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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15.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 회고록

17화. 2장 소녀가장.  망원동 수해 사건

  대피소로 사용된 학교는 높은 지대에 있어서 피해를 면했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교실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나는 교실들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와 동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 교실에서 아버지와 동생들이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도 그곳에 가서 앉았다. 교실의 책상과 의자들은 다 치워져 벽에 쌓아 올려져 있었고, 아마도 구청에서 나눠준 듯한 모포와 담요가 어지럽게 교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가족별로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담요를 깔아 자리를 마련했다. 컵라면과 보름달 빵이 배급되었다. 그곳에 있는 삼 일간 식사는 컵라면과 보름달 빵뿐이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집에 있다가 대피하라는 말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너무 다급해서 집에서 가지고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물이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 피해 상황이 어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실 안에서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답답해져 교실 밖을 나와 운동장으로 나갔다. 밖에는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칙칙한 하늘은 무심하게도 비를 뿌려댔고 운동장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나는 친구가 빌려준 우산을 쓰고 하늘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 끝나버린 느낌, 모든 것이 사라져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싶은 막막함이 몰려들었다. 무섭고 서러웠다.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닌데도 나는 우리 가족에게만 닥친 불행같이 느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집에 물건이라야 그리 값나가는 것이 없었는데도 나는 모든 게 물에 잠겨 없어졌다면 다시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내게 세상은 이렇게 가혹하기만 한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한테 너무하신 것 아녜요?

  그때 나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걸 경험한 것 같았다. 그때부터일까. 나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늘 최악을 상상하고 각오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각오하면 오히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낙관하고 있으면 뜻하지 않은 재난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있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상상하고 어떻게 대비할지 각오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생긴다 해도 충격이 덜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도, 엄청난 수해도, 그 이후에 생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하나같이 예상치 못하고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일이 생길 걸 예측했어야 했어.’라고 생각했다. 마치 예측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예측 불가능성이란 내 안에 내재한 불안에 불쏘시개를 던져주는 것과 같았다. 나는 항상 생길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마음의 방비를 단단히 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은 나를 히스테릭한 정신상태로 몰고 갔다.

  학교에 있는 사흘 동안 나는 단단히 마음 준비를 했다. 집에 돌아가서 어떤 상황이 되어도 놀라지 않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지겨운 사흘이 지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마다 물이 들어왔다 나간 흔적으로 엉망이었다. 버려진 가구들, 살림 도구들이 길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네는 통째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형국이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방에 내 키 조금 못되게 물이 찼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나 높이 물이 들어찼었다니.’ 망연자실했다. 폐허가 된 집에서 건질 건 하나도 없었다. 아래층에서 생활할 수 없어서 이층 주인은 세입자들에게 방 하나씩을 내주었다. 소식을 듣고 사촌 언니들이 찾아왔다. 온 동네가 일주일 내내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다 들어내고 건질만한 옷가지들을 빨고 널고 법석이었다. 빨래할 게 너무 많았다. 큰아버지가 세탁기를 사 보냈다. 한 통에서 빨래하고 건져서 다른 통에서 탈수하는 방식이고 물도 수도를 연결해 계속 넣어주어야 하는 수동식 세탁기였다. 그래도 손으로 빨래하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신기해서 수해 후에 오히려 생활 형편이 나아진 착각마저 들었다.

  알고 보니 이번 수해는 국가적 재난이었다. 망원동에 있는 유수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발생한 인재였는데, 피해 규모가 너무나 컸다. 연일 뉴스에 방송이 나왔다. 다행히 비가 그치고 맑은 날씨가 지속되어 길과 집안의 물기가 말랐다. 시에서 구호품이 집마다 배급되었다. 쌀과 이불, 생활용품 등 매일 뭔가가 집에 배달됐다. 재미있었던 건 11월이 되자 북한에서 연탄을 지원했던 일이다. 우리가 북한에서 보내주는 연탄을 때고 살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그 정도로 수해의 피해가 막심했다.

