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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06.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7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변화


변화     


  내가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토록 지난하고 힘들었던 이유는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려면 내 삶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나의 자아를 그에게 굴복시켜야 했다. 나는 그것이 죽기만큼이나 싫었다. 나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내 마음속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 하는 치열한 싸움에서 나는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까지 하나님은 나를 기다린 것 같았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젖 먹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포근하고 따뜻한 안정감과 사랑을 맛보았다. 

  나는 확실히 변화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내가 쌓은 견고한 성에 갇혀 누구와도 마음을 드러내고 소통하지 않던 내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그 전에 나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이웃사랑이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삶의 목적이 생겼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그의 뜻을 위해, 그의 나라를 위해 살고 싶었다. 

  그 이후 다시 회의와 의심이 찾아왔을 때도 그 사건은 잊어버릴 수도, 부인할 수도 없이 견고히 내 신앙의 이정표로 남아 있었다. 그 사건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었다. 심리적인 어떤 작용으로도 도저히 설명될 수 없었다. 다시 인생이 캄캄한 밤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형국이 되었을 때도 예수를 만났던 그 사건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등대처럼 저 멀리서 불빛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다. 

  나는 홍대에 간 사건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내가 서울대에 가서 어릴 적 꿈을 이뤘다면 얼마나 오만해졌을까. 아마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내 잘난 맛에 살았으리라. 나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해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셨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했다. 시간이 지나서 그 해석은 폐기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게 큰 위로가 되는 생각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우리 아버지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변화되어 사람들에게 간증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올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생각만 해도 벅차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이 있다고 믿게 될 거야, 많은 사람이 아버지를 보고 하나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주고 예수님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해 주었다. 아버지는 내 말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너무나 단단한 껍질이 있어서 어떤 말도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는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고 주의를 흩뜨려서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그때마다 깊은 비애를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리라 다짐했다.

  그해 봄 어느 날 아침부터 술을 먹고 낮에 집에 들어온 아버지가 나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그런 일은 전에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신세 한탄을 했다. 늘 기분이 좋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낯설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좀처럼 진정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빠, 제가 기도해 드릴까요?”

“그래.”

아버지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크고 거무스름한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도 내 손을 꽉 쥐었다.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아버지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내 눈에서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는듯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리 아버지 어떡해요? 저를 만나 주셨잖아요. 아버지도 만나 주세요.” 

  기도가 끝나도 아버지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을 토닥여 주기도 하고 손을 잡고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어떻게 갑자기 터져 나온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나는 딸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리 배우자가 된 것 같았다. 이제는 아버지가 나에게 기대어 나의 위로를 구하고 있었다. 

  “아빠, 좀 누우세요. 제가 좋은 책 읽어 드릴게요.”

나는 그때 읽고 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가져왔다. 그 책의 내용이 아버지의 슬픔을 진정시켜 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좀 지쳤는지 내 말대로 자리에 누워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낙담하고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이곳저곳 펼쳐 위로될만한 구절들을 읽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훌쩍이면서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계속 책을 읽었다. 시간이 참 더디 갔다. 진정되는 듯하다가 다시 터져 나오는 울음.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아버지가 잠이 들었다. 진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잠든 아버지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혼자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내가 한 행동은 이전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 지독한 미움이 다 사라져 버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남았다. ‘내가 진짜 변했구나.’ 힘겹고 마음 아픈 하루였지만 ‘이제는 이렇게 아버지를 사랑해 드려야지,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야지’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하나님이 내게 준 새로운 마음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하고 무서워하지 않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필요했다.     

 

드디어 찾은 집교회     


  세학 선배는 내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와 보라고 초청했다. 선배는 본인의 교회에서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는 말을 해줬다. 금요일마다 성경 공부 모임이 있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데는 선배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선배를 따라 그 교회를 방문했다. 하필 교회는 서울대 입구 전철역 근처에 있었다. 그때는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 선택을 잘못했다는 자책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다. 

