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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04.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6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회심과 거듭남

회심과 거듭남     


  우리 과에 세학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작은 눈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늘 혼자 다녔다. 우연히 다른 선배가 세학 선배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면서 나에게 소개했다. 종종 그 선배를 도서관에서 만났다.

“커피 한잔 마실까?”

세학 선배는 나에게 다가와 대화를 청했다. 도서관 휴게실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었고 공부하다 잠시 나와 쉬면서 대화하는 학생들로 늘 북적였다. 커피 냄새와 담배 연기, 학생들의 대화로 그 공간은 늘 활기찼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한 음식점 구석에서 신에 대하여, 자유에 대하여, 그 유명한 ‘대심문관 전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세학 선배는 가볍고 재미있는 대화가 어울릴만한 공간에서 나에게 성경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사실 성경을 그리 잘 알지 못했다. 복잡한 철학 서적들을 읽다 보니 성경은 시시하고 믿음을 강요하는 따분한 책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세학 선배가 이야기해 주는 성경 내용 중에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 많았다.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내가 물으면 선배는 직접 성경을 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정말 있네요.” 내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주로 내가 짧게 질문을 하고 선배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선배의 이야기는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는 쉽고 단순하게 신앙에 이른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전해주는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경에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진짜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믿음이 없는 것은 제대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는 어쩌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아는지 지금껏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게 부끄러워졌다. 나도 선배처럼 굳건한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살아가는 목적을 아는 사람으로 보였고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간간이 선배와 대화를 나눴지만, 나의 깊은 의심들을 솔직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 선배조차 내 의심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7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가버린다는 것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나는 제대로 성경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가방에 큰 성경을 넣어 다녔다. 도서관에서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이 드는 내용들을 노트에 적었다. 그렇게 12월을 보냈다. 24일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보통 교회에 가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밤새 하곤 했었다. 그해 나는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동생들이 교회에 가고 나는 집에 남았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TV에서 예수의 생애나 성경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외화를 보여주곤 했다. 그해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라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도 그 영화가 어느 나라 영화인지, 감독이 누구인지 모른다. 흑백영화였고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우연히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나는 곧 홀린 듯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전쟁에 나가 심한 부상으로 집에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병중에 예수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병에서 낫자마자 광장으로 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옷을 다 벗어버린다. “하늘 아버지께서 이제부터 나의 진짜 아버지십니다.”라는 말을 하고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난다. 이후 그는 탁발수도사가 되어 일정한 거처도 없이 세상을 떠돌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그는 해를 형제라고, 달을 자매라고 부르고 새들과 대화를 나눈다. 점점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여 무리를 이루게 되자 교황이 그를 소환한다. 교황은 그를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어떻게 수도회를 이끌 것인지 묻는다. 프란치스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하늘에 나는 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먹이십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입히십니다.”라며 교황 앞에서 설교한다. 교황은 “감히 내 앞에서 복음서를 설교하는가?”라고 말하지만, 결국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하고 축복한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

  영화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순간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단순하고 청빈한 삶, 교황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체화한 그의 삶이 너무나 숭고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저런 분이 정말로 살았었단 말인가. 저런 삶이 정말로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것도 저런 삶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결코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나보다 너무나 높은 곳에 서 있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슬프고 절망스러워 한참을 통곡했다.

