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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10.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29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


  내가 대학생이 된 후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용돈을 타 갔다. 한꺼번에 주면 다 술을 마셔버리기 때문에 매일 필요한 돈을 주곤 했다. 아버지는 담배 살 돈 외에 딱히 다른 용도로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겠다고 돈을 달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동네 가게에 술값이 외상으로 쌓여갔다. 망원동에 살 때도 집 근처 가게를 지날 때면 아주머니가 “학생”하며 나를 불러세우곤 했다. 역곡의 우리 집은 고가도로 바로 밑에 있는 삼 층 짜리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는데, 일 층에는 그리 크지 않은 마켓이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다 보니 마켓 주인은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의 얼굴을 알았다. 나도 자주 그 마켓에 들렀다. 주인은 아버지의 외상이 어느 정도 쌓이면 나에게 외상 장부를 보여주곤 했다. 날짜와 무슨 술을 마셨는지, 몇 병을 마셨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따 갖다 드릴게요.” 아니면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때로는 내가 먼저 장부를 보여달라고 해서 외상을 갚기도 했다. 

  네 번째 입원 후 삼 년이 되어갔다. 졸업 후 유학을 준비했던 그해였다. 가을이 되면서 아버지의 폭음이 심상치 않아졌다. 외상이 점점 불어나고 만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진로 문제에 몰두해 있던 터라 나는 아버지 상태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여기가 허 씨 아저씨 집 맞아요?”

“네, 맞는데요.”

“아니, 사람을 그렇게 패면 어떡해요? 우리 남편이 지금 아파서 집에 누워 있어요. 와서 좀 봐요.”

“네, 곧 가 뵐게요. 집이 어디세요?”

아주머니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주소를 가르쳐주고 빨리 와 보라며 돌아갔다. 

  나는 혼자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생이 집에 돌아오자 빨리 그 집을 찾아가야 한다며 함께 집을 나섰다. 알려준 주소대로 찾아가 보니 가난한 살림이 역력히 보였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이렇게 힘이 없는 사람을 때렸을까. 

“저, 많이 다치셨어요?”

방 안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앉았다. 얼굴이 맞아서 부어오른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몸을 옆으로 돌려 앉았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면 제정신이 아니세요.”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패는 게 어딨나...”

아저씨는 어린 자식들이 와서 그런지 강하게 항의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병원 다녀오시면 저희가 치료비 물어드릴게요.”

“됐어요, 됐어. 와서 사과했으면 된 거예요. 괜찮으니 그만 가 봐요.”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었고 배우자도 아닌 학생들이 와서 그런지 사과만 받고 우리를 돌려보냈다. 아버지가 사람들과 다툰 적은 많아도 다치게 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점점 더 난폭해지는 건가. 이런 일이 계속 생기면 어떻게 하지. 이제는 어머니 대신 우리가 아버지 뒤치다꺼리를 하게 생겼다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또 삼 년의 공식이 맞아떨어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갈수록 더 심해지는 아버지의 증상에 우리는 이제 스스로 대처해야 했다. 네 번째로 아버지를 입원시킨 후로 큰아버지에게 뇌졸중이 발병했다. 그때 아버지가 큰집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 우리는 듣지 못했다. 아버지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적되었다가 그때 터져버린 것일까. 큰아버지의 뇌졸중 원인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나는 죄스러웠다. 더 이상 큰아버지는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점점 더 난폭해지는 아버지를 두고 볼 수 없어 동생은 아버지를 입원시켜야겠다고 말했다. 이미 대학생이 된 동생은 더 이상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를 걸더니 병원에서 직접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손으로 아버지를 입원시킨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말을 듣겠어?” 나는 아버지의 거센 저항을 예상하고 입원시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제 입원이 아닌 다음에야 아버지를 입원시킬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동생이 아버지에게 가서 입원해야 한다고 말하자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순순히 동생의 말을 따랐다. 이제 다 큰 아들에게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느낀 것일까. 나는 서둘러 아버지의 짐을 챙기고 동생 손에 들려주었다. 

