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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06.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8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유학의 좌절


유학의 좌절     


  일 년 만에 내게 첫 시험이 찾아왔다. 3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잊었던 빚이 생각난 사람처럼 유학을 보내주겠다던 대학의 약속이 떠올랐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유학을 가지 못해도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이 대학에 온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좌절이 없었더라면 결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앞두자 그 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는 도저히 사회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했던 욕심이 다시 강하게 나를 유혹했다. 다시 마음이 둘로 갈라졌다. 세상을 탐하는 것 같은 죄책감과 내가 당연히 찾아야 할 권리라는 두 생각. 기도했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나는 1학년 때부터 꾸준히 영어 작문 지도를 도와주신 여교수님께 상의를 드렸다. 교수님은 어느 날 대학 측의 입장을 내게 전달해주셨다. 

 “총장님을 뵈었는데...” 교수님은 약간은 난처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대학에서는 미국에 있는 톱10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으면 지원하겠다고 하네. 왕복 항공료와 석사과정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나는 입학 때처럼 꿈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입학 때 내게 약속한 것은 달랐는데. 이런 조건은 전혀 없었는데. 

 “선화한테는 좀 안타깝게 되었지만, 그래도 선화라면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생활비는 학교 다니면서 해결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고.”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교수님은 정말 그렇게 믿으시는 것 같았다.

 “네...”

 “일단 토플 시험 준비부터 해 봐.”

 “네.”

나는 또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했다. 홍대 졸업생인 내가 어떻게 미국 톱10 대학에 갈 수 있냐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냐고. 왜 대학 측은 지금 딴소리를 하느냐고. 내가 직접 총장을 만나겠노라고. 3년 전 스무 살 때처럼 나는 아무런 주장을 하지 못했다. 정신적 변화나 거듭남은 나의 성격을 조금도 바꿔놓질 못했다. 

  나는 망연자실해졌고 이미 대학에서 많은 장학금을 받았던 터라 그 요구의 부당함에 항의한다는 것이 배은망덕하게 여겨졌다. 왜 입학할 때 계약서라도 받아두지 않았을까 후회되었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유학 준비를 했다. 토플 시험을 보고 GRE에 작문, 회화 시험까지 치렀다. 1년을 준비하여 입학원서를 요청했으나 어느 대학에서도 원서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졸업 후 다시 1년을 준비했다. 그 일 년의 시간은 내 인생에 나타난 두 번째 터널이었다. 나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쪽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질질 끌려가는 죄수였다.

  시험을 보기 위해 원서를 쓰러 종로 세운상가 뒤를 돌아 고합빌딩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한번은 그곳에서 평택 초등학교 시절 내가 이겨본 적이 없는 그 아이를 만났다. 서울대 물리학과에 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도 유학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보았지만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다. 비참했고 절망스러웠다.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미국 유학을 가리라고 믿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머니에게 힘든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공감받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무리 힘들어도 내 마음을 남들에게 잘 표현하지 못했다. 나름 내 마음을 표현해 보았지만, 가족과 다름없던 교회에서조차 나에게 공감해주는 형제, 자매가 없었다. 

  내가 졸업한 해는 1990년이었다. 갑자기 전세난이 몰아닥쳤다. 서울에서 전세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신문에는 집을 구하지 못해 비관하여 자살하는 가장들의 기사가 계속 실렸다. 나와 동생은 전세를 구하러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부동산 중개인들은 나와 동생을 보고 신혼부부냐고 물었다. 결국 우리는 서울을 벗어나 역곡이라는 곳에 가서 전세를 구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꼬박꼬박 적금을 들어두었던 돈이 있었기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학을 가지 못했어도 장학금을 주었던 대학에 고마워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 돈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디에 가서 살 수 있었을까. 

  역곡 집은 드디어 주인과 분리되어 우리 가족만 살게 된 첫 집이었다. 작지만 제법 거실다운 거실과 넓은 안방이 있었고 안방보다 더 넓은 방이 내 차지가 되었다. 내 방은 전에 상가로 사용한 적이 있어서 두 면이 통째로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고 방이 너무 넓어서 이사한 첫날에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드디어 집에 전화도 설치했다. 집다운 집에서 살아보는 게 처음이라 몇 달 동안 나는 집 꾸미기에 열을 올렸다. 매일 가야 할 곳도 없었기에 마치 주부가 된 것처럼 살림하는 데에 좀 더 신경을 썼다. 언제나 공부가 먼저라 가족은 늘 뒷전이었다. 동생들은 나이가 들면서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적어졌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알아서 살았다. 나는 늘 자신이 형편없는 누나라고 생각했다. 유학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을 덜어보고자 집안도 꾸미고 김치도 담그면서 집안일에 충실해 보려고 애를 써봤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얼마 가지 못했다. 사다 놓은 화분의 식물은 아무리 물을 줘도 다 죽어버렸고 난 역시 주부 스타일이 아니라며 살림에 흥미를 잃었다.

