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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17.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18화. 2장 소녀가장. 수혜자가 되기 싫어

수혜자가 되기 싫어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80년대 살림살이들이 더 고만고만했다. 가끔 잘사는 친구들 집에 가면 이렇게 사는 집도 있구나 놀라긴 했지만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다. 내가 부러운 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친구들이 아니라 술 마시지 않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달랐나 보다.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버지는 실직 상태라 그랬을 거다. 가끔 동사무소에서 나를 오라고 했다. 가면 쌀을 주기도 하고 생활은 어떤지 묻기도 했다. 나보고 어떻게 그 쌀을 들고 가라는 것인지 몰랐다. 어머니가 사두신 논이 있어서 해마다 시골에서 쌀을 받아먹고 있었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나 주지 싶었다.

  학기 초가 되면 나는 늘 동네에 있는 중고 서점에 들렀다. 새 참고서를 과목별로 사기에는 너무 비쌌다. 들여다보지도 않은 참고서가 많은데 굳이 새 참고서를 살 이유도 없었다. 일 년 정도 지난 참고서는 훨씬 가격이 쌌다. 나는 가난해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낭비를 할 필요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국어, 수학, 영어 선생님들이 가끔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가면 새 문제집을 주곤 했다. 해마다 그렇게 받은 문제집이 많아 공부하는 데 전혀 부족한 게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시에서 주는 장학금 수혜자가 되었다.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서울시 교육청에 가서 장학금을 받아왔다. 내가 다녔던 홍대부여고에서 교육청이 있는 서대문까지는 버스로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고려 병원이 나왔다. 지금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자리였다. 조금 더 가면 교육청 건물이 나타났는데 매번 같은 사무실에 찾아가 봉투에 든 장학금을 받았다.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매번 이 돈 없어도 괜찮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오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분명 나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을 텐데 공부를 잘한다고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는 게 영 떳떳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불편했다. 정작 필요한 도움은 다른 데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어머니 없이 살림하며 동생들과 사는 게 힘들지는 않은지, 외롭지는 않은지 물어봐 주는 사람을 훨씬 더 필요로 했다. 학교에서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위에서는 아버지를 재혼도 하지 않고 자녀를 돌보는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가까운 이웃들만이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결정해야 했기에 나는 지나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싫었지만 정서적 도움이 절실했기에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때의 소망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보다 내가 돕고 싶은 건 나와 같은 코아들이다. 사십 년이 지났어도 이 시대 코아들은 넘쳐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디서 그들을 만나고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이 회고록이 그들과의 만남에 다리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의 영광     


  고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자 시작되었던 학업 성취의 동기는 철저히 내면화되어 나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책과 노트를 붙들고 있는 나를 친구들은 괴물이라고 불렀다. 공부는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였다. 가정에서 주어지는 안정과 행복의 결핍을 보상할 수 있는 칭찬과 인정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친척들과 선생님들, 친구들은 내가 성인이 되어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 대단한 사람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유명한 사람이 되든지, 큰 업적을 이룰 것이라 기대하는 듯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아랑곳하지 않는 척했지만, 사실은 그 기대가 내 안에 자리 잡아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정도의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되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학년을 올라갈수록 나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전교 1등을 넘어서 모의고사에서 서울 십 위권 안에 드는 성적을 올리자 선생님들은 서울대 정도가 아니라 전국 문과 여자 수석까지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그 정도까지 높은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학력고사를 망칠 수도 있었기에 끝까지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은 없었다. 그러나 학력고사가 다가올수록 나의 꿈이 현실이 될 그날이 곧 도래한다는 설렘, 낙관적인 느낌이 찾아왔다.

  문과에서 나와 일 이등을 다투던 라이벌이 있었다. 나는 모의고사 성적이 늘 고른 편이었고 그 친구는 다소 들쑥날쑥한 편이었다. 그런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서 치른 첫 모의고사에서 그 친구가 모의고사 300점을 넘어버렸다. 그 점수는 학력고사에서 마의 320점을 돌파하는 점수였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300점을 넘지 못했다. 일등을 빼앗겼다는 사실보다 내가 넘을 수 없는 점수를 그 친구가 넘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 친구가 방학 동안 몰래 과외수업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철저히 과외를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암암리에 과외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도 반 아이 엄마의 부탁으로 일 년 동안 과외수업을 해준 적이 있었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소문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과외수업을 받았더라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집안 형편의 차이가 점수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탓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속상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다가 이화여고에 다니던 중학교 친구 기숙이에게 엽서를 써서 내 마음을 표현했다. 기숙이도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나에게 용기를 주며 너는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하고 위로했다. 기숙이의 위로와 격려로 나는 다시 마음을 잡고 마지막 결승선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다음 모의고사 때 나는 다시 그 친구를 이겼고 그 친구가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또 한 번 300점을 넘었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학력고사에서는 내가 훨씬 높은 점수를 얻었다.

  주위의 주목과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영광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는 더 이상 큰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더 나는 남들이 보기에 평범한 사람이 되어갔다.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학업적 성취가 곧 나인 줄 알았던 오랜 경험 때문에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학창 시절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했으며 그것을 다시 경험하기를 원했다. 평범한 나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동창생들을 만나기 싫어한다. 그들은 과거의 나만 알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와 가깝고, 그 시절의 나는 보상심리와 야망, 기대가 빚어낸 거짓된 나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거짓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여전히 인정과 갈채를 갈구하는 내 안의 열일곱, 열여덟 소녀를 본다. 그 소녀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매우 불편해진 지 오래다. 이제는 그때의 나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싶다.

  안녕! 지독히도 공부에 매달렸던 너, 참 수고했어. 네가 자랑스러워. 하지만 그때의 영광으로 충분하지 않니? 이제는 너와 헤어지고 싶구나. 난 이제 네가 아주 낯설거든. 내가 남은 나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도록 네가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좋겠구나. 잘 가거라, 내 학창 시절의 장했던 소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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