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3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운동권 학생들
운동권 학생들
나는 86학번이다. 당시 홍익대는 인근의 연세대, 서강대 등과 더불어 마포 신촌 지역 대학들의 학생운동에서 선봉적인 위치에 있었다. 대학 정문에는 거의 매일 바퀴벌레 같은 장비를 한 전투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는 이유도 없이 그들을 째려보고 정문을 들어서곤 했었다. 대학생이 되자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어 아무 감각 없이 정문을 드나들었다. 학생회관 앞 작은 광장에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집회가 열렸다. ‘투쟁!’이라는 검은 글귀가 크게 쓰인 흰 띠를 머리에 두른 수십 명의 학생들이 광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앞에 나서 연설하면 앉아 있던 학생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 학생이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 투쟁!”을 외치면 앉아 있던 학생들도 주먹을 쥐고 팔을 흔들며 구호를 반복했다.
때로 집회 규모가 클 때는 총학생회 회장이 직접 나와 연설했다. 그는 대머리에 마른 체구였고 키가 컸다. 검은 뿔테 안경 뒤에는 날카로운 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자주 흰 도포를 입고 학생들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결연했고 한 번도 웃는 법이 없었다. 공부도 안 하면서 운동권이랍시고 집회 장소에 얼씬거리는 과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조국의 민주화와 남북이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해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는 인물 같았다. 운동권 학생들을 다소 우습게 생각하던 나도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신념에 차 연설하는 그에게만큼은 존경심마저 일었다.
가끔은 나도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았다. 그들은 현 정권을 군부독재, 파쇼정권으로 규정하고 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했다. 반미를 외치며 남한과 북한이 주체가 되어 통일을 이루는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광주, 광주. 그들은 광주에서 무참히 민간인을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를 처단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는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곳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상처는 안다. 돌아서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리. 산 자여 싸우라. 앞서서 나가리. 산 자여 싸우라.” 집회는 거의 항상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끝났다. 그들의 열변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던 나도 이 노래를 듣고 있을 때만큼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같이 흥얼거리다가 따라부르고 있었다.
때로 그들은 집회를 마치고 정문으로 진출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남학생들이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준비해 둔 화염병을 들고 정문으로 내려가면 구경하던 학생들은 일시에 흩어졌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곤 했다. 그들은 정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정문 밖에서 일렬로 정렬하고 방패를 앞을 가린 전투 경찰들을 향해 다시금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전투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았고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면서 다시 학교 쪽으로 달려 돌아왔다.
처음에는 저러다가 누군가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똑같은 일들이 마치 의식처럼 반복되었다. 학생들도 화염병으로 전투 경찰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것 같지 않았고 전투 경찰들도 학생들을 잡으려 달려 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몇십 분 대치하다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로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그 후로는 학생들이 정문으로 진출해도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5월 18일이 되면 대학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광장은 수백 명의 학생들로 가득 찼고 각종 구호가 쓰인 깃발들이 나부꼈다. 단과대 단위로 학생들이 정렬해 앉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듯한 긴장감이 캠퍼스를 감돌았다. 화염병이 그득 쌓여
있었고 학생들은 이미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집회는 오후 내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여러 명의 학생이 번갈아 나와 연설했다. 때로는 여학생들도 연설하고 구호를 외쳤다. 나는 카랑카랑한 운동권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더 가슴을 울린다고 느꼈다. 티에 청바지, 짧게 깎은 머리,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그 여학생들이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경이 되면 수백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정문으로 나아갔다. 정문 밖에는 아침부터 평소보다 두 세배 많은 전투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전투의 시간이 왔다. 평소 일상적으로 대치하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앞에서 화염병을 던지던 학생들이 뒤로 빠져나가면 다음 조 학생들이 연달아 화염병을 던졌다. 따닥 딱 딱...최루탄이 터지는 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순식간에 캠퍼스 전체가 연기에 휩싸였고 매운 최루 가스가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나는 서둘러 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도서관 입구까지 최루 가스 냄새가 올라왔다. 밖에서는 한동안 최루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의 노래와 구호 소리도 들려왔다. 