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날아가자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날아가자
석사논문을 쓸 작품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했다. 대학생 시절 읽었을 때 진리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게 해주었던 그 작품. 그때는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지만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면서 작품의 메시지가 조금씩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독교 소설가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 작품 안에는 세상이 기독교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들이 두려움 없이 다뤄지고 있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신의 정의는 왜 행해지지 않는가.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악한 현실에 기독교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진 게 과연 좋은 일인가. 자유와 행복, 무엇이 더 인간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 존재일까.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라는 것도 사실 뇌의 작용에 불과한 것 아닌가. 도스토옙스키는 이 어마어마한 주제들을 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정말 멋들어지게 녹여냈다. 어린아이들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들고 괴로워서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대심문관 전설’은 읽을 때마다 머리에 쥐가 나고 나의 뇌가 집중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받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을 더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서 논문을 쓰기로 했는데, 워낙 분량이 방대했다. 내가 목표했던 대로 러시아어로 작품을 읽는 데만도 몇 달이 걸렸다. 자료를 찾아 읽다 보니 한 학기가 지나버렸다. 같은 학기에 대학원에 들어온 후배들은 벌써 논문을 다 쓰고 논문심사를 받았다. 작품 분량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는데도 나는 뒤처졌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나의 고질적인 비교 의식, 경쟁심이 고개를 들어 뱀처럼 내 심장을 갉아 먹었다. 삼일 정도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씻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정신이 나가버린 실의에 빠진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머리는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깊은 상처를 입은 자존심은 나를 밑으로, 밑으로 끌어 내렸다.
새해가 되어 정신을 수습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 한 장. 꼬박꼬박 논문이 채워지면서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그 사이 석사과정을 마친 동료들은 하나둘씩 유학길에 나서던지 국내에서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논문을 쓰면서 나도 앞으로의 인생 진로를 또다시 결정해야 했다. 아직도 학업에 목이 말랐다. 이제 러시아어로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연구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초보적인 기술을 익혔을 뿐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갈증이 가장 컸다. 논문을 쓰면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알려면 러시아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 정교 신자였던 도스토옙스키는 정교 사상을 작품에 많이 반영했는데, 개신교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국내에서는 정교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책도, 정보도 거의 없었다. 조금 있다고 해도 책만 가지고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러시아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졌다.
당시 러시아는 소련 해체 직후라 학비나 생활비가 매우 쌌다. 주로 모스크바 아니면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도시였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나는 삼 년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유학 간 선배들을 통해 알아보니 모스크바의 학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비쌌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지를 바꿔야 했다. 그런데 유학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어머니가 옛날에 사두신 시골 논이 생각났다. 그 논을 팔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을 관리하시던 오촌 아저씨에게 논을 처분해 달라고 부탁했다. 논이 팔려서 유학자금을 할 정도의 돈이 마련되었다. 그중 일부는 곧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큰 남동생이 결혼자금으로 쓰기로 했다. 아직 대학생인 막내에게는 돌아갈 몫이 없었다. 나중에 귀국하면 공평하게 삼분의 일 금액이 되도록 내가 갚겠다고 말했다. 외삼촌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유학자금에 보태라고 선뜻 이백만 원을 주셨다.
당시 나는 가족 때문에 나 자신을 많이 희생해왔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가족을 벗어나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을까를 꿈꿨다. 유학을 떠나는 건 이제 동생들에게 아버지를 떠넘기고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동안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동생들이 몇 년만 그 짐을 맡아도 될 거라고 스스로 설득했다. 동생들은 내가 떠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나는 딱 삼 년만 열심히 해서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삼 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여겼다. 언니처럼 의지하던 교회의 자매님들은 나를 백화점에 데리고 가더니 러시아는 추운 나라라며 짙은 갈색 무스탕 코트를 사주었다.
러시아로 떠나는 날, 나를 배웅하러 교회 형제와 자매들이 공항에 많이 나왔다. 아버지는 집에서 작별하고 두 동생만 나를 배웅했다. 아버지는 내가 유학 가는 것이 큰 성공을 하는 것인 양 기분 좋아했다. 막상 공항에서 곧 러시아로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두고 가는 가족, 가족 같은 형제, 자매들과의 이별.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먼 타국으로 떠나, 삼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실감 났다. 배웅나온 자매들도 같이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탑승구로 향했다. “잘 갔다 와, 누나.” 곧 결혼할 큰동생이 이 말을 남기고 뒤돌아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에스켈러이터를 내려가는 동생의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 보였다. 며칠 전 동생은 “누나, 걱정하지 마. 아버지 잘 보살필게.”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본 동생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고 착잡한 표정만이 뒤얽혀 있었다. 나는 외면하고 싶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홀가분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 설렘보다는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이미 시작된 그리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안녕!