  “다녀오마.”

  “아버지, 치료 잘 받고 오세요.”

예상과 다르게 묵묵히 집을 나서는 아버지, 아버지 손을 붙잡고 입원시키러 가는 동생. 그 모습이 기가 막혔다. 나는 겁이 나서 그 길에 동행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떠난 후 텅 빈 방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펑펑 울었다. 드디어 우리가 아버지를 입원시키는 날도 오는구나. 입원시키러 가는 동생의 마음은 어떨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제발 이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지금이야 정신병동에 가족을 입원시키는 게 큰 흠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자식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나는 그 일이 비극이라고 생각했고, 동생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가다가 뭐가 잘못되거나 아버지 마음이 바뀌어 돌아오면 어쩌나 했다.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 동생이 돌아왔다. 다행히 아버지가 순순히 병실로 들어가더라고 했다. 차마 수고했다,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긴 것에 안도하며, 또 앞으로 얼마나 이런 일을 더 겪어야 할지 진저리를 치며,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가장 슬픈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나는 다음날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 회심이 일어났던 날과 아버지를 입원시켰던 날.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두 번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편입

        

    미국 유학의 좌절은 내게 뭐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다. 다시 학력고사를 준비해 서울대에 가자니 수학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홍대 졸업장을 가지고 사회에 나가기는 싫었다. 아직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느꼈다.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들과 일 년 정도 스터디를 했는데, 학부 때 배운 것이 달라 그 역시 자신이 없었다. 홍대 영문과 대학원에 진학하기는 싫었다. 대학 졸업장을 바꾸고 싶었다. 나는 편입이라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 편입학원이라는 곳에서 상담받고 나 혼자 편입을 준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목표로 정했다. 고3 때 우리 반 반장이었던 친구가 그 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연락해 정보를 얻었다.     

  내가 노어노문학과를 택한 이유는 대학 시절 읽었던 도스토옙스키 영향이 컸다. 국문학이나 동양 문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나는 유럽 문학을 좋아했다. 헤르만 헤세와 앙드레 지드, D. H. 로렌스, 제임스 조이스, 빅토르 위고 등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서는 그 작가들이 그의 등 뒤로 물러났다. 인간의 심리를 도스토옙스키처럼 치밀하고 깊게 파고드는 작가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알료샤, 이반, 조시마 같은 인물들을 다른 소설에서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에서 나는 내 생각이 언어화된 것을 발견했다. 특히 그 인물들이 표현하는 사상의 대담성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이 이런 것까지도 표현할 수 있구나. 도스토옙스키는 문학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작가였다. 나는 일단 러시아어를 배워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원어로 읽어보고 싶었다. 러시아어로 읽는 그의 작품은 어떤 느낌을 줄까.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작가의 꿈을 접었다. 작가가 되기에는 나의 재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뼈저린 자각이 왔다. 내가 아는 탁월한 작가들은 이미 이십 대에 작가로서 재능을 드러내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나는 그들에 비해 작가로서의 재능, 이를테면 언어적 표현능력이나 독창성,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작가가 되는 꿈은 먼 미래로 밀려났다. 대신 문학 공부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는 문학 작품을 보는 비평적인 안목이 있었고, 걸작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식별해내는 눈이 있었다. 문학 연구를 통해 직접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문학 연구가는 작가 대신 대안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다면, 그 또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읽어보고 싶은 문학 작품이 너무나 많았다. 