도서관 안에 있는 학생들은 바깥 상황은 아랑곳없이 공부했다. 나 역시 그랬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날에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경찰에 잡혀가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로 나누어진 대학 사회에서 나는 소위 사회참여에는 관심이 없는 학생 축에 들었다. 거기에는 내 나름의 신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아에 눈을 뜨고 내가 곧 신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나에게는 사회라는 것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실체가 있는 것은 개인이고 사회는 그런 개인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 불과했다. 사회의 구조를 변혁함으로써 세상을 바꾼다는 운동권의 논리에 나는 반대했다. 진정 변혁해야 할 것은 개인이었다. 각 사람이 깨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지 못한다면 어떤 사회구조 속에서도 인간은 속박되기 마련이었다. 나는 민주주의에도 사회주의에도 관심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회체제는 영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영원한 것에 관심이 있었다. 어차피 계속 변전을 거듭할 사회체제를 바꾸고자 한평생, 혹은 젊음을 바친다는 건 무모한 낭비로 보였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찾고 완성하는 것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운동권 학생들의 주장에 공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남북통일 문제도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광주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나를 몹시도 괴롭혔다. 그 일에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한 책을 누군가 내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인들, 팬티만 입고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젊은이들, 관 앞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사진을 보며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어 머리를 도서관 책상에 처박은 채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고 가슴 속에 먹먹한 분노가 차오르는데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인가. 나도 저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야 하는 걸까. 나의 이성과 가슴은 그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답을 알 수 없는 그 질문 앞에 목구멍이 막혀왔다.
1987년 6월 29일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캠퍼스의 분위기는 전해에 비해 한층 고조되었다. 거의 날마다 시위가 이어졌다. 학생운동에 비판적이고 미온적이었던 기성세대에게조차 이건 아니라는 의식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된 열기가 나라 전체를 덮고 있었다. 마침내 6월,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었는데도 학생들은 캠퍼스에 남았다. 이웃한 연세대에서 이한열이라는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는 모습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곧 터져 나올 용암이 들끓는 분화구처럼 온 나라가 분노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잊을 수 없는 29일. 역사적인 그날 나도 드디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평소에 한 번도 시위에 가담한 적이 없던 학생들조차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좁은 광장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찼다.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없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떤 신념을 갖고 있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싱그러운 봄날에 잎을 피우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자라나던 두 젊음이 고문치사로, 시위 현장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가슴에 들어차 빠져나갈 줄 모르는 분노를 어떻게든 표출해야만 했다. 야만적인 정권을 향해,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력을 향해.
정문 앞에는 엄청난 수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건 전쟁이구나. 좋다, 해보자. 국민이 무섭다는 걸 보여주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걸 알게 해주지. 나 같은 학생이 시위에 나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거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의 항쟁이 가져올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콘크리트 바닥에 몇 시간을 앉아 연설을 듣고 운동 가요를 목청껏 불렀다. 자리를 이탈하는 학생은 없었다. 어차피 정문으로 진출하는 건 오후 늦게나 될 것이었다. 시시각각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선두에 선 운동권 학생들은 오늘 마침내 이 정권을 끝장내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날 전국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캠퍼스에 있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전국의 대학교에서 총시위가 일어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는구나. 나는 묘한 흥분과 더불어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먼 발치에서가 아니라 내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겠구나. 내가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쓰러지거나 혹시라도 잡혀가면 어떡하지. 막상 스크럼을 짜고 조금씩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니 겁이 덜컥 났다. 그렇다고 해서 대오를 이탈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 많은 학생이 다 잡혀가지는 않을 거야. 다른 학생들이 움직이는 대로 나도 움직이면 될 것이라고 떨리는 마음을 다독였다.