모스크바를 경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건 1996년 8월 말이었다. 페테르부르크는 내게 모스크바보다 낯설었다. 교환학생 시절 며칠 여행 삼아 와 본 게 전부였다. 그때 페테르부르크는 정겹고 푸근한 모스크바에 비해 차갑고 쌀쌀맞은 느낌을 주었었다. 북방의 도도한 미인 같이 곁을 쉽게 내주지 않는 도시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는 모스크바보다는 페테르부르크가 더 적합한 유학지였다. 내가 전공하는 도스토옙스키가 페테르부르크의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지만 십 대의 소년이었을 때 페테르부르크에 유학을 와서 그곳에서 작가로 출발했다. 시베리아 유형 십 년, 유럽에서 사 년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지냈고 그곳에서 죽었다.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러시아 작가 중에 도스토옙스키는 단연 으뜸이었다. 그가 살고 죽었던 곳,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 『죄와 벌』과 『백치』, 『미성년』까지 세 편의 후기 장편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그 도시에 유학하는 것은 특권이면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석사 시절 읽었던 단행본을 쓴 선생님에게 지도 교수를 청할 생각이었다. 발렌티나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박사 논문으로 쓴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시학』을 책으로 출간했고, 그 책은 곧 영어로 번역되었다. 책을 읽으며 ‘이분의 제자가 되어야지’라는 결심이 섰다. 알아보니 그분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 아카데미 산하 러시아 문학 연구소에 있었다. 일명 푸쉬킨의 집이라고 불리는 저명한 러시아 문학 연구소였다. 나는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도착하자마자 두 달 정도는 이러저러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은 내게 다른 교수를 지도 교수로 정해줬다. 키가 크고 우람한 체격에 큰 뿔테 안경을 낀 교수였다. 그 교수의 수업을 들어보고 나서 나는 학과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무슨 일인가?”
“저, 지도 교수님을 바꾸고 싶습니다.”
약간 얽은 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그러나 나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이 먼 곳까지 온 건 아니올시다.
“이유가 뭔가?”
“한국에서 올 때부터 지도 교수님을 하고 싶었던 분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러시아 연구소에 계신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입니다.”
“음...”
그가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을 모를 리가 없었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자로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었으니. 자신이 그분과는 학자로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내 요구를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러시아 박사 과정의 시스템은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지도 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대학의 허락을 받고 러시아 연구소를 찾아갔다. 미리 베틀롭스카야 선생님에게 전화해 약속 시간을 잡아두었다. 러시아 연구소는 페테르부르크를 남북으로 나누고 있는 네바강에 인접해 있었다. 대학에서 강변을 따라 걸어 궁전 다리를 건너면 은빛 돔이 보였다. 노란색으로 칠해놓은 건물 앞에는 연구소 이름에 걸맞게 청동으로 만든 푸쉬킨의 흉상이 서 있었다. 육중한 나무로 만든 현관을 열고 안에 들어서면 석고로 만든 유명한 문학 이론가의 흉상이 나를 반겼다. 바닥이고 벽이고 부서지고 파진 홈이 많았다. 당시 대부분의 건물이 그랬듯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재정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유명한 연구소의 내부는 너무나 초라했다. 좁은 연구실 안에 몇 개의 책상이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연구소 소속 연구자들은 대부분 집이나 연구소 근처에 있는 아카데미 소속 도서관에서 작업했다. 베틀롭스카야 선생님도 거의 집에서 연구하고 연구소에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나 일이 있을 때만 나왔다.
선생님과 나는 연구소 1층 로비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먼저 도착해 로비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후 작은 키에 남자 청소년처럼 짧게 머리를 자른 마른 체형의 한 여자분이 나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소냐인가요?”
소냐는 내가 지은 러시아 이름이었다. 선생님은 바지 차림을 하고 목에는 수수한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십 후반 정도 되어 보였다. 이 선생님을 내가 이렇게 쉽게 만나다니.
“네.”
“반가워요. 그래, 당신 논문 제목이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들에서 정교 미학의 측면들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아요. 당신을 제자로 받겠어요.”
선생님은 내 논문 주제에 무척 만족했다. 그 주제를 스스로 정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잘했다며 칭찬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내가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몇 권 적어주었다. 그중 한 권은 러시아 정교 신학자인 플로롭스키의 『러시아 신학의 여정』이었다. 처음 알게 된 그 책을 훗날 내가 번역하게 될 줄은 선생님도, 나도 몰랐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생님을 그렇게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