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지킴이 Jun 12.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32화. 3장 코아에서 아코아로. 아버지를 용서하다

아버지를 용서하다     


  내가 편입하면서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낙성대에서 일 년을 살다가 다시 신림동으로 옮겼다. 망원동에서 십 년을 살았는데, 신림동에서도 거의 십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사이 나는 혼자 러시아로 떠나서 아버지와 동생만 남긴 했지만. 달동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신림동 집은 버스에서 내려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맨 끝에 있었다. 반지하는 아니었지만, 길보다는 조금 낮은 지대에 집들을 지어 놓았다. 다시 좁은 방 두 개와 부엌과 거실이 함께 달린 작은 집이었다. 그래도 이제 시대가 달라져 주인과 함께 사는 일은 과거가 되었다. 

  막내 남동생이 뒤늦게 성악 공부를 시작해서 삼수까지 하더니 서울대에 들어갔다. 기적이었다. 집에서는 동생이 성악을 할 정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생의 선배가 재능을 발견해 주었고 동생은 성악과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재수할 때는 레슨비를 대 주었는데, 삼수할 때는 더 이상 지원해 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성악의 길로 인도한 그 선배가 무료로 레슨을 계속해 주었다. 그렇게 인생의 은인을 만나 결국 생각지도 못한 서울대에 가게 되었다. 서울대 성악 실기시험이 있는 날 시험실에서 나오는 동생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망했어, 누나.” 그 말을 듣고 나는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 서울대는 너무 무리였지. 도전해 본 것만도 대단한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에서 금요일 철야기도 때마다 형제님들이 동생을 위해 꾸준히 기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은 주일이었다. 동생 혼자 발표를 보러 가고 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예배 시간 내내 자꾸 문 쪽을 흘깃거렸다. 언제 동생이 들어올지 몰라서 동생이 들어올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갑자기 예배당 뒤쪽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결처럼 그 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퍼져왔다. “허 철 형제가 붙었대.”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 나는 눈을 들어 뒤쪽을 쳐다보았다. 동생이 들어와 있었다. 동생 옆에서 사람들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구나.’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예배가 끝나자 동생이 내게 다가왔다. 

“누나, 나 붙었어.”

“진짜? 네 눈으로 본 거야?”

“응, 직접 합격자 이름 봤어.”

“아...”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동생의 학교생활이나 학업에 신경을 써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동생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자기 삶을 개척해 이 년 만에 이런 놀라운 일을 이뤄내다니. 나는 솔직히 동생의 재능이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서울대에 못 갔으니 두 동생을 보내셔서 나를 위로하시는 거라고도 해석했다. 나 대신 막내가 갔구나. 장하고 자랑스러웠다. 두 동생은 신림동에서 서울대를 다니고 입대도 함께 했다. 

  이제 오십 대 후반이 된 아버지는 자식들 자랑이 입에 붙었다. 사람들만 보면 “우리 아들들이 서울대 다니는데...”로 시작해 자랑이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이구, 자식들 잘 키우셨네요.”라며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점점 염치라는 것을 잃어갔다. 길에서 아무나 보고 담배를 얻어 피웠고 동전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집에서 누워 있기보다 아침이 되면 밖으로 나갔다.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서 길을 내려가다 보면 길에 아버지가 서 있을 때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치는 게 창피해서 아버지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밉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도로에서 가까운 시계방에 출근하듯이 매일 들렀다. 거기서 바둑을 두고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혼자 지내지 않고 어디라도 가서 시간을 보낼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시계방 옆을 지날 때면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멀리 돌아갔다. 수치심. 그때는 내 안에 수치심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게 코아의 큰 특징인 줄 아직은 자각하지 못할 때였다.

  아버지의 폭음이 재발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약을 꾸준히 먹어서인지 전처럼 심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 가끔 술을 먹어도 푹 쓰러져 자곤 했다. 그 정도만 돼도 괜찮았다. 나는 아버지가 염치가 없어지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약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이도 많이 드셔서 전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 이제 약 그만 드세요.”라며 약을 끊게 했다. 참 무지한 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 끊은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술을 마시고도 아버지의 몸은 아직 술을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시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약 끊게 한 것을 후회했지만 다시 약을 먹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바보, 바보’. 스스로 자책하고 가슴을 쳤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나를 붙들고 하소연했다. “내가 네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런 게 사랑이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괴롭히지만 말지. 엄마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이제 그런 말을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호소도 내 차가운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호소가 계속될수록 내 마음은 더 냉담해졌다. 

  이제 내 나이가 곧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무서웠다. 그런 내가 한심했다. 술에 취해 분노에 찬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칼부터 찾았다. 취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면 나는 부리나케 칼부터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집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어와 칼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칼을 들고 우리를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살살 달래서 칼을 내려놓게 하곤 했다. 그날은 동생이 무섭게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욕을 해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이 아버지 손목을 붙잡더니 칼을 빼앗는 게 아닌가. 이제 칼은 동생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동생 얼굴을 바라보며 무언의 호소를 했다. 이러다가 우리 집에서 뉴스에 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공포가 엄습했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칼을 빼앗기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동생은 칼을 제 자리에 돌려놓으며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는 칼을 찾지 않았다. 다 큰 동생들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만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기도했다. “제발 이제 그만요. 이번이 마지막이게 해주세요. 저 더는 싫어요. 이제 못하겠어요. 여기서 끝내주세요.” 아버지가 다시 입원하는 상황도 싫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을 끝내겠다고 결심하고 빌고 또 빌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증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엑셀레이터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그 기회를 노려 아버지를 데리고 개인 병원에 가서 다시 약을 처방받았다. 다시는 약을 끊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멍청이가 되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버지를 더 이상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용서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8년 동안 여러 번 용서를 시도했다. 용서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보면 아직 분노와 원망이 남아 있었다. 또 용서했다. 그러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기를 넘어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극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받아 아프게 된 사람.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몰라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 아버지도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인간으로 아버지를 대하기 시작했다. 비록 폐인이지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내게 비웃음을 당해도 좋은 건 아니었다. 나도 그럴 자격이 없었다. 딸로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비로소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는 오로지 연민과 동정으로만 아버지를 바라보게 됐다. 그렇게 파란만장했던 나의 이십 대가 끝났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