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전두환은 물러나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학생들의 외침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대오의 맨 앞 몇 줄은 노련한 운동권 학생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화염병을 투척하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달려오면 뒤따라가던 일반 학생들은 흩어지게 될 것이었다. 학생들의 위세에 놀란 탓인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인지 정문 앞에 있던 병력이 전철역이 있는 큰 대로까지 물러났다. 학생들은 정문을 지나 대로를 향해 나아갔다. 인근 상점들은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셔터를 내렸다. 학생들은 도로에 멈춰서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해 구호를 외쳤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시위대가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시위가 이어지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사태를 지켜 보리라. 프랑스 혁명 때 바스티유로 향하던 군중의 심리가 이런 것이었을까. 4.19 때 거리로 뛰쳐나간 학생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광주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날 나는 우리가 역사를 바꾸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내 길고 긴 시위대는 전철역이 있는 대로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전투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소위 닭장차라고 불리던 버스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다. 학생들은 대로에 다시 앉아 구호를 외치고 운동 가요를 불렀다. 맞은 편에 늘어서 있는 전투 경찰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벌써 긴 여름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가로등이 켜지고 여름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학생들은 자리를 지켰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그날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배가 고프다는 것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거대한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이한열을 살려내라!” 구호가 퍼지고 화염병이 날아갔다. 시작됐구나. 대낮에 보던 화염병과 밤에 보는 화염병이 주는 인상은 사뭇 달랐다. 포물선을 그리고 불꽃을 퍼뜨리며 날아가는 화염병은 정말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곧바로 고막이 터질듯한 소리가 진동했다. 전투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한 것이다. 대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모두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학교 쪽으로 올라가는 도로를 향해 달렸다. 순간 코와 눈으로 확 들어오는 최루 가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고 코에서 콧물이 흘렀다. 생전 처음 느껴본 그 따가움과 매움을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도로 위로 한참을 올라간 후 바닥에 쓰러져서 한동안 눈물을 쏟고 나서야 가스가 눈에서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각자 알아서 도망치느라 누구를 챙기고 할 틈이 없었다. 그 많던 학생들이 이렇게 빨리 흩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운동권 학생들이 여전히 대로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 최루탄이 터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들이 마무리할 것이다. 아마 이미 잡힌 학생들이 많을 것이고 저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시간은 어느덧 열 시가 넘어서 있었다. 길고 긴 하루였다. 나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옷에 묻은 최루 가스를 한참을 털어냈다. 최루탄이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장난이 아니다. 운동권 학생들은 날마다 이런 최루 가스를 마셨겠구나. 처음으로 그들이 대단해 보였고 저 대로에 남은 학생들이 영웅같이 느껴졌다. 두려움이 없는 그들. 그들을 함부로 판단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평온했다. 나는 누구에겐가 오늘 있었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서울대학교에 가서 열혈 운동권이 된 기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 기숙이도 오늘 시위에 참여했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기숙이가 전화를 받았다. 그 시간에 집에 있었다.
“오늘 어땠어, 기숙아? 너 별일 없니?”
“응, 괜찮아. 나는 일찍 집에 들어왔어.”
기숙이는 그날 서울대에서 있었던 시위 상황을 대충 들려주었다. 총학생회 여학생 지도부에 있었던 소위 ‘브레인’에 해당하는 기숙이는 일찌감치 위험한 시위 현장을 빠져나왔다.
“다행이다. 오늘 나도 시위에 참여했었어.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그랬구나. 별일 없었어?”
“최루탄 가스 마셨지. 야, 장난 아니었어. 너 걱정되더라.”
“나야 뭐...”
기숙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얘기했다. 나는 열에 들떠 내가 보았던 광경을 기숙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기숙이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생했는데 어서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마치 무수한 전장을 누빈 장수 앞에서 첫 전투 경험을 늘어놓는 풋내기 병사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정말 대단해, 기숙아. 앞으로도 조심해.” 기숙이가 말없이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고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는데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지. 내가 시위에 참여했다는 걸 알면 무척 놀라겠지. 그런데 나는 동생들이 아닌 내가 까무러치게 놀랄 일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그날이 6월 29일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