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대학원 시절
대학원 시절
이듬해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에서 또 영어 점수가 가장 높아서 첫 학기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그런데 학부 때는 성적 장학금을 주더니 대학원에서는 첫 학기 외에는 장학금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등록금을 직접 마련해야 했다. 대학 졸업 이후 쉬지 않고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었지만, 등록금까지 마련하려니 부담이 훨씬 커졌다. 가끔 과외가 끊기기라도 하면 다음 달 생활비는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일 때가 많았다. 제때 공과금을 내지 못해 연체료를 물곤 했다. 이십 대 초중반에 비해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물질적인 면에서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돈이 있을 때는 쓰지만 없을 때는 허리띠를 꽉 졸라매어 아끼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도 신기하리만치 과외가 끊어지면 또 이어지곤 했다.
한 학기는 조교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했다. 내가 조교를 하고 있을 때 대학원 선배인 남편이 종종 나를 만나러 과 사무실에 들르곤 했다. 남편과 내가 서로 알게 된 사정은 이랬다. 남편은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캠퍼스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자기가 성경 공부 리더를 하고 있으니 한번 모임에 와 보라고 했다. 고대에 와서 주위에 믿는 사람이 없어 허전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정말로 알려준 시간에 모임이 있는 강의실에 찾아갔다.
그런데 하필 그날 다른 학생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다른 때는 학생들이 이렇게 안 온 적이 없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자매님하고 둘이 교제하라고 하시나 보네요.”
나는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의 태도가 하도 스스럼없어 금방 무장이 해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만났으니 서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나눠볼까요?”
나는 그러자고 했다. 믿는 사람들이 그것만큼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달리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에 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다. 들어보니 전형적인 모범생 유형의 크리스천이었다. 나처럼 반항하고 고민하고 질문한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저 형식적인 신앙인은 아니었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서로의 신앙은 확인한 셈이었다.
“이제 기도 제목을 나눌까요?”
그가 먼저 기도 제목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교회 성가대에서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연상이라고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연상인데요?”
“다섯 살이요.”
헉. 나는 속으로 놀랐다. 다섯 살 연상이면 부모님이 반대하실 만도 하다 싶었다. 그는 부모님의 태도가 잘못되었으니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의 기도 제목을 물었다. 그가 먼저 공개했으니 나도 사샤에 대해 말했다. 좋아하는 러시아 형제가 있는데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니 기도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과 사무실에 들러 남편은 자기 신상 얘기를 하곤 했다.
“사귀시는 분하고는 어떻게 되어가세요?” 물으면 여전히 부모님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며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샤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그 형제도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후 그는 군 복무를 위해 입대했고 나는 가끔 그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 그도 답장을 보냈는데 군대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부였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는 형제, 자매로서 교제할 뿐 우리가 나중에 부부가 될 거라고는 둘 다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 서로가 이상형과도 거리가 멀었고 그때는 이성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대학원에 들어와서 나는 다른 학생들과 내가 얼마나 가정 배경이 다른지 확연히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다른 환경에서 자라 생각이나 생활하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느끼게 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후배가 밤늦게 밖으로 나왔다. 나는 당연히 버스 타는 곳으로 같이 걸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후배가 “언니, 저 아빠가 데리러 오시기로 했어요.”하고 말했다. 그 순간 저쪽 어둠 속에서 검은색 승용차가 나타나더니 우리 앞에 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점잖은 중년의 남자분이 차에서 내렸다.
“아빠, 저희 과 언니예요.”
“안녕하세요?”
나는 얼떨결에 공손히 인사했다.
“언니, 저 갈게요.”
