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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n 26.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36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디베랴 교회

디베랴 교회    

 

  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다닐 교회를 정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다니던 형제교회가 러시아에도 있다고 들었지만, 정보가 전혀 없었다. 한번은 대학 앞에서 전도하는 외국인을 만나 그가 초대하는 교회에 가보았다. 홀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예배 중간에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서는 “오, 주 예수여.”라고 외쳤다.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지방교회구나.’ 한국에서는 지방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다. 러시아에도 지방교회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는데 도저히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 한번 방문으로 그쳤다.

  나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온 후배가 소개받은 교회가 있다고 했다. 한국인 선교사님이 개척하신 교회라고 했다. 갈 곳이 없던 나는 후배를 따라 그 교회에 찾아갔다. 페테르부르크 남쪽에 있어 내가 사는 곳과는 정 반대 위치였다. 좌석이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홀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앞쪽에 앉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스무 명 남짓해 보였다. 그 넓은 홀이 휑해 보였다. 예배 후 검은색 양복 차림의 키가 작고 마른 선교사님이 나에게 다가와 “반가와요.”라며 손을 내밀었다. 안경 뒤의 작은 눈에서 반기는 빛이 역력히 보였다. 이희재 선교사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선교사님은 그날 예배 후 바로 나와 후배를 집으로 초대했다. 사모님은 한국식으로 저녁을 차려 대접했고 선교사님의 아들인 5학년 종은이는 어떻게 가족이 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연도별로 줄줄이 읊어댔다. 선교사님의 환대에 사람의 정이 그리웠던 나는 바로 교회를 정했다. 그렇게 디베랴 교회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몸담을 교회가 되었다.

  러시아에 갈 때 나는 학생이지만 동시에 선교사라는 의식이 있었다. 러시아는 90년 이후 막 문이 열린 선교지였다. 선교사를 도와 나도 학생 선교사로서 내 역할을 하겠다는 당찬 각오를 했었다. 그러나 세르게이와의 만남으로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린 나는 내 믿음을 다시 수습하기도 벅찼다. 그러나 나의 신앙적인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서운 혼자만의 고민을 안고 구명조끼 없이 망망대해에 떠 있었다. 그저 주일에 예배 후 한국식 식사를 대접받는 게 좋아서 교회로 향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교에 대해 지도 교수님이 알려주신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교는 성경과 더불어 전승이라는 교회 전통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개인의 의견은 교회의 권위라는 거대한 거인 앞에서 난쟁이에 불과했다. 개신교는 궁극적으로 신앙에 있어서 개인의 의견을 긍정하는 교회였다. 정교 관점에서 개신교는 옳은 신앙의 길에서 이탈한 기독교였다. 정교는 개신교가 교회의 뿌리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정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나는 정도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정교로 개종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출발한 개신교의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내가 빠진 궁지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무엇이 옳은지, 둘 다 옳은지, 둘 다 틀리는지 내가 판단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정교의 문제점을 파고들고자 했던 내가 오만했음을 인정했다. 그 오만함으로 지옥의 문턱까지 가는 벌을 받은 셈이었다. 무엇이 진리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겨우 그 무시무시한 의심과 혼란의 저주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나는 조금씩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을 사귀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칠십 대, 팔십 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매번 똑같은 옷차림으로 앉는 자리도 똑같았다. 그분들은 거의 혼자 살았다. 일요일에 교회 와서 사람들을 만나 몇 마디라도 나누고 같이 빵을 먹으며 사람의 정을 느끼는 게 사는 낙인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눠보면 믿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소련 때보다 생활이 나빠졌다며 “그래도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라고 말했다. 

  소련 해체 후 가장 고통받는 세대는 노인들이었다. 연금이 대폭 줄어들어 생활이 어려워졌고 평생 익숙하게 살아왔던 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젊은 사람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서 살아남으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요구였다. 노인들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나는 인생의 말년에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이 일어난다 해도 소련의 붕괴처럼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련 해체 후 얼마나 사회가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는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는 잘 몰랐다. 페테르부르크에 와서야 대변동의 여파가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몇 주에 한 번씩 집 없이 떠도는 사샤라는 남자가 교회에 찾아왔다. 검은 머리에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늘 똑같은 옷을 입고 잿빛 배낭 비슷한 것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 배낭에 그의 살림살이가 다 들어 있었다. 몸을 씻지도 않아 사샤 곁에 가면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이도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제대로 씻고 머리를 자르면 의외로 젊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사샤는 예배 후 제공하는 빵을 먹으러 가끔 나타났다 한동안 사라지곤 했다. 그가 어쩌다 떠돌이가 되었는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가지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했다. 그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지만, 개인적인 질문을 하기가 무례한 듯하여 그저 피상적인 얘기만 나눴다. 하도 행색이 남루해서 안전하기만 하다면 집에 데려가서 몸이라도 씻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결국 그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한 번만이라도 집에 불렀다면 그의 기구한 삶에 대해 들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젠가부터 더 이상 사샤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 후회했다. 어쩌면 그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강도 만난 사람인지도 몰랐는데.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아니었다. 사샤는 내게 길을 잃은 90년대 러시아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에 남았다. 그는 지금 살아있기나 할까. 살아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 친구


