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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20.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35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동생의 결혼

동생의 결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의 자유를 찾아 러시아로 왔건만 오히려 그것이 내게 고통이 되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로 번민했지만 빨리 학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동안 나름 희생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집에 전화하면 동생들은 별일 없다고, 아버지도 잘 지낸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러시아 음식만으로 지낼 수가 없어서 된장이니 고추장, 간장, 라면, 김, 미역 등 러시아에 없는 음식을 보내달라고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막내 남동생이 석 달에 한 번 

꼴로 꼬박꼬박 소포를 부쳐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집으로 편지나 소포를 배달해 주지 않았다. 편지나 소포가 우체국에 도착했다는 통지서만 우체통에 들어있었다. 통지서를 가지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나 소포를 찾아와야 했다. 처음에는 역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아 좀 수월했다. 집에 오는 길에 찾아 가까운 거리지만 약간의 돈을 주고 택시로 운반했다.

  그러다가 가야 하는 우체국이 바뀌었다. 핀란드만 바로 앞 바닷가에 있는 아파트 건물이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편지를 받으면 돌아오는 길이 아무리 추워도, 손이 꽁꽁 얼어도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가면서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포를 받아 돌아올 때였다. 도저히 집까지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약간 외진 곳이어서 택시도 잘 다니지 않았다. 소포를 길에 놓아두고 차가 지나가기를 한참 기다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한국에서 보내온 물건들과 함께 온 편지를 읽을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마음은 따뜻했다.

  교회에서 가장 친한 언니가 있었다. 재희 언니. 친언니 이상으로 나를 아껴주고 내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언니였다. 언니에게 자주 편지를 썼고 언니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파트 사이의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걸으며 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언니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마음은 이렇게 포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데 우리를 갈라놓은 거리는 너무나 멀고 멀었다. 

  1997년 2월에 동생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러시아에 간 지 6개월 만에 나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내 일생에서 가장 긴 6개월이었다. 재희 언니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언니를 보자마자 나는 언니를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언니도 함께 울었다. 언니의 첫마디는 “선화야, 다시 돌아오면 안 되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고생을 해? 돌아와서 사법고시 준비라도 하면 어때?”라는 말이었다. 언니의 그 말에 나는 완벽하게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언니 말대로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막내 남동생이 흰색 에스페로에 나를 태웠다. 그새 동생은 자동차 면허를 땄다. “누구 차야?”

“내가 샀어.”

대학을 졸업한 동생은 성악을 가르치며 돈을 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차가 다 생기다니. 비쌀 텐데 제대로 할부를 갚기는 하나 싶으면서도 날렵한 차의 외관과 동생의 능숙한 운전 솜씨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막내도 이제 다 커서 독립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더 이상 누나와 형을 의지하는 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림동 언덕의 집에 들어선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 집의 모습. 이런데도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던가. “선화 왔냐?” 안방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음을 꾹 삼켰다. 나는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라는 말 대신 “이게 꼴이 뭐야,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연신 흐느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내 모습에 재희 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함께 정리를 거들었다. 동생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따 들어올게.”라며 밖으로 나갔다. “언니, 나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정말 아니야.” 나는 울먹이며 언니에게 말했다. 

  그날 저녁 결혼할 동생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말을 했다. 

“나 다시 돌아와야겠어. 집 꼴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러시아에 계속 있어?”

동생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유학 간 게 장난이야? 이러고 살면 좀 어때? 누나 공부나 신경 써. 돌아온다는 말 하면 내가 누나 받아주지 않을 거야.” 

동생의 말은 단호하고 강경했다. 동생도 사실 “그래, 누나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참아내고 동생은 나를 앞으로 떠밀어냈다. 그 말이 준 힘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막상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공부를 포기하는 게 너무나 아쉬워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마음으로는 포기할 수 없겠다는 걸 확인했다. 빨리 공부를 마치는 게 역시 가장 좋은 길이었다. 누나를 자랑스러워하며 기꺼이 짐을 지고 있는 두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나는 이제 동생들의 자랑이 되어있었다. 나 자신에게도 자랑스러운 내가 되어야 했다. 포기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한국에 있는 동안 그리움과 외로움에 굶주렸던 마음이 다시 채워졌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따뜻했고 행복했다. 이제는 전보다는 잘 지낼 수 있으리라,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러시아로 향했다. 이번에는 결혼한 동생과 올케가 함께 나를 배웅했다. “아버님 저희가 잘 보살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올케가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된 동생 부부를 보며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동생의 표정도 처음 내가 러시아에 갈 때와는 달랐다. 동생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얻었다. 막내 남동생이 아버지와 지내기로 했다. 나는 이제는 좀 안정되게 아버지와 동생들이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것이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인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또다시 순진한 기대로 자신을 안심시켰다. 몇 년 후 그 기대는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스베타와 비카

     

  다시 돌아온 페테르부르크는 3월이었지만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4월부터 눈이 녹고 나뭇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봄처럼 들과 산에 피어나는 산수유,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같은 꽃은 하나도 없었다. 북방의 도시라 꽃이 피어날 수 있는 기후가 아니었다. 한국의 봄 풍경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잘 지내기 위해 러시아 생활에 좀 더 깊숙이 스며드는 게 필요했다. 우선 주인아주머니와 더 친해지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 스베타는 사십 대 초반이었다. 머리숱이 많지 않은 금발은 늘 헝클어져 있었고 나이에 비해 주름살이 많았다. 몸은 바짝 말랐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가끔 말할 때 갈라진 소리가 나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징후였다. 스베타에게는 열여섯 살 먹은 딸 비카라는 딸이 있었다. 비카가 어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스베타 혼자 비카를 키웠다. 비카는 스베타와 별로 닮지 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약간 통통한 체격에 갈색 머리칼, 둥근 얼굴에 커다랗고 도전적인 눈동자, 약간 끝이 들려진 코, 야무진 입술. 비카는 내가 러시아 소설에서 읽은 전형적인 러시아 미녀를 떠올리게 했다. 

