요. 더 빠를 수도 있고 조금 더 늦을 수도 있어요. 그때까지 안녕. 엄마를 보내도 잊지는 않을게요.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엄마를 보내 드릴게요. 안녕, 사랑하는 나의 엄마...


새엄마라고?

     

  어머니의 죽음 후 처음 든 생각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지?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버지가 그때 떠나고 어머니가 남았더라면 나와 동생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버지를 용서하고 보내드렸지만, 어머니 없이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살아야 했던 긴 세월은 지금 생각해도 내게 너무 가혹했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는 방학이 되어 서울에 남았다. 그런데 불과 한 달이 채 못되어 우리 집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중간 정도의 키에, 얼굴에는 주근깨가 퍼져 있고 삼십 대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할머니처럼 머리를 쪽지고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우리의 새엄마라고 했다. 새엄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알고 보니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큰아버지에게 새장가를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큰어머니가 아는 동네 여자를 소개해 주었고 그 여자는 우리의 새엄마가 되기로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가 끓어올랐다. “싫어, 싫단 말이야! 누구 맘대로 새엄마야?”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고 싶었지만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묵의 시위만 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어머니를 그렇게 빨리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어른들이 모두 미웠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서 지낸 건 채 며칠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내 마음은 지옥 같았다. 아버지는 그 여자를 데리고 어딘가를 돌아다녔고 방학이 끝나자 함께 섬으로 떠났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여자가 도망갔다는 말을 큰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다시 폭음을 시작한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그 여자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체증이 내려간 것같이 기분이 좋았다. ‘그럼 그렇지. 누가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같이 살 수 있겠어?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바보 같은 여자였네.’ 새엄마가 될뻔한 여자가 나타났다 사라진 사건은 별 의미도 없는 작은 에피소드로 끝나 버렸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두어 번 난데없이 어디서 여자를 데려온 적이 있었다. 한번은 이십 대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의 여자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아버지를 따라 집에 들어섰다. 그 여자는 수줍어하면서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버지는 그 여자와 아기가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살 거라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혔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여자는 우리 아버지를 따라온 것일까. 그 여자와 아기가 가엾기만 했다. 나는 아버지 모르게 그 여자를 마당으로 불러냈다. 여자는 고분고분 나를 따라 나왔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따라온 거예요?”

나는 조목조목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여자의 얼굴은 점점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변해갔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여자는 조용히 짐을 챙겨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집을 떠났다. 나는 그렇게 골치 아픈 문제를 잘 해결한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한심스러워 깊은 한숨이 나왔다.

  중독이 재발하자 아버지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이유 없이 체벌하기도 하고 결근을 밥 먹듯 하기도 했다. 섬에서 큰아버지에게 전화가 와서 아버지를 데려가라고 했다. 큰아버지는 섬으로 내려가 아버지 대신 사직서를 쓰고 아버지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알았다. 18년 동안 아버지가 교사로 해직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살핀 덕분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사라지자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기능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말 그대로 아버지는 내 눈앞에서 폐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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