  우정이 없는 인생은 사막이다. 사막이었던 나의 삶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지연은 나보다 몇 년 전에 유학을 온 학생이었다. 이미 페테르부르크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마치 러시아가 제 이의 고국인 양 자연스럽게 그 삶에 녹아들어 살고 있었다. 지연은 나의 유학을 도와주었던 언니와 한집에 살고 있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그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준비해 먹고 잠도 자곤 했다. 초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나의 외로움을 잠재울 수 없었다. 지연은 언니와 내가 대화할 때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곤 했지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 역시 지연이 낯을 가리는 듯해 선뜻 다가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지연은 말하길, 그때 내가 차가워 보였고 자기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일 년이 지날 때쯤부터 지연이 나에게 조금씩 자신의 신앙적인 고민을 이야기했다. 지연은 늘 공허함을 느낀다며 신앙을 갖게 된다면 그 공허함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왜 자신이 죄인인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했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지연에게 물어보니 그때 내가 성경 공부를 제안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로마서를 공부했고 나는 지연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했다. 지연은 질문이 많아졌고 내게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딱히 전화해서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기에 지연이 걸어주는 전화가 반가웠다. 지연이 던지는 질문들이 내게는 익숙한 것들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지연은 나를 ‘선화 씨’라고 불렀다. 나도 ‘지연 씨’라 부르며 존댓말을 썼다. 

“나는 선화 씨처럼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요. 그런 경험이 있으면 믿기가 쉬울 텐데...” “천국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막연하달까...” 

  지연은 확실한 믿음을 갖지 못해 괴로워했다. 분명 하나님은 있는 것 같은데 성경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지연의 성경 교사이자 신앙 상담자 역할을 했다. 지연은 진실했고 절박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나는 못내 기뻤다. 하루하루 대화가 쌓여갔다. 나도 어떻게 지연의 신앙적인 고민이 해결될지 궁금했고 그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이 전화를 걸어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다. 

“정말요? 어떻게요?”

당시 우리는 함께 디베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타냐라는 고려인 여자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불과 한 달밖에 안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지연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없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타냐가 그렇게 빨리 세례를 받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마음이 상했다고 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하나님에게 불평하며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면서 왜 자신이 죄인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한밤중에 눈물이 터지며 회개가 되더란다. 나는 지연의

말을 듣고 기쁘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감정일 수도 있겠다 싶어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연이 변하기 시작했다. 관심이 세속적인 일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고 대화가 달라졌다. 나는 지연과 영적으로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심과 질문으로 일관하던 지연이 이제는 믿음을 고백하고 감사로 가득 찬 말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에 와서 그 누구와도 영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나는 비로서 러시아에서 친구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지연도 가슴 아픈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친구였다. 나와 지연은 사정은 달랐지만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었다. 지연도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자 아버지가 인간으로서 연민의 대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에 관한 한 나보다 훨씬 빠른 변화였다.

  우리는 성격이 서로 달랐다. 나는 이성적이고 독립적이고 판단력이 빨랐다면, 지연은 감성적이고 의존적이며 조금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나는 냉철했던 반면, 지연은 따뜻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지연은 나의 충고를 구하고 나에게 많이 의지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의 대상이 되는 데 익숙했던 나는 지연과의 그런 관계가 편하고 좋았다. 드디어 나의 외로움이 지연으로 인해 걷히고 목구멍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도 사라졌다. 단 한 사람으로 인해 나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지고 생활이 변했다. 이제 러시아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지연은 자주 내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공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서운해했다. 처음에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던 나는 점점 나에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고형이고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내가 공감 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던 건 지연의 덕분이었다. 지연은 나를 알아가면서 의존적인 데서 조금씩 벗어나 독립적으로 변해갔다. 친구란 서로를 보완해주고 부족함을 메워주는 존재임을 지연과의 관계를 통해 처음 경험했다.

  어느 가을날 저녁 전화기를 들자마자 지연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왜? 무슨 일이야?”

지연은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흐느낌 가운데 지연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돌아가셨대.”

그리고 다시 지연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내가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위로의 말이 필요하랴. 지연의 곁에 있어 주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연의 집으로 달려가니 이미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지연은 침대에 주저앉은 채 몇 시간을 울었고 나는 옆에서 같이 울다가 지연의 등을 두드려 주다가를 반복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시던 아버지가 집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을 동생이 발견했다고 했다. 타국에서 혼자 지내던 지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제 예수님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얻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늘 걱정이던 나는 친구의 슬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으로 지연은 고통스러워했다. 

“자책하지 말아...다 용서해 드렸잖아.”

그러나 아버지와의 새로운 관계는 영영 불가능해졌다는 그 통렬한 아픔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내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지연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빨리 귀국 준비를 해서 한국으로 떠났다.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지연은 일 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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