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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18.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34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지옥의 문 앞

지옥의 문 앞    

 

  나는 정교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면서도 정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빗나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있었다. 정교는 은혜가 아니라 금욕주의와 성사, 선을 행함을 통한 구원을 가르친다고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믿는 기독교에 반하는 가르침이었다. 정교에 대해 알기 위해 러시아에 왔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교의 잘못된 점을 알아내겠다는 의욕으로 불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정교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책만 읽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정교 예배 의식에 참여해 보아도 의식에서 행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정교 신자를 만나서 대화하는 게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마침 먼저 유학을 온 언니가 아는 정교 신자가 있다고 하며 소개해 주었다.

  10월 초 어느 날 전화로 주소를 받아 세르게이 집을 찾아갔다. 키가 크고 살짝 구레나룻을 기른 젊은 남자가 아파트 문을 열어주었다. 매우 흰 그의 얼굴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고요한 그의 눈빛이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처음 보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 시선은 결코 도전적이지도 호기심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환대와 정직함, 그리고 맑은 영혼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기분 좋은 눈빛이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내게 아내와 아이를 소개했다. 그의 아내 역시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여인이었다. 조용히 내게 고개로 인사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어울리는 한 쌍이 있나. 여인의 품에 안긴 아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도톰한 입술을 움직이며 옹알거렸다. 아파트 내부는 별로 가구가 없이 꼭 필요한 세간살이만 갖추고 있었고 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대신 ‘붉은 구석’에 성모상이 걸려 있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집이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하구나. 진짜 정교 신자들이 맞구나.’ 보자마자 세르게이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생겨났다.

  세르게이는 나를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그의 서재 책장에는 정교 관련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정교 공부를 많이 하셨나 봐요?”

“저는 교회의 집사입니다. 지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고 사제가 되려고 합니다.”

‘그럼, 정교를 제대로 알겠구나.’

“정교에 대해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정교에서는 구원을 개신교와 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 차이를 알고 싶어요.”

나는 내가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고, 정교 신자인 그는 분명 복음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정교를 공부하면서 사제가 될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품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건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먼저 거듭나야 하지요.”

그리고 나는 내가 거듭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해주었다. 분명 세르게이가 큰 인상을 받을 것이라 상상하면서. 세르게이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미소나 놀라움, 충격 그 어떤 것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나요?”

“내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전혀 변함없는 어조로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역시 이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구나’라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당신은 거듭나지 않았나요?”

“거듭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어느새 우리의 말은 동어반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정교가 은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으려 한다고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이런저런 말을 해도 세르게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맑은 눈으로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의 눈은 마치 나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게 두려워졌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날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계속 대화를 나눴다. 나는 성경을 펴 가면서 그에게 질문을 했고, 그는 정교 교회의 가르침으로 답을 했다. 그를 설복할 수 있으리라던 나의 자신감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는 내가 모르는 정교 성인들의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개신교에는 이런 성인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개신교에서는 따로 성인이 없어요. 모든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해요.”라고 답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루터, 칼뱅 등 개신교의 신학자들을 떠올려보고 아무리 교회사를 머릿속에서 헤집어봐도 정교 성인에 견줄만한 사람을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갑자기 내가 긍지를 갖고 있던 개신교 신앙이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한번은 세르게이가 나를 자신이 다니는 정교 성당에 데리고 갔다. 예배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속삭이는 소리로 지금 진행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황금빛 옷을 입은 사제가 깊고 낮은 목소리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고,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제의 말을 따라 하고 있었다. 여러 번 보았지만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다. 잠시 후 성찬식이 시작되었는데, 세르게이는 나에게 앞으로 나가라고 말했다. 나는 꺼림직해서 성찬 받기를 거부했다. 나는 정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믿지 않았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그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의미였다.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른 성찬식에 함부로 참여할 수는 없었다.

  세르게이는 예배가 끝난 후 무슨 종이쪽지를 앞에 갖다 냈다. 그리고는 “당신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내가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려 했는데, 그가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니. 나는 구원받은 사람인데... 혼란스러웠다.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는 세르게이의 이 확신은 무엇일까.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매일 눈이 내렸다. 쌓인 눈이 녹기도 전에 또 눈이 내려 도시는 하얗게 변해버렸다. 추위가 시작되었다. 바람이 거세지고 낮이 짧아지고 있었다. 내 영혼 속에 한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세르게이 집에 가기를 중단했다. 마음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몰아닥쳤다. 어쩌면 내가 믿던 개신교의 가르침이 틀렸는지도 몰라. 거듭남이 구원의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나는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사람인지도 몰라. 정교에 진짜 기독교의 진리가 있을지도 몰라. 일단 균열이 생기자 내 믿음은 빙산이 한순간에 쪼개져 바다에 빠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내 영혼을 휘감았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 앞에 지옥의 어두컴컴한 아가리가 벌어졌다. 그 앞에 나는 멈춰 섰다. 한 걸음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옥의 문 앞에서 내 믿음은 마비돼 버렸다.  

