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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22.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0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학력고사

학력고사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정 건영이라는 분이었다. 국어 담당이었고 등단한 소설가였다. ‘골패’라는 단편소설로 유명해져서 당시 TV문학관에서 그 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하기도 했다. 하이틴 스타였던 조 용원이 성숙한 연기로 주목을 얻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선화야, 무슨 과를 쓸 생각이니?”

선생님은 내가 서울대를 가리라는 건 기정사실로 여기는 듯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영문과를 생각하고 있어요.”

“영문과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뭐야?”

“나중에 소설을 쓰는 데 문학을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소설가인 선생님이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한 말은 뜻밖이었다.

“선화야, 법대에 가라. 넌 충분히 갈 수 있어. 법대에 가도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중학교 때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여자 미술 선생님이 한번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 선생님은 나에게 의대에 가라고 했다. 의사가 되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나는 이과보다는 문과가 맞았고 피를 보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런 내가 무슨 수로 의대에 가서 인체를 해부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미술 선생님의 조언을 고맙게 생각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건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속으로 답했다.

  학력고사를 목전에 둔 시점에 담임 선생님은 내게 법대에 가라고 했다. 공부를 잘하면 의대나 법대를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못내 아쉬워하면서 나를 설득하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법을 공부하는 건 지겹고 따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흥미를 갖고 할 수 있는 공부를 원했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내게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한 사람은 그 두 선생님이 전부였다. 지금이야 그분들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알고도 남는다. 나도 인생을 꽤 살아보았으니까.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당시 나는 현실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오로지 서울대가 목표였지 구체적인 과를 정해놓은 적이 없었다. 대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를 선택해서 진로를 잡아야 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조언대로 법대에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우리 가정 형편에 내가 사법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았더라면 아마 진로 선택을 다르게 했으리라. 내가 외향적인 사람이고 사회적인 활동에서 만족감을 추구하며 판단과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인생의 그 중대한 갈림길에서 나를 잘 몰랐다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마침내 학력고사가 다가왔다. 전날 미리 학력고사를 치르는 학교에 갔다가 나는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공부했던 교과서를 책상 위에 쌓아놓았더니 열여섯 권의 책이 높이도 쌓였다. 삼 년 동안의 땀이 고스란히 서린 책들. 내 손때가 묻은 페이지들. 이제 내일이면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될 터였다. 그날 나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그런데 저녁 시간이 되자 은근히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내일이 그 중요한 학력고사인데 아무도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3 일 년 동안 두 살 어린 남동생이 내 도시락을 싸줬다. 그것이 익숙해졌을까. 동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동생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컴컴한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드러누워 속상한 감정을 달래고 있었다. 저녁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그날만큼은 내 손으로 밥을 차려 먹고 싶지 않았다. 서럽고 슬픈 마음이 복받쳤다. 고작 고1에 불과한 남동생이 나에게 마음을 써 주길 바라는 게 서글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는데 누군가 거실을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연 사람은 사촌 언니였다.

“뭐 하니, 내일 시험인데? 불도 꺼놓고.”

“언니...”

  언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학력고사 본다고 언니가 나를 챙겨주러 왔다는 게 너무나 고마웠다. 언니는 소고기를 사 왔다. 곧 부엌에 들어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기분이 금세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신이 났다. 벌떡 일어나 책가방을 챙기고 언니가 차려준 저녁 식사를 맛나게 먹었다. 이제 시험을 치르러 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와 주었던 언니들, 형부들...그 고마움을 아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 혼자 힘으로만 살아온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그렇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찍 고사장에 도착했다. 후배들이 학교 입구에서 “선배님들, 파이팅!”하며 응원을 보냈다. 그 전해에는 나도 그렇게 선배들을 응원했다. 이제 내가 주인공. 나는 준비해 간 우황청심환을 먹고 교실에 들어갔다. 내 자리는 중간 창가 쪽이었다. 바로 옆에 라디에이터가 있었다. 12월 학력고사 날은 이상하게도 매년 맹추위가 덮쳤다. 그해도 꽤 추워서 교실 라디에이터가 교실을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항상 시험 전에는 긴장했지만, 시험이 시작되면 늘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게 시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장 걱정했던 수학 시험은 예상외로 쉬웠다. 좋은 징조였다. 수학 점수에 따라 전체 점수가 오락가락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3교시 시험이 시작되자 라디에이터 열기에 살짝 졸음이 왔다. 그래도 이제 절반이 끝났고 수학을 잘 치렀다는 생각에 편안한 마음으로 나머지 시험을 다 치렀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지를 제출했다. 끝이다.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과목마다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서 다 골고루 틀린 문제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00점은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서울대에 간다. 모든 게 끝났다는 믿기 어려운 후련함과 가벼운 마음으로 가방을 챙겨 교문을 나서려니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학부모들이 보였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점수를 맞춰보고 잠이나 실컷 자야지. 그런데 바로 정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꼭 나를 기다린 건 아니겠지만 반가웠다. 선생님은 반쯤은 웃는 얼굴로, 반쯤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시험은 어땠니?”

내 대답은 엉뚱했다.

“선생님, 수석은 어려울 것 같아요...”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신 이유가 혹시 전국 문과 여자 수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기대하지 마시라고 확실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약간 실망하는 빛이 보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내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내 목표를 이루었다는 뿌듯함이 훨씬 강했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수고했다.”

“네, 선생님.”

  선생님에게 인사를 꾸벅하고 가는데 “선화야,”하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고개를 돌려보니 외삼촌이었다. 흰 이를 드러내면서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제는 언니, 오늘은 외삼촌.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친척들이 있다는 게 든든했다. “저녁 먹으러 가자.” 삼촌은 근처 고깃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자려던 나는 신이 났다. 차가운 겨울 저녁 공기가 살을 에어왔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나는 고깃집이 처음이었다. 삼촌은 맘껏 먹으라며 숯불갈비를 시켜주셨다. 그리 맛있는 고기가 있는 줄 몰랐다. 여섯 시가 되었다. 식당에서 켜 놓은 TV로 학력고사 문제 풀이가 시작되었다. “답 맞춰봐야지.” 나는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냈다. 정확하게 답을 표시한 시험지였다. 밥을 먹다 말고 한 과목, 한 과목 정답을 확인했다. “역시 이건 틀렸구나.” 틀린 문제는 거의 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제일 떨렸던 수학은 두 개밖에 틀리지 않았다. 모의고사에서도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었다. 기대감이 부풀었다. 모두 채점을 마치고 나니 314점이 나왔다.

“314점이예요, 삼촌.”

“잘한 거냐?”

“네, 저 서울대 갈 수 있어요.”

“잘했다.”

삼촌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내가 공부 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평소에 나에게 뭐가 되라거나 어떤 기대를 표현한 적이 없는 삼촌이었다. 그래서 삼촌을 대할 때는 별로 부담이 없었다. 외삼촌은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우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외삼촌이 돌아가시는 날 병문안을 갔다. 통증을 못 이겨 모르핀을 맞고 잠든 외삼촌 옆에서 외숙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 기척도 없이 홀연히 외삼촌이 떠났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외삼촌이 베풀었던 은혜를 자식도 아닌 조카인 내가 임종을 곁에서 지킨 것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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