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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06.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13화. 2장 소녀가장. 엄마를 대신한 사촌언니들

엄마를 대신한 사촌 언니들    

 

  아버지가 섬으로 떠났을 때 우리 집에 사촌 언니가 왔다. 나보다 불과 여섯 살 많은 아직 이십 대 초반의 언니였다. 큰아버지는 언니에게 우리 집 살림을 맡겼다. 큰아버지가 중학생 한 명과 초등학생 두 명의 조카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고민하다 결정한 결과였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사촌 언니였기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언니는 벌써 사회생활 경험도 있고 요리든 뭐든 살림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무엇보다 언니와 나는 마음이 잘 통했다. 어머니를 잃은 후 언니가 내 곁에 있었기에 완전히 버려졌다는 느낌 없이 그 시기를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신길동을 떠나 망원동으로 이사했다. 망원동이 2020년대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될 것이라고는 당시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삼 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동생과 함께 수십 년 만에 망원동을 찾아가 보았다. 차로 몇 번을 돌아도 우리가 살았던 집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대충 여기쯤이었겠구나 싶은 장소만 확인했다. 망원동에서만 네 번을 이사했는데, 첫 번째 살았던 곳은 복개천 근처에 있는 연립주택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형태의 연립주택으로 가운데 마당 비슷한 공유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둘러싸고 사방으로 사 층 짜리 주택을 지은 모양이었다. 한 연립주택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해도 오고 가며 자주 부딪히곤 했기 때문에, 몇 년 살다 보면 대략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다. 그 주택에 TV 드라마에 가정부 역으로 자주 출연하는 탤런트가 살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 사이에 화제가 되곤 했다. 

  이사한 집의 주인은 젊은 부부였고 그 부부에게는 연경이라는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다. 요즘이라면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 정도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인형같이 예쁜 아이였다. 그 아이가 하하 웃으면 온 세상이 행복으로 넘실대는 것 같았다. 연경이는 처음부터 나에게 호감을 보였고 우리는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아이는 매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우리는 늘 함께 여러 놀이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체형이 좀 통통한 편이었지만 미인이라 할 수 있었고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던 마음씨 착한 주인아주머니는 사촌 언니와 찰떡궁합이 되었다. 살짝 앞머리가 벗겨져 양옆으로만 머리칼이 많았던 주인아저씨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자주 나를 웃겨주곤 했다. 

  주인집은 큰 방을 썼고 우리는 나머지 방 두 개를 썼다. 아버지와 남동생들이 방 하나를, 언니와 내가 다른 방을 썼다. 언니와 함께 방을 쓰며 이야기를 많이 나눠서인지 나는 어머니의 부재를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고 별로 외롭지도 않았다. 이렇게 언니와 어른이 될 때까지 쭉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음식을 해주고 빨래하고, 옷을 사주고 병원에 데려가는 등 어머니가 했던 모든 일을 했다. 나에게 언니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대신한 존재였다. 어머니를 잃은 허전함이 언니의 존재로 어느 정도 채워졌다. 언니도 어린 나이였는데 어떻게 사촌 동생들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는지 너무 어렸던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었던지 언니는 일 년 만에 우리 집을 떠났다. 그리고 또 다른 사촌 언니가 대신 왔다. 먼저 왔던 언니의 언니, 그러니까 제일 큰 사촌 언니였다. 그 언니도 주인아주머니와 잘 지냈다. 그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소개해 준 형부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언니가 형부를 만나러 갈 때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젊은 남녀가 연애하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것이다. 언니가 결혼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데 괜히 내 마음이 설렜다. 나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할까. 내가 결혼하게 될 수는 있을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여자로서 나 자신에 자신감이 없었다. 나를 여자로서 좋아해 주고 결혼하기를 원할 남자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미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막연하게나마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공상하며 그는 완벽하게 나를 이해하고 나와 모든 면에서 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떠났지만 사촌 언니들과 연경이 덕분에, 그리고 소녀다운 공상 속에서 나의 중학교 시절이 흘러갔다.      


