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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03.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5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네번째 입원과 기도원

네 번째 입원과 기도원    

 

  아버지는 수해가 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폭음을 시작했다. 정확히 삼 년이 지난 후였다. 주기가 맞아서인지 화재라는 사건이 아버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서 아버지의 증상이 악화해 다시 병원에 입원하기를 바랐다. 그 방법 외에는 아버지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불같이 화를 내면서 큰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아버지에게는 큰아버지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면 늘 큰아버지에게 가곤 했던 걸 보면. 저녁이 되자 큰집에서 주인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큰아버지는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를 입원시켰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버지의 네 번째 입원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친구 진숙에게 할 수 있었다. 진숙의 아버지도 알콜 중독자였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나는 이 세상에 아버지 말고도 알콜 중독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숙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와 그리 겹치는 것이 많던지. 비로소 우리 집 가정사를 숨김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후련하고 시원했다. 아버지가 입원한 날, 나는 저녁에 학교 도서관으로 진숙을 찾아갔다. 도서관에 있던 진숙은 기꺼이 나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주었다. 내가 울며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 진숙은 내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주고 나서 위로해 주었다. 처음으로 나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을 만나 꼭 필요한 순간에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달쯤 지나 아버지가 돌아왔다. 이제 오십이 넘은 아버지. 아버지는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활동이 적어지고 몇 시간씩 방에 누워 지내다 보니 올챙이처럼 배만 볼록 나왔다. 아버지는 누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서 발끝을 까딱까딱하면서 흘러간 옛 가요를 메들리로 흥얼거렸다.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과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나는 하도 많이 들어서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를 저절로 외웠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기분이 좋아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기분 좋지.”라고 답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아요?”

“뭐, 그냥 좋지.”

  약의 부작용 탓인지 아버지와 정상적인 대화가 점점 불가능해졌다. 아버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이란 걸 하기는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지능이 나빠지는 것일까, 인지력이 퇴화하는 느낌이었다. 술을 마실 때는 여전히 무서운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을 때도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니 나는 전에 없던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병은 정말 고칠 수 없는 것일까. 저런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버지의 인생이 가엾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나는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갑자기 신앙의 힘으로 아버지를 고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아버지 얘기를 들은 한 선배가 아버지를 데리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 보라고 충고를 했다. 정말 그렇게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1월이었는데 날씨가 청명했다. 여전히 순복음교회를 다니고 있던 나는 오산리 금식 기도원에 가기로 하고 아버지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가겠다고 했다. 나와 아버지가 둘이 어딘가를 함께 가는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기도원에는 이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얇은 이불을 보자기에 싸서 서대문 근처 어딘가 기도원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곳에 갔다. 기도원에 도착해서는 대형 본 예배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중고등학생 시절 여름 겨울 수련회 때마다 온 곳이라 익숙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잠을 자기도 하고 소리를 높여 기도하기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했다. 설교 시간 외에는 무엇을 해도 괜찮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버지와 둘이 나는 무엇을 하겠다고 그곳에 간 것일까. 아버지는 설교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수시로 바깥을 드나들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나는 자꾸 왔다 갔다 하는 아버지가 신경 쓰여서 공연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기도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빠, 나랑 같이 기도해요.”

“그래.”

  내가 아버지 손을 잡고 기도하면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아버지의 집중력이 곧 흩어졌기 때문에 오래 기도할 수가 없었다. 기도원에 온 게 후회되었지만, 이불까지 싸 왔으니 하루는 지내고 가야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찌감치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그냥 돌아가기가 서운했다. 기도원에는 목사님의 기도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아버지를 데리고 그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젊은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기도를 받고 싶으신가요?”

“저희 아버지가 알콜 중독이 있으세요. 하나님이 고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도합시다.”

목사는 아버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용인 정신병원의 의사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목사는 그저 형식적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아무런 간절함도,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과 그의 가족에 대한 긍휼한 마음도 없었다. 짧고 기계적으로 기도를 마친 그는 이제 나가도 된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너무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아버지, 이제 집에 가요.”

