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2장 소녀가장. 아버지의 취직 시도
아버지의 취직 시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나이는 사십 사세였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였고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할 때였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아버지는 세상에 설 곳이 없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걸 보면 아버지는 우정을 쌓거나 인간관계를 맺는 데 서툴렀던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자 연락하는 선생님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늘 어딘가를 나다녔다. 주로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방문했는데 그 외에 어디 가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밖에 나갔던 아버지가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무슨 종이 꾸러미를 잔뜩 쥐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아빠?”
“나 이제 일할 거다.”
“무슨 일이요?”
“책 외판원.”
아버지는 방바닥에 종이를 하나씩 펼쳐 보였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던 책 외판원들이 보여주던 그런 광고지였다. 각종 전집류에 대한 광고지를 잔뜩 가지고 온 것이다.
“내일부터 팔러 다닐 거다.”
아버지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의기양양했다. 나는 아버지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책 파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 않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기대하는 마음 반, 염려되는 마음 반이었다. 그래도 일을 해보겠다고 뭔가를 시도하는 아버지가 짠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아침에 광고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부디 아버지가 한 번에 욕심내지 말고 성실하게 일을 하기를 바랐다. 잘 안되더라도 꾸준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하나도 못 팔았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다니며 생전 안 해본 외판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가여워 보였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허탕이었다. 아버지는 사흘 만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럼, 그렇지.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해? 싶기도 했지만,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매일 낙담하는 아버지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초라하고 약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몇 번의 구직 시도를 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였지만 한번은 아파트 경비 일을 한다고 했다.
“정말 취직이 됐어요?”
“그럼,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더라.”
“아빠, 할 수 있겠어요?”
“그럼, 할 수 있지.”
아버지는 자신만만했다. 이미 교사를 그만둔 지 오래여서 경비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역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성실해야 하는 일인데, 사람들을 상대하고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는 일인데 아버지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채 일주일이 못 되어 아버지는 해고되었다. 기대하지 않아서 그리 실망하지도 않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정말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무슨 일을 해보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한 해, 한 해 아버지는 말 그대로 폐인이 되어갔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아무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 그런 아버지가 점점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명절이 싫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무서운 사람으로 돌변했다. 약을 먹고 있어서 술을 마시는 횟수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명절에 친척 집을 방문할 때는 꼭 술을 마셨다. 내 고향인 어연리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묘소가 있었고 아직 외가 쪽 친척들이 여럿 살고 있었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을 데리고 어연리를 찾아갔다.
내가 서울에 첫발을 디뎠던 영등포역에서 수원까지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서 서정리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서정리 시장 근처에 있는 정류장에서 어연리에 들어가는 시골 버스를 타고 논길을 달리면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서정리 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친척 집에 선물할 과일을 사곤 했다. 친척 집에 가면 또 한바탕 소동이 나겠구나 싶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좀 가면 안 되나, 꼭 우리를 데리고 가야 하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래도 어머니 묘소에는 가 보고 싶어서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려 나지막한 산을 오르면 선산이 나왔다. 그 산도 어머니가 알뜰살뜰 아낀 돈으로 사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당신이 사둔 땅에 묻혔다. 간단히 묘소를 둘러보고는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 사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곧 있을 폭풍을 어떻게 피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이,”
아버지는 누가 그리 반겨준다고 큰 소리로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나의 오촌 외삼촌이 사는 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으로 마당에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었고, 나무로 세운 기둥과 마루, 창호지를 바른 방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마루에는 이미 친척 아저씨들이 모여 벌써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내오라고 할 판인데 아예 술판이 벌어지고 있으니 아버지가 고주망태가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친척 아저씨들이 원망스러웠다.
“어, 허 선생. 어서 와. 이리 와 앉아.”