  아래층 거실에는 전보다 훨씬 좋은 리놀륨이 깔렸다. 세입자들이 비용을 함께 부담했던 모양이었다. 거실이 한결 깔끔해져서 오히려 좋았다. 이제 양말을 신고 다녀도 더러운 것이 묻어나지 않았다. 방을 새로 도배하고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 다시 샀다. 옷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써온 일기장을 통째로 버려야 했던 건 가장 아깝고 애석한 일이었다. 수십 권의 공책이 물에 잠겨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내 소중한 기록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때 일기가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 쓰는 이 회고록에 얼마나 유용한 자료가 되었을지.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만 글을 써야 하는 이 갑갑함, 디테일을 살리지 못하는 무능감이 훨씬 해소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생활을 시작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일상이 돌아왔다. 그때 알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옳다는 것을. 다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말이다. 가난했던 우리 집 살림에 그다지 큰 손해가 나지도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온 동네가 초토화되어 집마다 복구가 한창일 때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피해자로서 연대감 같은 것마저 느꼈다. 잠을 잘 때면 이웃에서 고함치며 싸우는 소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다른 집도 참 힘들구나 싶은 생각에 잠을 뒤척이면서 모두가 이전의 생활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    

   

  수해를 겪고 복구를 하는 사이 아버지의 폭음이 다시 시작됐다. 병원에 입원한 뒤부터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 수개월을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삼 년 주기로 아버지의 중독 증상은 재발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 두 번째로 입원했었는데, 정확히 삼 년만인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매일 술을 마시고 난폭해지는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다시금 시작된 공포. 지겨운 밤의 술주정. 마치 악셀레이터를 밟고 운전하는 차량처럼 아버지는 폭주했다. 나는 차라리 아버지 증세가 빨리 악화되는 걸 바랐다. 증세가 약해서는 입원하기가 곤란했다. 이 정도도 못 견디나 싶어 내 마음이 떳떳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증상이 충분히 나빠져야 병원에서도 입원을 받아 들여줄 것이고 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더 마셔라, 더 마셔라.’ 하는 마음이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한 달 정도 죽을 만큼 힘들어지자 나는 큰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상태를 설명하고 입원시켜 달라고 말씀드렸다. 조카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아버지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큰아버지는 큰집 형부들을 보내 아버지를 입원시켰다. 아버지가 입원하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없었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앞으로 삼 개월은 천국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시간은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생활비만 있으면 우리 삼 남매끼리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우리 삶에서 아버지가 사라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인 아버지, 이 짐을 언제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 후 처음으로 동생과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 용인정신병원. 찾아가기도 쉽지 않은 먼 곳이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정신병원이었다. 병원은 아주 넓은 부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뽀얀 먼지가 날리는 시골길을 달려 버스를 내려보니 병원 주위로 논과 밭, 산들만 보였다. 인근에 주택이 별로 없었다. 면회를 온 사람들이 꽤 많았고 환자복 차림으로 병동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와 동생은 면회 장소로 마련된 이층으로 된 건물로 들어갔다. 이층에 의자들이 많이 놓여 있고 간단한 과자나 음료수를 파는 역대합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 면회 장소였다. 환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가족들이 싸 온 음식을 먹기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에게 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나타났다. 왜 입원을 시켰냐고 호통을 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우리가 온 것이 너무 반가워서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바짝 말랐던 몸이 그사이 체중이 좀 불어 있었다. 초췌하던 얼굴빛도 한결 밝아져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이 지낼만한지 물어보았겠지. 아버지는 괜찮다고 대답했을 거고. 그러면서도 답답하다며 빨리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테고. 아버지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자녀들 생각이 과연 아버지의 머리에 떠오르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과자와 음료수 등 먹고 싶은 것을 사 달라고 했을 것이다.

  햇살이 밝았던 날로 기억한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면회를 온 것은 우리뿐이었다. 그런 현실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우리가 마흔이 넘은 아버지의 보호자라니...우리를 만나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혼자 이런저런 말을 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와 동생은 침묵에 잠겼다. 면회 시간이 다 되었다. 아버지는 못내 아쉬워했다. “또 와라.”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병동으로 사라져갔다. 여기까지 온 김에 의사를 만나고 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도대체 왜 중독자가 된 것일까. 조울증이란 병은 도대체 어떤 병일까. 이유라도 알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의사에게 직접 물어보면 뭔가 답을 해줄 것 같았다. 그즈음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와 동생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젊은 남자 의사가 의자에 앉아 웬 학생들이 들어오지 싶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허 성운 씨 자녀분들이세요?”

“네.”

“그래, 뭐가 궁금하세요?”

“저기...아버지가 왜 아프신 건지 알고 싶어서요...”

뭐라고 질문을 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다. 의사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아버지 병의 원인을 본인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더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뭘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서둘러 진료실을 빠져나왔던 것 같다. 의사조차 잘 모르는 병이라는 것도, 아버지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버지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의 병은 치료할 수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결론도. 세상은 차갑고 냉혹한 곳이라는 내 믿음은 그날 또 하나의 증거를 얻었다. 믿을 것은 내가 가진 능력뿐이었다. 나는 아직 내게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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