아버지는 순순히 나를 따랐다. 딸이 가자고 하니까 기도원까지 따라오고 가자니까 가는 아버지가 마치 나의 보호에 맡겨진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도, 교회에서도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아버지를 도와줄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아버지는 이렇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인생을 헛되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고쳐 주실 수 없으신가요. 믿음의 문제로 갈등하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막막함에 한숨을 지었다. 

  ‘다시는 아버지를 이런 곳에 모시고 오지 말아야지.’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다시 집까지 꽤 먼 길을 돌아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집을 떠나 딸과 하루를 지내고 온 게 좋았었나 보다. 쌀쌀한 날씨에 손과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버지는 잔뜩 흥이 나 있었다.    

  

회의의 용광로     


  1학년 여름방학의 신비한 체험 이후 나는 마치 돌다리를 건너듯 하나의 철학에서 다른 철학으로 신속하게 옮겨갔다. 최초의 범신론은 곧 불가지론으로 변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실존주의에 이끌렸다. 아버지가 입원한 후 한 달간 나는 철저한 허무주의자로 변했다. 그러나 허무주의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이런 사상의 편력을 거치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교회를 떠나지 못했다. 나는 이전의 순진한 신앙을 이미 버렸지만 교회를 떠날 용기까지는 없었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한갓 신화이고 인간이 만든 고등종교에 불과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 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곧 신이라는 미망에서는 이미 벗어난 지 오래였다. 내가 기독교를 완전히 부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 주위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때문이었다. 나처럼 확신도 없이 그렇다고 별다른 갈등도 없이 그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신앙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믿는 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신앙을 버릴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죽음의 문제 때문이었다. 인간이 언젠가 죽는다면 이 유한한 인간의 삶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삶의 무의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하는 허무주의에는 도저히 머물 수 없었다. 삶에 내던져진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실존주의는 역설적으로 나의 ‘실존적’ 불안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기를 원했고 그 진리를 발견하기를 갈망했다. 진리가 없다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었다.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버리고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왜 이토록 복잡한 자기에 대한 의식이 주어져 있는 것일까. ‘나’라는 존재를 평생 의식하고 고통을 느끼며 살다가 한순간 재로 변해 버리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일까. 삶이 무의미하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버린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태어났다 해도 되도록 빨리 이 삶을 끝내버리는 게 합리적이지 않은가. 나는 사람들이 ‘죽으면 다 끝이야’라고 말하면서 삶에 집착하고 별 고뇌 없이 살아가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죽음이 정말 끝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가 있는지. 진리가 있는지, 있다면 진리란 무엇인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내게 일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겉으로는 남들처럼 먹고 자고 공부했지만, 나의 머릿속에서는 한시도 이 문제가 떠나질 않았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종로서적에 가서 신앙 서적을 골라와서 읽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헤매는 나는 무수한 인파 속에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사무치는 외로움을 달래줄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나는 루이스를 발견했다. 『단순한 기독교』에서 그는 예수에 대한 세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예수는 사기꾼이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의 주장처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루이스의 추론처럼 나 역시 예수를 사기꾼이나 정신병자로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 걸까. 예수는 나를 몹시도 괴롭히는 존재였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예수를 믿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성경에 쓰여 있어서?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나에게 조소만 불러왔다. 그 누구도 나에게 설득력 있는 답을 해주지 못했다. 

  어정쩡한 상태로 교회를 계속 다니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설교는 그저 성경의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이거나 허무맹랑한 간증투성이였다. 내가 가진 질문은 어디에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내가 믿음을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나의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믿으면 되는데 왜 그런 의심을 하니?’ 하는 반응이었다. 

  그때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었는데 사실 그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알료샤는 나의 이상형이었고 이반은 사상적 동지였다. 진리를 찾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간 알료샤는 분명 그 진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조시마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기독교의 깊은 진리를 알고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나는 이반의 항의와 반항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었지만, 그가 틀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러나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전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섣불리 기독교를 내 잣대로 판단하지 말 것이며, 아직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영원히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캄캄한 절망이 나를 덮쳐왔다. 나의 표정은 늘 심각했고 양 눈썹 사이에는 깊은 미간 주름이 접히기 시작했다. 나는 곧 나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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