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1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꿈의 좌절
꿈의 좌절
다음날 내 점수는 벌써 학교에 소문이 나 있었다. 수석까지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대 매우 높은 점수가 나왔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흥분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과를 지원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대 가기에 충분히 여유 있는 점수를 받아서일까. 그렇게 염원하던 서울대학교도 내게는 왠지 부족한 것 같았다. 갑자기 모든 게 시시해지고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더 높은 목표가 필요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삶이 내게 철퇴를 내린 것일까. 살면서 나의 콧대가 높았던 때가 있다면 아마 그때였을 텐데, 삶은 내가 높은 콧대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선화야, 교장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 나를 부른 담임 선생님은 이 말만 하고 나를 교장실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의 표정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교장실에 들어간 나는 처음으로 교장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교장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 마음속에 무슨 감정이 일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곧바로 나는 교장 선생님과 함께 밖으로 나와 홍익대학교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홍익대학교의 부속 여고였는데, 대학 캠퍼스 바로 아래에 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의 넓은 운동장 위로 나 있는 길을 빙 둘러 내려가면 바로 고등학교가 나왔다. 대학에서 가장 높은 본부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장 선생님과 내가 들어간 곳은 대학 총장실이었다.
나는 얼떨떨했다. 얼굴의 절반이 이마인 듯 반들거리는 얼굴을 하고 선량하게 눈웃음을 짓는 총장이라는 사람은 살면서 내가 가까이서 본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대학에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학비 면제는 물론 4년 동안 매달 수십만 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졸업 후 유학을 보내줄 것이며, 돌아오면 대학의 교수 요원으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었지만, 직접 총장이 해주는 그 말들이 내게는 꿈결에서 들려오는 비현실적인 소리로만 들렸다. ‘아니, 나는 이 대학에 가려고 그렇게 죽도록 공부한 게 아니야.’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왜 갑자기 나에게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긴 거지?
“집에 가서 부모님과 잘 상의해보고 결정하세요.”
총장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적을 냈다며 훌륭한 학생이라고 나를 치켜세웠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던지 나는 총장실을 나와 다시 이사장실로 안내되었다. 쭈글쭈글하고 마른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할머니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아, 이 학생이로군요.”
이사장 할머니는 별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칭찬하고 총장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불편했던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제야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바로 “홍익대학교 가라.”고 말했다. 돈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동생들에게 그 말을 하자 누나가 왜 거기를 가냐며 말렸다. 그날 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갑자기 내 앞에 떨어진 너무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나는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 날이 바로 홍익대학교 원서 마감일이었기 때문에, 하루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서울대 원서 마감일은 며칠 더 남아 있었다. 며칠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왜 그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망설였던가.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막연히 꿈꿨던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서울대보다 더 높은 목표가 필요해진 나에게 그 유혹은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그러나 그 꿈을 붙잡자니 6학년 때부터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향해 달려온 서울대학교를 포기해야만 하는 게 너무나 쓰라렸다. 내 앞에 이런 어려운 선택을 가져다준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대문에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화야, 가자.”
큰아버지 목소리였다. 전날 큰아버지께 전화로 상의를 드렸는데 새벽에 달려오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버지는 의논 상대가 될 수 없던 나에게 큰아버지는 가장 믿을만한 어른이었다. 나에게 큰 기대를 거셨던 큰아버지셨기에 그래도 나는 큰아버지가 내 꿈을 지켜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은 내 손을 붙잡고 홍익대로 향하셨다. 번개와 같이 빠른 속도로 교장 선생님, 총장과의 만남이 이어지고 나는 홍대 입학 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나는 큰아버지에게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저는 서울대학교에 가고 싶어요.”
그 말 한마디를 왜 하지 못했을까. 큰아버지도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묻지 않으셨다. 나는 이게 하늘의 뜻인가 보다 싶었다. 내가 결정을 못하니 큰아버지가 나 대신 결정을 해주나 보다. 그런데 원서를 쓰고 접수처에 제출하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몇 걸음만 돌아가서 다시 원서를 되돌려달라고 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나 전날부터 만났던 교장 선생님과 대학 총장, 이사장, 그리고 상기된 모습으로 달려온 큰아버지의 얼굴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얼굴이 내 심장을 압박했다. 나는 도저히 그들을 향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내 성격이 그랬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고작 스무 살, 경험 없고 분별없는 어린 나이를 탓해야 할까.
큰아버지는 내가 홍대에 가면 최소한 4년 동안 조카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맡아둔 돈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홍대에 가면 나에 대해 걸었던 기대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큰아버지에게는 당장 생활이 더 급하게 다가왔었던 거다.
입학 원서를 내자마자 내 이름이 매스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방송국의 기자가 찾아와 우리 집에서 내가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 부끄러운 장면은 TV 아침 뉴스에 방영되었다. 신문사, 당시 꽤 유명했던 여학생 잡지, 그리고 <샘터> 기자도 나를 찾아와 인터뷰했다. 소설가 한수산 씨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 한 시간 정도 방송을 하기도 했다. 내 꿈을 물은 한수산 씨는 웃으며 나처럼 공부를 잘했던 작가는 없다고 말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허영심이 강했던 나는 내 이름이 언젠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꿈꿔왔었다. 그러나 그런 식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매스컴이 나에 대해 떠들어대도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창피하고 비참했다. 내가 원했던 찬사가 아니었고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나는 쓰라린 후회와 분노로 음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서울대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아 일부러 뉴스를 듣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았다. 홍대는 나를 스카우트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덕분에 몇 년 동안 비슷한 조건으로 장학생들이 줄줄이 입학했다. 그들 중에는 나보다 더 높은 학력고사 점수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홍대 입학은 인생의 초반에 나의 삶을 바꿔버린 예기치 않은 두 가지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의미를 나는 수십 년 동안 반추해왔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는 지금까지도 잘 풀리지 않는다. 잘못된 결정임에는 분명했지만, 누가 혹은 무엇이 내 삶의 방향을 틀어버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