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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11.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 자녀의 회고록

30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교환학생이 되어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이 되어 모스크바로   

  

  1993년의 모스크바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대양에 침몰할 수 있다면 보여주었을 법한 형국을 하고 있었다. 소련의 잔재가 폐허더미가 되어 도시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었다. 우리 네 명의 교환학생은 소위 스탈린 양식이라고 불리는 수십 층 높이의 고딕식 모스크바 대학 건물 중앙의 기숙사를 배당받았다. 으리으리한 외양과는 달리 건물 내부는 미로같이 비좁았고 두 명이 함께 쓰는 방은 칙칙한 초록색 페인트칠이 언제 된 지도 확실치 않았다. 모스크바 대학의 구내식당에는 먹을만한 음식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부엌이 없는 기숙사 방바닥에서 가져간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고 인덕션같이 생긴 투박한 전기 철판에 냄비와 프라이팬을 사용해 음식을 조리했다. 비가 오자 방과 복도 천정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물난리를 겪어본 나에게는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세숫대야를 받쳐놓고 물을 받아내고 나서 비가 그친 후 고인 물을 닦아냈다.

  한국에 전화를 걸려면 1층으로 가야 했다. 공중전화 부스가 일렬로 나란히 놓여 있었고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번호표도 없이 앞에 누가 있는지만 확인하고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내가 당신 다음 차례예요.”라고 말하면 다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때는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다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교환수가 전화를 받으면 한국 번호를 알려주고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야 통화가 가능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치르는 행사였다.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던 한 선배가 달러를 환전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기숙사 몇 동 몇 호에 가면 베트남 유학생이 있는데 그가 좋은 환율로 달러를 루블화로 환전해 준다고 했다. 그 학생은 일종의 암달러상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시내의 은행이나 환전소보다 훨씬 높은 환율을 적용하고 있었다. 나는 돈을 바꾸러 갈 때마다 혼자 가기가 무서워서 남자 후배와 함께 가곤 했다. 문을 똑똑 두드리면 안에서 걸쇠로 걸어놓아 문이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로 거무스름한 베트남 남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얼마?”라고 물으면 “10”이라고 대답했다. 10달러를 환전하겠다는 뜻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환전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5달러, 10달러씩 바꿨다. 그래도 한동안 쓸 돈으로 충분했다. 그는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루블화를 가져와 내가 보는 앞에서 지폐를 세어 보였다. 나는 달러를 건네주고 루블화를 받았다. 환전하러 갈 때나 돌아올 때는 누가 보지나 않을까 늘 신경이 쓰이곤 했다.

  물가가 너무 싸서 돈을 쓸데가 별로 없었다. 특히 책값은 거의 거저나 다름없었다. 시내 서점에 들렀더니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있었는데, 다 합쳐도 가격이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한꺼번에 전집을 통째로 샀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국영 굼 백화점에 자주 들렀다. 지금이야 온갖 고급 브랜드로 꽉 들어찬 곳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살 물건이 별로 없었다. 그 넓은 백화점이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기숙사 내 방 창문에 커튼을 달고 싶어 천을 파는 곳으로 갔다. 물건을 사는 방식이 참 특이했다. 일단 내가 원하는 천을 고르고 가격을 물었다. 점원들은 보통 표정이 무뚝뚝하고 몸집이 큰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손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가격을 휘갈긴 종이를 내줬다. 그러면 값을 치르는 다른 창구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종이를 보여주고 돈을 내면 영수증을 주었다. 다시 원래 물건을 사려던 곳에 영수증을 가져오면 물건을 주었다.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시스템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통용되던 소련식 방식이었다. 영수증을 받는 창구에 줄을 선 사람들이 좀 길면 물건 하나를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러시아에서는 우리나라의 ‘빨리빨리’가 통용되지 않았다. 인생은 길고 시간은 많은데 서두를 필요가 뭐야. 그게 러시아식이었다.

  한번은 선배가 우리 교환학생들을 시내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리 쪽을 자꾸 쳐다봤다. 남자 두 명이었는데 한국 사람 같기는 한데 차림새나 태도가 뭔가 낯설었다. “어, 거기 학생들. 남한에서 왔소?” 북한 사람들이었다. 와, 모스크바에서 북한 사람을 보다니. 배낭여행을 갔을 때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평양식당에서 북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먼저 말을 걸었다.

“네. 북한에서 오셨어요?”

“그렇지. 학생들은 여기서 뭐하오?”

“모스크바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왔어요.”

“교환학생이 뭐요?”

“여기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면 한국 대학에서 점수를 인정해줘요.”

“그런 게 다 있군 그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러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그들도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는 않았다. 과거에는 북한 사람들만 올 수 있었던 모스크바를 이제 대한민국에서도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북한도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별로 멀지 않게 느껴졌다. 우리도 언젠가 통일될까. 스무 살에 교양 국어 리포트에 ‘통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썼던 나는 그새 많이 변해 있었다.