  우랄산맥 근처에 있는 페름이라는 도시 출신인 스베타에게는 부모도, 형제, 자매 도, 친척도 없었다. 비카가 유일한 스베타의 낙이었다. 두 사람은 때로는 엄마, 딸로 때로는 친구로 지내는 것 같았다. 스베타는 내가 저녁을 먹을 때 같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나의 러시아어 실력이 는 데는 스베타의 공이 컸다. 처음에는 스베타가 하는 말이 너무 빠르고 불분명해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더니 러시아말이 훨씬 잘 들리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 따로 없는 러시아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비카는 학교에 다녔는데, 수업이 끝나도 일찍 집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밤늦게나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나를 마주쳐도 “안녕.”하는 인사 외에 다른 말을 시키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였지만 워낙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새침한 데가 있어서 나도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나는 매달 하숙비로 50불을 냈다. 당시로서는 달러 50불이 일반 러시아 가정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장롱과 책상을 사주는 조건으로 처음에 몇 달 치를 미리 주었더니 스베타는 곧 가구를 사들였다. 러시아는 이사할 때 가구를 다 두고 간다. 그러니 그 장롱과 책상은 내 소유가 아니라 주인집의 물건이 되는 셈이었다. 스베타는 수입이 생겨 신이 난 듯했다. 타일을 사 오더니 직접 욕실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낡은 아파트를 직접 수리하는 걸 좋아하는데,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욕조 하나만 달랑 있고 벽이 시멘트로 발라져 있던 욕실이 점점 파란색, 흰색 타일이 교차하는 화사한 공간으로 변해갔다. 스베타가 오랫동안 바랬던 일 같았다. 내가 스베타의 솜씨를 칭찬해주면 스베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수리가 끝나고 욕조에 몸을 담그니 전에 시멘트벽을 바라보던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욕실 수리뿐이 아니었다. 스베타와 비카가 함께 사용하는 큰 방에는 커다란 장식장과 침대가 들어섰다. 내가 준 돈으로 스베타의 집안 형편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나는 그전에는 두 사람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했다. 스베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할 수가 없다고 했다. 수입원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주는 하숙비로 두 사람이 생활하기 충분한 걸까.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이 풀렸다. 스베타는 조금씩 그들 모녀의 사생활을 내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비카에게는 솜이라는 인도 애인이 있었다. 러시아에 학생으로 왔다가 눌러앉아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고 했다. 솜은 이십 대의 성인이었는데 비카와 사귀며 모녀의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었다. 스베타의 병원비도 내주고 있다고 했다. 비카는 가끔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솜의 집에 가곤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딸의 외국인 애인에게 생활비를 받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 생활비가 무엇을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과연 비카가 그 남자를 좋아해서 사귀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혹시 아픈 엄마 때문에 내키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끔 스베타와 비카는 방문을 닫아놓고 큰 소리를 내며 다퉜다. 나는 부엌에 있기도 민망해서 내 방으로 자리를 피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스베타에게 무슨 일로 싸웠는지 물어보기도 어색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단어들로 짐작하건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솜의 문제로 다투는 것 같았다. 비카는 그와 자주 싸우고 그럴 때마다 그와 헤어지고 싶었는데, 스베타가 말리는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듯했다. 엄마 때문에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는 비카가 가엾어졌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는데도 스베타와 싸우고 나면 솜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했다. 한번 꽃을 사 들고 비카를 찾아온 솜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거무스름하고 기름기가 흐르는 얼굴에 양복을 입은 솜에게는 돈 냄새가 났다. 

  스베타는 왜 딸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일까. 스베타를 이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내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었다. 더구나 러시아 사람들은 남녀관계에 있어 우리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가끔 스베타는 이삼일씩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온 집안이 적막에 감싸였다. 밥을 먹지도, 씻지도 않았다. “스베타, 괜찮아요?” 걱정되어 문밖에서 내가 물으면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라는 답만 돌아왔다. 그런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며칠 후 다시 멀쩡해진 모습으로 방을 나온 스베타는 아팠다고 말했다. “스베타, 어디가 아픈 거예요?” 스베타는 몇 년 전 수술한 후유증이라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비카에게 “엄마가 어디 아프신 거야?”라고 물어도 비카 역시 살짝 눈을 찡그리며 “별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라고 대답했다. 뭔가 비밀스러웠지만 나는 아프다가도 괜찮아지는 모습이 반복되자 적응되고 말았다. 몇 년 후 그 비밀을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그걸 몰랐는지 무신경했던 나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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