  몇 군데서 과외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영어와 수학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낮에는 집 근처에 있는 당시 성심 여자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영어 소설을 읽으며 유학 준비를 했다. 태어나서 처음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상 학생이었던 나는 더 이상 다닐 학교가 없었다. 그렇다고 직장도 없었다. 나는 자신을 이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잉여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은행에 갈 때마다 창구에 앉아 있는 여직원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견고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장롱 밑바닥 컴컴한 구석에 떨어져 보이지도 않는 동전이 된 것 같았다.

  교수님이 낙담해있는 나에게 당시 교보빌딩에 있는 외국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한비야 선배를 만나보라고 하셨다. 한비야 선배는 나보다 학번이 훨씬 앞서 있어서 캠퍼스에서는 만난 적이 없었지만, 교수님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서 그 선배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좀 받으라고 하셨다. 나는 모르는 선배를 만나러 교보빌딩으로 찾아갔다. 선배는 교보빌딩 안에 있는 식당에서 내게 밥을 사주며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교수님 말대로 선배는 자신감과 긍정 에너지로 넘쳐있었다.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둥그런 눈과 활짝 웃는 표정의 선배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은 선배 앞에 놓여 있는 정복 대상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선배의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쓸쓸히 돌아왔다. 마음이 너무 허해서 평소에는 가지 않던 만화 

가게에 들러 실컷 만화를 보았다. 후일에 선배가 그리 유명한 사람이 될지는 그때 상상하지도 못했다. 사람이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지 그 선배를 통해 깨달았다.  

  가을에 내가 졸업한 홍대부속여고에서 병 치료로 휴직하신 선생님 대신에 한 학기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후배들 앞에 서서 선생님이 되었다. 교감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나를 소개하시면서 곧 미국으로 유학 갈 훌륭한 선배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학생들은 내가 어떤 선배였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들보다 고작 여섯 살 많은 선배가 선생님이랍시고 나타나 가르치는 게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내가 유학 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곳에서 나는 대학이 내게 무슨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어디 가서 크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국 톱10 대학 중 예일과 하버드, 프린스턴을 제외한 일곱 개 대학에서 내게 원서를 보내주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대학들. 특히 나는 옥스퍼드 대학과 왠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버클리 대학에 가고 싶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매일 입학원서를 썼다. 당시는 컴퓨터도 없어서 타자기로 원서를 쓰고 틀리면 지우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원서 쓰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무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1퍼센트의 자신감도 없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삶과 정면으로 투쟁하는 기분이었다. 누가 이길까. 나를 꺾으려는 삶일까, 나일까. 삶은 수수께끼로 변해 버렸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홍대에 왔다는 해석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도대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그 결론을 알고 싶었다. 되든 안 되든 그 결말이 궁금했다. 

  역곡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꽤 멀었다. 컴컴한 밤길을 걸으며 매일 울었다. 좌절과 절망감에, 배신감에, 세상과 나에 대한 혐오감에 쓰디쓴 눈물이 날마다 쏟아졌다. 원서를 마무리하는 12월에는 거의 제정신을 잃은 사람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 넓은 방이 온통 원서로 가득 찼다. 초인적인 힘으로 타자기 앞에 앉아 원서를 작성해 나갔다. 해를 넘기기 전에 겨우 마지막 원서를 보내고 나서 한동안 정신이 멍해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학을 가지 못하는 내 인생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은 망해버린 것이고, 나는 끝난 거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부터 영어가 쓰인 봉투가 집에 배달되기 시작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매우 유감이지만...”으로 시작되는 입학 거부 편지였다. 하나, 둘, 셋...계속해서 편지가 도착했다. 똑같은 문구로 시작되는 정중하고도 불쾌한 편지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는 4월 어느 따뜻한 날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가고 싶었던 버클리 대학에서 온 편지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뜯어보니 역시 정중하게 입학을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휙 하고 시원한 봄바람이 내 몸 구석구석을 뚫고 지나갔다. 나는 마치 그동안 두 발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실망감과 패배감이 들 줄 알았는데 ‘이제 끝났구나’라는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내 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듯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고통스러웠던 터널이 끝났다. 내 청춘의 가장 큰 좌절과 실패를 그렇게 통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무려 수십 년 동안 대학 입학과 유학 실패의 사건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나는 더 이상 삶에서 성공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를 늘 그 탓으로 돌렸다. 삶이 나를 배반했고 어른들이 나를 기만했다는 생각, 세상이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생각. 나는 돌이킬 수 없이 실패했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 실패에 왜 그리 엄청난 숙명적인 의미를 부여해왔는지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름 긍정적이었던 나의 정신적인 구조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던 것 같다.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사고의 틀이 주조되었고 신앙조차도 그 틀을 바꾸지 못했다. 내가 코아였기 때문이라고 더 먼 과거로 원인을 돌리면 바보 같은 짓일까. 이제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려 한다. 

  괜찮아.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어. 너는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너무 어렸고 세상 물정을 몰랐잖아. 그건 네 통제 밖의 일이었어. 너를 도와준 어른들이 없었던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도 너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제는 자책과 원망에서 벗어나렴. 살면서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한단다. 너라고 그런 일을 피해 가라는 법은 없어. 그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일이야. 억울하지. 이해해. 이제 어른이 된 내가 네 곁에 있어 줄게.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지만 더 이상 너를 탓하지 말고 누구도 원망하지 말렴. 네 앞에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잖니.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련? 내가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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