  건물 이층에 있는 작은 교회였다. 관악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창문에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라는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순복음교회에 다니다가 그렇게 작은 교회를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교회에는 의자가 없었고 바닥에 상을 펴 놓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성경 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듣더니 벌써 나를 알고 있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한 그룹에 들어가 성경 공부에 참여했다. 약간 곱슬머리에 굵은 테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공부를 인도했다. 나는 그가 성경 구절을 풀어 설명하는 깊이와 해박함에 놀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나누는 분위기에 또 놀랐다. 그동안 교회에서나 기독교 써클 모임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친밀감,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공개하는 솔직함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후 나는 매주 금요일마다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조금씩 사람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각자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은 달랐지만,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이 죄인인지 깊이 깨닫게 된 시점이 있었고 진실한 회개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랍고 신기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들에게 진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순복음교회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몇 달 후 교회를 옮겼다. 옮기자마자 부활절에 침례식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교회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셔서 얼떨결에 침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그때 받은 침례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제야말로 진짜 침례를 받을 때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 그 침례의 의미가 내게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4월이었는데도 아직 날씨가 쌀쌀했다. 예배당 한가운데 사람 세 명이 들어갈 만한 큰 물통이 세워졌다. 따뜻한 물을 섞어서 물통을 3분의 2쯤 채웠다. 침례를 받는 사람들이 강대상 앞에 서서 돌아가면서 간증했다. 내 차례가 되었는데,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어디서 마무리해야 할지 몰랐다. 간증이 너무 길어지자 뒤에 서 있던 한 남자분이 손짓으로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파란색 침례 가운으로 갈아입고 사람들이 찬양을 부르는 동안 물통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너무 차가워 몸이 덜덜 떨렸다. 두 명의 장로님이 간단한 질문을 하고 등을 받쳐주면서 내 몸을 물속에 눕혔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던 나는 눈을 꼭 감고 숨을 참았는데도 결국 물이 코에 들어가고 말았다. 차가운 물 속에 잠시 머무는 동안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게 실감 났다. 후다닥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렸다. 한기가 가시지 않아 몸이 계속 떨려왔지만,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기쁨과 감격에 목이 메었다. ‘이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지.’ 

  내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소위 ‘형제교회’라고 불리는 교회였다. 교파가 없고 목사도 없고 믿는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불렀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거부하고 루터가 말한 만인 제사장을 실천하는 교회였다.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보니 이 교회가 초대교회와 많이 닮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형제, 자매들의 신앙이 진실하고 사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달랐다. 신선했고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그 교회로 옮기자 나를 아는 사람들은 혹시 이단으로 간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고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80년대에는 그런 오해를 받기도 했었다. 2020년대인 지금은 그런 의심을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되었다. 

  그 교회에서 나는 8년 동안 신앙의 기초를 다졌다. 강해 위주의 설교와 철저한 성경 공부로 어디 가서도 얻을 수 없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교회에서 나는 언니들과 오빠들을 얻었다. 우리 집 사정을 알게 된 형제, 자매들은 유독 나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다. 돌봄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교회는 내게 따뜻한 둥지였고 험난한 세상 속의 튼튼한 요새였다. 

  나는 곧 아버지를 교회에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해 이미 듣고 있었던 형제, 자매들은 “아버님, 아버님”하고 부르면서 아버지를 친근하게 대해줬다.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러 예배 시간에 수시로 들락거렸지만 누구 한 사람 뭐라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별로 의식이 되지 않았다. 교회는 이미 나에게 가족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집이 없었던 나에게 교회는 글자 그대로 집이 되었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교회에 오기만 하면 위로받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는 형제, 자매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내 남동생도 그해 여름 수련회에 따라와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옮겼다. 우리는 금요일마다 성경 공부를 하고 이어지는 철야 기도회에 참석했다. 빙 둘러앉아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돌아가며 기도하다 보면 새벽 두 세시가 되었다. 기도가 끝난 후에도 형제, 자매들은 잠자는 걸 아까워했다. 하나님이 삶에서 행하시는 이야기로 밤을 꼬박 새웠다. 동터오는 새벽까지 교제를 나누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토요일 아침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벼웠다. 

  스물두 살에서 스물네 살까지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가장 기쁘고 벅차고 아름다웠던 날들. 신앙의 유아기와 가슴 시린 두 번의 짝사랑도 했던 눈물 나도록 그리운 시간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에 나는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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