    

상실의 시간     


  영적 지반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외로움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국을 떠나 뿌리가 뽑혀버린 이방인이었다. 혁명 후 소련 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베를린과 파리, 프라하로 뿔뿔이 흩어졌던 망명자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러시아의 ‘우수’라는 감정이 나의 혈관을 타고 흘렀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외로움에 정처 없는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잿빛만 보였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이렇게까지 보고 싶을 줄 몰랐다. 얼마 전까지 나의 진정한 집이었던 교회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하숙집 내 방에 주인아주머니가 빨간색 천으로 된 소파 겸용 침대를 놔 주었다.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침대의 기능을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그런대로 사용할 만했다. 나는 그 침대에 누워서 제일 잘 보이는 벽에 동생들과 교회 형제, 자매들의 사진을 붙였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그 사진을 보며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달력의 날짜를 하루하루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계획한 삼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끝이 오지 않을 영원같이 느껴졌다.

  나의 하루는 거의 매일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히 빵과 우유로 식사했다. 가끔 주인아주머니는 러시아식 수프나 죽을 끓여 내게 주곤 했다. 나는 특히 귀리죽을 좋아했다. 거친 귀리껍질과 부드러운 속 알갱이가 어우러진 식감이 러시아 건강식의 맛을 보여줬다. 집에서 지하철 1호선의 마지막 역인 프리모르스카야 역까지 가려면 십 분 정도 걸어야 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는데도 오가며 그들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일명 닭 다리 아파트라고 알려진 건물이었다. 20층이 넘는 네 개의 똑같은 아파트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어져 있었다. 닭 다리라는 별명은 아파트 하단이 마치 닭 다리같이 생긴 구조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설계했는지 독특한 외양을 한 아파트였다. 나는 역에서 마지막 네 번째 아파트에 살았다. 네 개의 아파트 옆으로는 도로가 이어져 있었고 그 도로 옆으로는 인근의 핀란드만으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운하가 파여 있었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공터였기 때문에 유난히 매서운 바람이 그 사이로 불었다. 운하 맞은편에는 긴 아케이드 형태의 아파트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대학으로 가는 트롤리버스나 트램을 탔다. 트롤리버스는 전선에 줄을 매달고 도로를 달렸고, 트램은 궤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즉에 폐기되었을 법한 소련 시절의 낡은 교통수단이었다. 언제 칠했는지도 모르는 어두운 황토색과 칙칙한 자주색,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뜯어진 외관과 딱딱하고 볼품없는 의자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음울한 겨울 풍경. 누가 페테르부르크를 아름답다고 했던가. 북방의 베네치아니, 암스테르담이니 하는 별칭을 가진 여행 명소지만 도시의 이면은 이곳에 꽤 오래 살아야 하는 나의 눈에 금세 포착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페테르부르크를 ‘세상에서 가장 음울한 도시’라고 불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몇 달 살아보니 이해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이미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상태였다. 페테르부르크 국립 대학교는 네바강에 바로 면해 있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했을 때 나는 넓은 캠퍼스에 잔디밭, 곳곳에 젊은 학생들이 오가는 활기찬 모습을 늘 그려왔다. 러시아 유학은 유학에 대한 나의 로망을 산산 조각냈다. 캠퍼스라고 할만한 공간이 없어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인문대학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엷은 녹색으로 칠해진 건물이었다. 쪽문이라고 할 만큼 작은 나무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1층에 책을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살만한 책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유학생들의 일과였다. 오늘 보이는 책을 사지 않으면 다시는 살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책을 사기 위해 여분의 돈을 준비해 두고 있어야 했다. 어떤 날은 책가방 가득 책을 사기도 했다. 내게 꼭 필요한 책을 발견할 때의 반가움을 가끔 맛보았다.

  계단을 올라가면 미로 같은 복도들과 강의실이 나타났다. 러시아 박사 과정은 따로 전공 수업이 없었다. 러시아어와 철학 수업을 일 년 듣고 시험을 치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전공 공부는 알아서 하는 것이었고 논문 방어를 하기 전에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소속감을 잃었다. 늘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살았는데, 수업도 없고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우들이 없다 보니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자연인 그대로의 나를 마주 대해야 했다. 나는 고국 땅을 떠나 소속감도 없이 뿌리 없이 부유하는 미미하고 불안정한 존재였다.