  한 시간 정도 진정할 수 없는 통곡이 계속되었다. 나는 결코 내가 원하는 숭고하고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자각, 나의 삶은 시시하고 보잘것없이 끝나버리고 말 거라는 쓰라린 감정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나와 프란치스코의 거리가 이 정도라면 나와 하나님은?’이라는 질문이 번쩍하며 머릿속을 관통했다. 우주 저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나의 거리는 수백만 광년으로도 모자랄 듯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죄’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 무엇으로도 좁힐 수 없는 신과 나 사이의 이 무한한 거리. 그 거리가 바로 죄였다. 나는 신에게서 분리되었고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분리를 극복할 수 없으며, 내가 그에게서 이렇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면 나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었다. 두려움이 덮쳐왔다. “아,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 말로 하지 않았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 회심의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내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1일이 지났고 1988년 새해가 왔지만 나는 여전히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열흘이 지났다. 올해도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어. 나는 차라리 죽기를 갈망했다. 내 영혼은 이미 전 생애를 살아버린 노인과 같았고 인생에서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삼일 정도 영혼에 칠흑 같은 어둠이 닥쳐왔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지냈던 삼일, 예수님이 무덤 속에 갇혀 있던 삼일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나는 도서관 3층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성경을 꺼냈다. 죽을 지경으로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다시 한번 마음 깊은 곳에서 뜻밖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에게 죽으라고 하시면 죽겠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어요.” 성경을 펼쳤다. 사도행전이었다. 성경 중에서 유독 내가 싫어하던 책이었다. 사도들의 행적이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냥 펼쳐진 곳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부활한 예수가 감람산에서 승천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가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설교하니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사도행전의 장면 안으로 들어간 듯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설교하던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성경의 구절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다. 이천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너무나 생생한 그 현장에 가 있었고 예수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말들이 다 믿어지는 것이었다.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뭔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어, 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였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다니. 내가 얼마나 원하고 원했던 평화였는가. 그런데 그 평화가 내 영혼 속에서 생겨나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쁨, 기쁨. 이런 기쁨이 있었다니.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터질 듯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는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이 경험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지만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것이었음을 알았다. 내 주위는 고요했다. 다른 학생들은 각자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지만 동시에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 있었다. 누구에게서도 이런 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미쳤거나 비정상적인 경험을 한 거라기엔 마음의 상태가 너무나 평온하고 기쁘고 고요했다. 터질듯한 기쁨을 느꼈지만, 전혀 흥분되지 않았고 들뜨지도 않았다. 이 년 전의 신비로운 체험과는 분명 달랐다. 그때는 내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고양된 느낌, 어떤 것도 나를 제약할 수 없다는 자유로움에서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요한이 고백했듯이 나도 예수를 보고 듣고 알았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성경의 구절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움직이니 더 이상 과거의 의심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꽤 넓은 골목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그 길 전체가 융단처럼 흰 눈에 덮여 있었다.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았다. 나는 그 눈을 밟고 걸어가면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마침내 혼자 춤을 추었다. 골목 안에서 나 혼자 춘 그 춤은 내게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내려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예배였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을 찾아 읽었다. 그 글에서 루터가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로움과 자유에 대해 나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기쁨이 그치질 않았다. 혹시 자고 일어나면 기쁨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나의 경험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한 달 동안 나는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성경의 내용들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도 다 이해되었다.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마침내 믿음이 찾아왔고 나는 그렇게 멀리 느껴졌던 하나님이 나의 마음속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저 공식 같기만 했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감격하여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세상이 달라 보였고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길을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기나긴 방황과 추구를 마치고 결승선에 도달한 듯한 안도감과 평안함을 느꼈다. 지나간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보이며 다 해석되는 것 같았고, 앞으로는 절대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어두움은 없을 것이고 마침내 찾은 진리 안에서 똑바른 길만 걸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삼 개월 정도 나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마치 천국에 있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겪은 일이 거듭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비로소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놀랍고 또 놀라웠다. 그동안의 모든 불운했던 일들이 다 보상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삶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고 너무나 소중한 체험이었기 때문에 아껴두고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서관에서 세학 선배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

“선배님, 저한테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래? 무슨 일인데?”

나는 짤막하게 최근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선배는 빙긋이 웃으며

“축하해. 이제 시작이네.”라고 말했다.

“네? 이게 시작이에요? 끝이 아니고요?”

선배의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이게 시작이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또 일어난다는 거지?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앞에는 긴 순례의 여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을 뿐이며, 거듭남의 기쁨이 아무리 경이롭고 황홀한 것이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사그라질 것이고, 신앙의 여정은 너무나 혹독하고 험난하다는 것을. 인생의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삶은 나에게 계속 어려운 시험을 보낼 것이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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