후배의 아버지는 후배를 정중히 운전석 옆으로 안내하고는 내게 “잘 가요.”라고 말하고 곧 사라졌다. 불현듯 ‘저런 아버지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모습이 정상적인 아버지와 딸의 모습인 걸까. 나의 삶에서는 그런 광경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 평범한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 그날 어찌나 부러웠는지 몰랐다. 비싼 자가용으로 딸을 모셔가는 모습보다도 아버지와 딸의 친밀한 모습, 딸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깨닫게 해주어 마음이 씁쓸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나는 소명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작가가 되는 건 일단 포기했고 어떤 문학 연구가가 되어야 하는 건지, 무엇을 위해 문학을 연구해야 하는 건지 갈등했다. 90년대가 되어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처럼 학계를 휩쓸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문학 연구와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해한 문학 이론을 알아야만 좋은 문학 연구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문학 작품을 창조하는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문학 연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따르고 싶은 좋은 모델이 없었다. 게다가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급속도로 식어가고 있었다. 문화 전체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한 것 같았다. 80년대 영향력 있던 작가들이 소리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 시대 문학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많아진 질문에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중견 소설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장욱 작가가 함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한번 우연히 마을버스를 함께 타고 수업에 가게 되었다. 나는 그가 이미 등단한 작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쩌다 글을 쓰는 데 화제가 미쳤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 회고록을 쓰는 이 시점에도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며, 오랫동안 혼자 품어온 질문이었다. 가령 일기를 쓸 때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일까, 언젠가 읽을 수도 있는 남을 위해 쓰는 것일까.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글을 쓸 때 아무리 내밀한 내용이라도 가상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욱 학우는 “무슨 남을 위해 써요? 나를
위해 쓰는 거지.”라고 답했다. 그랬던 그가 소설가가 되어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니 지금은 어떤 생각일지 무척 궁금하다.
내가 편입한 해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학생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졸업 후 기숙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뉴질랜드로 혼자 이민을 떠났다. 서울대에 입학해 운동권으로 바로 투신해 공대 학생회장까지 했던 동생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학부 때 운동권이었던 학생들이 대학원에 들어왔다. 석사생, 박사생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았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2차, 3차까지 동석하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운동권 출신 학생들은 김영삼 정부에 욕을 해댔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김영삼 대통령은 너무나 무능했다. 국민의 무수한 희생을 치러내고 쟁취한 문민정부에 대한 기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대통령이었다. 나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가 좋았다. 공기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정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난 정치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94년은 충격적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 해였다. 10월 어느 날 아침 한강을 가로지르던 성수대교 상판이 무너져 시민들과 학생들이 사망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뉴스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었다. 그날 바로 눈앞에서 상판이 내려앉는 걸 보았다는 사람, 성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지금까지도 한강을 건널 때마다 그때의 사고가 생각난다.
지존파라는 연쇄 살인 집단이 검거된 사건은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살인 방법의 잔혹성과 그들의 대담한 낯빛은 TV로만 보아도 섬뜩했다. 나는 뉴스 보도를 들은 뒤 자꾸만 그들의 살인 행각이 상상이 되어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대부분 이십 대 젊은이들로 이뤄진 집단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다. 그 조직원 중에 김현양이라는 사람이 가장 대담했다. 그에 대해 쓴 신문 기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왠지 그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가엾었다. 그 연민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을 향한 자조 섞인 그의 미소 속에서 나는 깊은 상처를 입은 여린 심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가 회개하기를 기도했다. 사형당하기 전에 그가 회개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악이 갖는 신비, 그 가공할 힘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여름에는 김일성이 ‘서울 불바다’를 외쳐댔다. 곧 전쟁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서울 상공을 맴돌았다. 밤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북한에서 쏜 미사일이 서울에 떨어져 건물들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는 끔찍한 모습을 상상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것은 한두 사람이 아니라 서울 시민 전체에게 닥칠 수도 있는 재앙이었다. 나는 시편을 읽으며 기도했다. 악을 꾀하는 자를 하나님이 직접 상대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신기하게도 얼마 후 김일성이 사망했다. 불사신처럼 보였던 김일성의 죽음은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켰다. 곧 통일이라도 될 것만 같았다. 북한의 체제가 김일성 한 사람에 의해서만 떠받쳐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1995년에는 또 하나의 기가 막힐 사건이 터졌다. 그날 나는 교대 입구 역 근처로 이사 간 교회 모임에 가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어서 버스에 사람이 많았다. 곧 내릴 때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떡해?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대.”
“뭐? 언제?”
“조금 전에. 라디오 뉴스에 나왔어.”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큰 사건이 일어나면 소문이 급속도로 빨리 퍼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삼풍 백화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바로 교대 입구 역 근처 우리 교회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로 맞은 편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었다. 순간 나는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 거기 있었을까 아찔해졌다. 사고가 난 지점에 가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교회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다행히 우리 교회 사람들은 아무도 사고 현장에 없었다. 그때부터 연일 뉴스에는 그 기막힌 참상이 보도되었고 매몰 현장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리와 백화점의 붕괴. 이 년 연속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우리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나라일까. 어떻게 사람 목숨이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질 수 있는 것인지, 더구나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런 사건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포기했다. 나라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