아직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얼마나 심한 술꾼인지 다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술잔을 건네는 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신다고 해도 오히려 말려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마루 구석에 앉아 아버지가 얼마나 술을 마시는지 지켜 보았다. 말릴 수도 없으면서 지켜 보기라도 해야 뭔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가능하다면 말려보려고. 거나하게 술에 취하면 아버지는 점점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를 욕하고 자꾸만 술을 더 내오라고 했다. 이제는 아버지를 말려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은 슬슬 자리를 뜨고 결국 아버지 혼자만 남겨지기도 했다. 우리가 이미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지 나와 동생을 보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에 취하면 그날 집에 돌아가기는 다 글러버린 거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 동네 아는 사람 집을 찾아다니며 추태를 부렸다. 결국은 오촌 외삼촌이 아버지를 찾아 데리고 와 달래서 재워야 그날의 소동이 끝났다. 해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명절의 풍경이 지긋지긋했다. 명절이 다가오기만 해도 며칠 전부터 우울한 먹구름이 드리워지곤 했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 즐겁게 기억되는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망원동 수해 사건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그 냄새나고 축축한 지하에서 벗어났다. 나는 새집이 어떤지 잔뜩 기대를 걸었건만 지하를 벗어났을 뿐 그다지 형편이 나아지진 않았다. 아버지 혼자 집을 보고 계약을 해서 무척 화가 났다. 이제 나도 집을 보고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컸고 실질적인 가장은 나였으니 그럴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다. 망원동으로 들어오는 버스의 종착지에서 담벼락을 따라 죽 걸어가다 오른쪽으로 길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끝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이층집이었는데 이층에는 주인이 살고 아래층에는 세 가구가 함께 살았다. 말이 아래층이지 반지하는 아니었는데도 집 구조가 이상해서 거실이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아 컴컴했다. 말이 거실이지 연한 녹색 장판은 어찌나 지저분한지 양말을 신은 채 돌아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누구 한 사람 슬리퍼를 신지도 않았다. 거실 오른쪽 구석에 모두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은 꽤 컸지만, 청결 상태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그 옆에 내 방이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닥이 고르지 않고 밑에 돌이라도 깔린 듯 울퉁불퉁했고 한 쪽이 약간 기울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이 좋았다. 그 옆에 아버지와 동생들이 쓰는 큰 방이 있었고, 거실의 가운데 벽 쪽으로 우리 집과 옆집이 함께 사용하는 꽤 큰 부엌이 있었다. 오른쪽 공간은 우리가, 왼쪽 공간은 옆집이 사용했다. 옆집이 쓰는 방 두 개, 그리고 거실의 왼쪽 벽 쪽으로 세 번째 집이 쓰는 부엌과 방이 있었다. 총 다섯 개의 방과 두 개의 부엌이 있었으니 전체 공간은 상당히 넓었다.
세 가족은 이 년을 함께 살았지만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각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도 달라서 희한하게 서로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관심도 없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외에 아이들은 없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큰 소리를 내도 그들은 항의 한 번 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서로 무심했다. 어머니가 없이 술 마시는 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만도 한데 서울 인심이 참으로 야박했다.
그해 9월 지금도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는 망원동 수해가 발생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교회에 갔다가 교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합정동에서 망원동으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섰다. 처음 있는 일이라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사가 “지금 수해가 나서 더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리세요.”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해라니? 아무도 진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걷고 있는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통제된 구역이 나왔다. 수해가 났고 근처 초등학교에 피신처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어디 있을까. 학교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일러준 초등학교로 향했다. 가던 길에 우리 반 친구 집이 나타났다. 그 친구 집은 약간 언덕진 곳에 있어서 수해 피해를 면했다. 친구가 나를 반겼다.
“무슨 일인지 알아?”
“망원동 유수지가 터졌대. 그래서 물에 다 잠겨 버렸대.”
“내일 학교에 어떻게 가지?”
“삼 일간 학교 안 간대.”
친구가 근심스럽다는 듯, 한편 잘됐다는 듯 얘기했다. 자기 집은 안전해서 다행이라는 표정이 엿보였다. ‘너는 참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잠시 그 집에 있다가 학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