  러시아 문학 학부 수업을 청강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은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수업 시간 내내 미동도 없이, 옆 학생과 대화도 하지 않고 노트에 필기만 했다. 단조로운 교수의 목소리와 필기하는 소리만이 강의실에 맴돌았다. 강의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 때는 뇌에 과부하가 걸려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도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 싶어 열심히 노트에 필기했다. 푸쉬킨 연구자로 유명한 노년의 마르코비치 교수는 건강이 좋지 않은지 늘 목소리가 갈라지고 떨렸다. 설명을 위해 손을 뻗으면 그 손이 덜덜 떨렸다. 대학자답게 구사하는 러시아어가 어려웠다. 때때로 학생들이 노교수의 말에 웃음으로 반응하면 그들만의 교감에 끼어들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나처럼 수업을 청강하는 유학생이 거의 없었다. 나는 유령처럼 인문대학 안을 떠돌았다. 작은 카페에서 샌드위치나 얼큰한 맛이 나는 살랸카로 혼자 식사했다. 가끔 카페에서 아는 한국 유학생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잠깐의 만남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서로의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 철저히 생활의 경계를 지켜 주었다. 한국 유학생이라는 연대감이 없었다.

  수업을 듣는 시간 외에는 대학 건물 끝에 있는 아카데미 도서관에 갔다. 육중한 석조 건물로 제법 큰 도서관이었다. 1층에 들어서면 짐 보관소에 겉옷과 가방을 맡기고 노트와 필기도구만 들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의 중앙 계단은 넓고 천장도 높았다. 중앙 열람실로 향하는 길은 시대를 거슬러 학문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중앙 열람실은 책상을 두 개씩 붙여 네 열로 배치해 놓았다. 열람실 한쪽 벽은 천장까지 고서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열람실 안에는 늘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책상마다 초록색 램프가 놓여 있었다. 낮에도 램프의 불을 켜야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열람실 내부는 어두웠다. 열람실이 가득 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보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학자들이 많았다. 일흔, 여든이 넘어 보이는 등이 구부정한 노학자들이 책을 읽으며 노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내용을 옮겨적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 내내 열람실을 지키는 분들이 있었다.

  아직 노트북이 없던 시절이라 나도 대출받은 책을 읽으며 노트에 필기했다. 책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료를 보는 것은 도서관 안에서만 가능했다. 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도서관. 두어 시간 책을 읽다 보면 다시금 우수가 가슴에 찾아들었다.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일까. 무슨 보람을 바라고 여기에 온 것일까. 이런 외로움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날카로운 비현실의 감각이 폐부를 찔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을 보다가 바깥이 캄캄해지면 도서관을 나섰다.

  유학생들은 가끔 서로를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학생들을 초대해서 러시아식으로 연회를 즐겼다. 샴페인과 케잌, 러시아식 축하 인사. 그러다가 한국 이야기와 소소한 생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유일하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 날만큼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비슷한 처지의 한국 학생들이 많은데 왜 나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까. 나처럼 유난스럽게 외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누가 불러주지 않나. 그 기대로 버티는 내가 초라했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면 지하철역 근처에서 장을 봐서 나만을 위한 간단한 저녁 식사를 차렸다. 양손에 장 본 꾸러미를 들고 아파트 사이로 부는 칼바람을 맞으며 걸어갈 동안 눈이 따끔거렸다. 펑펑 울 수는 없었다. 가정이 있는 유학생 부부가 부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컴퓨터를 켜서 한국에서 온 이메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혹시라도 이메일이 온 게 있으면 읽고 또 읽었다. 몇 줄의 이메일이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 메일함이 비어 있으면 나는 바탕 화면에 깔린 카드 맞추기 놀이를 몇십 분 동안 했다. 그러다 보면 쓸쓸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딱히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 사람도 없었다. 밤에는 러시아 소설들을 읽었다. 적막한 밤에 라디오를 켜두면 누군가 옆에 있는 듯했다. 나는 엘도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 96년의 라디오에서는 80년대의 팝송들이 흘러나왔다. 중고등학생 때 들었던 아바, 보니 엠, 듀란듀란의 노래들을 러시아에서 듣노라니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젊은 남녀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서로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전화 연결이 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듣다 보니 그들의 사연과 선호하는 남녀에 대한 견해가 재미있어 애청자가 되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다가 새벽 다섯 시쯤 되면 잠을 청했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왜 유독 외로움에 취약할까. 정들고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을 떠나면 왜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죽은 듯이 지내는 걸까. 누구나 다 나와 같을까. 나는 좀 유별난 것 같았다.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이 영향을 주는 것일까. 내가 상실에 유독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실의 문제는 내 삶을 어디나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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