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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May 24.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2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껍질을 깨고 나오다

껍질을 깨고 나오다  

   

  나에게 서울대는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자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이었다. 서울대 진학이 좌절되면서 나는 영영 그 보상과 답을 잃게 되었다. 그 사건이 내게 미친 영향은 거대했고 지속적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됐다. 노력의 가치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 전에 맛보았던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나를 실패자로 느낀 최초의 사건이었고 그 후 나는 다시는 성공의 맛을 보지 못했다. 지나간 영광에 속박되어 내가 이룬 성취들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그 사건은 내가 트라우마적이었다. 그러나 생애 최초의 큰 실패 덕분에 나는 정신적으로 대변동을 겪게 되었다. 여전히 성취와 인정에 중독된 삶을 살아갔지만, 그것 말고도 삶에는 훨씬 중요한 의미와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학 입학 후 첫 학기는 내 미련한 선택에 대한 후회와 자책, 원망으로 지나갔다. 겉으로는 신입생 환영회다, 엠티다 해서 나름 즐거운 대학 생활의 즐거움에도 빠져 보았으나 내적으로는 인생의 목표를 상실한 채 둥지 안에 깨어나지 않은 알처럼 삶이 정지해 버렸다. 그러나 그 알은 곧 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고등학생일 때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데미안의 신비로운 매력에 빠져서 흉내를 내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시 잡은 그 책을 통해 나는 정신적인 재탄생이라고 불러야 할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자아를 가두고 있는 껍질이다. 그 껍질을 부수고 밖으로 나올 때 새는 진정한 자아로 태어난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알을 깨고 나온 새라고 느꼈다. 최초의 명료한 자기 인식, 자아의 각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전의 삶이 알 속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짓된 환영이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기준, 사람들의 기대, 그것에 철저히 맞춰졌던 나의 야망.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삶의 주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결과가 홍익대 진학으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이제야말로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고 느꼈다. 서울대고 홍익대고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사람들의 기준과 잣대에 불과할 뿐 인생에서 진짜 가치 있는 건 참 나를 알고 그 나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세상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열렸다. 나는 비로소 날 준비가 된 새가 되었다.

  그저 감성적인 문학소녀였던 나는 『데미안』을 읽은 후 사색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전에는 어렵기만 했던 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책은 또 다른 책을 불러들였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는 나의 정신적 변화를 완성했다. 그 책에서 나는 자유라는 어마어마한 보물을 발견했다. 내가 자유롭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과거 전체를 부정하고 내 양쪽 팔에 자유의 날개가 돋아난 듯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거의 무제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유의 감각은 나의 의식을 아찔할 정도로 높이 끌어올렸다. 이런 기분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오늘 하루 일상적인 삶에 구속돼 이런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 자아라는 귀한 보물이 그들에게 있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것 같았다. 나는 평생 살면서 한 번 경험할까 말까 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특별한 사람으로 느꼈다.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내가 곧 신이라는 인식으로 넘어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읽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 내가 곧 신이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때까지 나는 교회에 다니며 신이 있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신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또 어디나 있으면서 나를 지켜보고 내 생각을 꿰뚫고 있는 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신을 접촉해 본 적이 없고 단지 그 존재를 믿고 있을 뿐이었다. 헤세와 크리슈나무르티, 니체가 말하는 신은 그런 신이 아니었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헤세와 크리슈나무르티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과 유사한 신이 된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세 작가에 대한 나의 이해가 그랬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범신론적인 신의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신이고, 내가 곧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 진리를 인식한 나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듯했고 전에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나를 느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었고, 짜라투스트라처럼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나에게 보이는 세계는 저만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물러났고, 순수한 정신의 세계가 열렸다. 내가 그 세계 속에 갇힌 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도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절대고독 그리고 외로움     


  황홀한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외적인 생활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내 내면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아찔할 정도로 고양된 상태에서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됐다. 나는 우월감 속에서 자신을 고립시켰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높은 벽을 내 주위에 쌓아 올렸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나는 섬이 되었고 타인은 내게 지옥이 되었다. 누구하고라도 말을 하려고 하면 나는 전혀 소통되지 않는 고통을 느꼈다. 모두가 낯설어졌고 나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내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완전히 고독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책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철학서들을 읽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 루소,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를 읽었다.

  지독한 절대고독의 시간이 찾아왔다. 처음 느낀 고독의 달콤함은 이내 무시무시한 공허함으로 변했다. 매일 수업을 듣고 혼자 밥을 먹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고독이 메뚜기 떼처럼 내 영혼을 뒤덮으면 클래식 감상실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홍대 도서관 3층에는 칸막이로 된 좌석들이 있었고 개인 등이 달려 있었다. 도서관은 거의 항상 꽉 차 있었다. 학생들은 전공이나 토플 등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나처럼 한가롭게 책을 펴놓고 읽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으면 순간 내가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 위에 서 있는 그림이 상상됐다.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보면 끝도 알 수 없는 깜깜한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했다. 까딱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하면 나는 그 심연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그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나는 책을 서둘러 펼쳤다.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황홀하기도 하고 다시금 자유로운 느낌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저자들과의 교감을 느끼며 잠시 고독과 두려움을 잊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왜 그런 변화가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 내가 경험한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깨달음이 준 자유로움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절망과 소외, 어두움이었다. 악마가 나를 속여 대단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처음으로 우울증을 겪은 것인지도 모른다. 최초의 정신적인 충만감은 조증이 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대에 가지 못한 충격으로 짓밟힌 자존감이 그런 식으로 방어기제를 작동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분석가도 아니고 심리학에 정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때의 체험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누군가에게 분석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당시에는 대단한 체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저 또 하나의 과대 자기의 출현이 아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자주 도서관 꿈을 꾼다. 내가 도서관에 있다.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 헤맨다. 없다. 있어도 나는 그에게 투명 인간이다. 나는 결국 혼자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런데 가슴이 사무치도록 외롭다. 그 느낌이 너무 강하고 생생해서 종종 꿈속에서 서럽게 운다.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거나 도서관에 홀로 있는 나를 보면 항상 그렇게 울다 잠이 깼다. 대학 시절부터 도서관은 내게 고독과 외로움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혼자만의 왕국을 세웠고 외로우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캄캄했던 1년 반. 내 생애 최초의 터널이었다. 외로움과 절망이 그 터널의 이름이었다. 그 이후로도 터널은 내 인생에 여러 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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