  1989년 전공이 아닌 어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학생들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듣고 보니 사실이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와 더불어 세계에서 둘 뿐인 분단국이었던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이 영화 같기만 했다. 편입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서 심기일전하는 의미에서 여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베를린을 들렀다. 불과 몇 년 전의 동베를린은 서베를린과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자리에서는 터키인들이 부서진 장벽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로 뉴스에 심심찮게 모습을 나타내던 고르바초프가 1990년에 소련 대통령이 되고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졌다. 그해 소련과 우리나라는 최초로 국교를 수립했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물러나고 옐친이라는 인물이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 역사에서 믿기 힘든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련의 패망은 독일의 통일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아마 그런 세계사적 대전환의 물결 속에서 러시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내게 생겨났는지도 몰랐다. 철의 장막 뒤 멀고 멀게만 느껴졌던 러시아가 지도상 우리나라 바로 위 사실은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홍대 근처에 있는 러시아어 학원에 등록하고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분명히 영어에 있는 알파벳인데 러시아어에서는 발음이 달랐다. 예를 들어, C를 러시아어에서는 ‘에스’라고 읽었고, P를 ‘르’로, H은 ‘느’로 발음했다. 간신히 알파벳을 넘어서니 격변화라는 게 나왔는데, 이 지점이 마의 고지였다. 러시아어를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가 살짝 밀려왔지만, 매일 복습에 복습을 거듭해 그 고지를 점령했다. 점점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재미있어졌다. 

  하필 홍대 근처에 학원이 있어서 아침에 학원 수업을 듣고 홍대 빈 강의실에 가서 하루 종일 공부했다. 졸업생에게도 홍대 도서관은 문을 개방하지 않았다. 편입 시험과 러시아어를 같이 공부했는데, 유학 준비할 때보다 내 마음은 한결 가볍고 희망에 차 있었다.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는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해 가을 홍대 캠퍼스에서 모스크바 대학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포스터를 보았다. 어릴 적 옥스퍼드 대학의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저 대학에 가야겠다.” 나의 꿈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모스크바 대학의 웅장한 건물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해 겨울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 영어 점수가 편입생 중에서 가장 높아 첫 학기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유학 준비를 할 때 쌓인 영어 실력이 한몫한 셈이었다. 26세에 나는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고려대학교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마치 유럽으로 유학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애초에 홍대가 아닌 고대에 갔었더라면...서울대가 아니면 대학같이 여기지 않았던 나의 교만이 이렇게 길을 돌아오게 했구나...고대생이 된 나는 그 자랑스러움에 고대 호랑이 마크가 찍힌 파일을 일부러 들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도 잠시, 나보다 네 살에서 여섯 살 어린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자니 점점 내가 낯선 이방인 같은 소외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번은 과 사무실에서 어린 남학생이 내가 후배인 줄 알고 반말을 썼다. 그냥 귀엽게 봐주긴 했지만 좀 씁쓸했다. 학생들 사이에 낄 수가 없어 ‘이 나이에 내가 뭐 하는 거지’ 싶었다. 쓸쓸했다. 다행히 과에는 나처럼 편입한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와 어울리다 보니 어린 학생들과도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졌다.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는 내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번역한 박형규 교수님이 계셨다. 그리고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던 『인텔리겐찌야와 혁명』이라는 책을 번역한 최선 교수님도 계셨다. 저술이든 번역이든 책을 낸다는 건 나에게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로 보였다. 그런 분들을 직접 보고 그분들의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당시 갓 임용되었던 석영중 교수님, 그리고 고일 교수님 등이 내게 러시아 문학의 세계를 열어준 분들이었다. 나는 훨씬 더 넓은 세상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두 번째 학기에 나는 다음 해 봄학기에 모스크바 대학으로 보낼 교환학생을 뽑는 시험에 응시했다. 아직 러시아어 실력에 자신이 없었지만, 전해에 보았던 포스터를 떠올리며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시험을 보는 강의실은 꽤 넓었는데 열 명 이상의 학생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안녕하십니까?”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나는 눈을 들어 누군가 쳐다보았다. 검은색 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학생이 강의실에 들어서서 시험을 치러 온 학생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거침이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꽤 이색적이었다. ‘좀 특이한 학생이네.’ 나를 제외하고 다른 학생들은 다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지만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그도 자리에 앉았다. 그의 첫인상은 오래도록 내 뇌리에 깊이 박혔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그가 미래의 내 남편이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험에 나는 붙고 그는 떨어졌다. 나는 봄에 모스크바로, 그는 다시 시험을 보아 가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우리가 함께 모스크바에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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