사춘기가 뭐야?     


  나에게 사춘기가 있었을까. 사춘기가 부모로부터, 특히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과 개별화를 추구하는 시기라면 나에게 사춘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로부터 독립해야 할 존재 자체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권위도 갖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가 독립을 추구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었는데, 그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내가 어머니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사망 후 나는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독립적인 청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독립성은 강요된 것이었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나는 독립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독립적이기도 하고 지나칠 정도로 의존적이기도 한, 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만을 의지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와서인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거꾸로 점점 의존적으로 되어간다. 청소년기에 의존에서 독립으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발달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들은 엄마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는 어떻게 엄마와 싸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인데, 그 권위에 도전하는 친구들이 이상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였다. 친구들이 자연스러운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차원에서도 내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그런 질문은 나의 의식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 마음에 여유 공간이 너무 적었다. 나는 매일 매일 학업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했다. 자주 다가오는 시험은 내 생각이 다른 데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었다. 오로지 공부와 미래의 목표인 대학이 내 의식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어른들에 대한 비판과 약간의 경멸적인 태도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나에게도 사춘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선생님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속물적으로 보이는 선생님들은 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돈이나 명예 등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나는 속으로 얕잡아보았다. 선생님뿐 아니라 친구들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중1 때 우리 반 반장은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바싹 마르고 키가 큰 아이였는데, 꿈이 교수라고 말했다. ‘속물이로군.’ 나는 쉽게 판단을 내리고 그 아이를 우습게 생각했다. 이상적이고 숭고한 어떤 것만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돈과 명예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적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무시와 비판의 대상도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직업을 잃고 자기 삶을 꾸려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돈을 벌지 못해도 집에서 책이라도 읽든지, 취미생활이라도 하든지, 친구들을 만나기라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동네를 떠돌아다니고 쓸데없이 사람들과 다투고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전에는 괴물로 보였던 아버지가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초라한 폐물로 보였다. 선생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활만을 할 수 있는지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고 경멸스러웠다. 겉으로는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속으로 나는 아버지에게 형리같이 가혹했다. 

  내가 사춘기를 겪었다는 뚜렷한 증거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버스에서 남자 중학생들을 보면 살짝 곁눈질도 하고 공연히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순복음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해 여름 수련회에서 같은 조가 된 한 남학생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키가 작은 편이고 머리도 작았는데 눈매가 선량하고 이목구비가 균형이 잡혀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말수가 적었다. 그 아이는 매번 식사 시간마다 묵묵히 조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겨 가지고 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자꾸 그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한번 호감이 생기자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그 아이에게 끌렸다. 수련회 내내 그 아이가 보이기만 하면 가슴이 뛰었고 보이지 않을 때는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눈으로 찾았다.

  수련회가 끝난 후에도 일요일만 되면 나는 그 아이를 볼 생각으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교회로 향했다. 당시 순복음교회에는 중학생만 삼천 명이 출석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앉는 좌석은 중앙 통로를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예배 시간 내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들 틈에서 그 아이를 찾아내려 연신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그 아이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나는 태연한 척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한 마디라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수줍고 부끄러운 마음 때문이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이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다. 내가 우습게 보일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 아이가 먼저 인사라도 해주길 간절히 소원했지만, 그 아이 역시 무심히 나를 지나칠 뿐이었다. 

  그 아이를 보지 못했거나 보았어도 관심 없는 척 지나친 날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쓸쓸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데인 듯 쓰라렸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그 아이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야, 말 걸어봐. 뭐 어때?”하며 나를 격려하고 재미있어했다. 내가 그렇게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게 친구들 눈에는 마냥 재미있게만 보였나 보다. 나는 일기에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가끔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의 첫사랑은 무려 사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대학부에 올라가자 더 이상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았고 내 첫 짝사랑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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