  나는 한국인 선교사가 연 교회를 다녔는데, 큰 공공건물의 강당을 가득 메운 러시아 사람들은 예배가 끝난 후 빵 한 개를 받아 가기 위해 한 시간도 넘게 줄을 섰다. 나는 그 교회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다가 세 명의 러시아 남매를 만났다. 열 살 정도 된 여자아이와 일곱 살 정도 된 남자아이, 다섯 살 정도 된 여자아이였다. 열 살짜리 여자아이는 어린 두 동생을 의젓하게 보살폈다. 아이들의 차림새를 보아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던지 나를 잘 따랐다. 어느 일요일에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모스크바강에 면해 있는 고리키 공원으로 놀러 갔다. 놀이 기구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평소에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큰아이에게 주소를 물어 지하철을 타고 집에 데려다줬다. 그들은 허름한 교외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젊은 엄마가 나와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빠가 없고 엄마 혼자 세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엄마의 얼굴에서 얼마나 삶이 고단한지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을 게 뻔했다. 몇 년이 지나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새 얼마나 컸는지 너무 궁금하고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큰아이는 나를 기억하는 듯했지만 내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 혼자만 아이들을 그리워했던 것이었다.

  당시 모스크바 대학에도 세계적인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가 활동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 모임을 알게 된 나는 한번 집회에 참석했다. 사샤라는 학생이 리더였다. 금발 머리에 적당한 키, 선량한 얼굴에 밝은 테 안경을 낀 학생이었다. 부드럽게 모임을 인도하는 사샤의 리더십에 호감이 갔는데 모임이 끝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했다. 모임 중간에 발레리라는 학생이 자기 삶에 대해 나누며 간증했다. 발레리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이었다. 사샤는 발레리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었다. 발레리가 꽤 긴 이야기를 하는데도 끊지 않는 배려심이 아름다웠다. 발레리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쁨을 이야기했다. 발레리가 매우 믿음이 깊은 학생이며 다른 학생들도 그를 매우 존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임이 끝난 후 발레리는 나에게 다가와 밝게 인사하며 자신도 기숙사에 살고 있다며 방 호수를 알려주고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마침 학기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지방 출신 러시아 학생들은 방학이 되자마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발레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기숙사 방을 찾아갔다. 발레리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나는 순간 코를 막을 뻔했다. 역겨울 정도로 지독한 썩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 보니 맙소사, 온 방 안이 쓰레기 더미와 빨아야 할 더러운 이불, 옷가지로 가득했다. 장애인인 발레리는 스스로 청소와 빨래를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누구도 발레리를 도와주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너무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발레리는 손님이 왔는데도 방안에 진동하는 악취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 더 마음이 저려 왔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사샤가 들어왔다. 사샤는 나를 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발레리가 기차를 타고 멀리 집으로 돌아가는데, 사샤는 그날 발레리를 역에 데려다주려고 시간 약속을 하러 온 것이었다. 나도 동행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둘 다 흔쾌히 승낙했다.

  발레리를 미리 알았더라면 가끔 가서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좀 해줬을 텐데 곧 집으로 떠난다니 아쉽기만 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그런 환경에서 지내는 발레리가 너무 가엾었다. 그래도 사샤가 집으로 갈 수 있게 도와준다니 역시 사샤는 선량하고 믿음직한 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이 되어 발레리의 방에 갔더니 이미 사샤가 와 있었다. 여전히 방은 그대로였고 발레리는 짐을 싸서 역으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발레리가 돌아오면 그 방은 더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차 있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더 이상 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샤는 발레리의 휠체어를 밀고 나는 그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따라갔다. 지하철을 타고 역까지 가서 무사히 발레리를 기차에 태웠다. 고맙다며 손을 흔드는 발레리를 배웅했다. 이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웠다.

  사샤도 고맙다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내일 같이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사샤에게 물었다. 제대로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그렇게 사샤와 헤어지는 게 너무 서운했다. 사샤는 좋다고 했다. 나는 크렘린 안에 있는 극장에서 발레를 하니 붉은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날 밤 마음이 몹시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다. 발레리를 데리고 역으로 가는 사이에 나는 사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샤가 한 사소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면서 혹시 사샤도 나에게 호감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상상했다.

  다음 날 붉은 광장에서 사샤를 만나 크렘린 극장에 갔는데, 아뿔싸. 월요일이라 극장이 휴관이었다. 매일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미리 표를 사지 않아도 당연히 공연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당황하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사샤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사실 공연은 사샤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신앙 이야기, 진로에 대한 나의 고민 이야기 등 편안하게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 이야기하는 내내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사샤는 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기독교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는 게 비전이라고 말하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사샤는 꼭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했던 비전을 들어주고 그것을 격려해주는 사샤와 함께 있는 그 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샤와 나는 주소를 주고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 년 동안 사샤와 편지 왕래를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짝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편지 내용에 내 마음을 살짝 암시적으로 써서 보내면 사샤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솔직하게 고백해 볼까 망설였지만, 설사 사샤가 고백을 받아들인들 무슨 수로 러시아에 있는 사샤와 사귈 수 있겠는가. 너무 터무니없는 공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또 접었다. 사샤가 조금이라도 내게 호감이 있는지 행간을 읽어내려 애를 태웠던 시절들. 몇 년 후 러시아에 가서 사샤에게 전화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을 때, 나는 영원히 사샤를 내 마음에서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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