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IMF와 모라토리엄
IMF와 모라토리엄
1997년 말 한국에 IMF가 터졌다. 그 여파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곧 감지되었다. 1달러에 800원 정도이던 환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더니 1,600원 고지를 넘겼다. 그것은 유학 생활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몇 학생들이 귀국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아는 사람이 떠났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다들 생활비를 아끼고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한 달 한 달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인터넷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한국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한다는 뉴스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는데 나는 가족이 보내주는 돈으로 외국에서 편안히 생활한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러다 1998년에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IMF가 뭔지, 모라토리엄이 뭔지 처음 듣는 용어의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세계 경제가 한바탕 요동을 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충격은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매일 물건 가격이 올랐다. 심지어 아침과 저녁의 가격이 달랐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루블화가 폭락하면서 1달러당 6루블이 16루블까지 뛰었다. 화폐개혁이 시행되어 신권 지폐가 찍혀 나왔다. 눈에 보이는 화폐는 종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그 배후에서 진행되는 진짜 매커니즘이 뭔지 경제에는 문외한인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물가가 상승한 이상으로 환율이 올랐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IMF의 피해를 만회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이번에는 고통받는 러시아인들의 나라에서 나만 편하게 지낸다는 죄책감이 생겼다. 가을에 새 학기가 되어 등록금을 내야 했다. 나는 대학에서 지도교수님이 소속된 러시아 문학 연구소로 학교를 옮긴 상태였다. 이전에는 달러로 등록금을 받던 학교에서 그해는 루블로 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당시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변동했다. 시중 환전소는 제 기능을 상실했다. 과거에 증권거래소로 사용되던 큰 건물에서 암달러상들이 달러를 매입하기 위해 날마다 진을 치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루블로 환전해 등록금을 내면 이득이었다. 환율이 유리하면 차액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배낭 하나를 준비해 증권거래소로 향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건물 내부는 마치 운동장같이 넓었다. 그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호객하는 암달러상과 그들과 거래하는 고객들의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살짝 겁이 났지만, 이미 경험이 있는 다른 학생들이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줬기에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 건장한 남자들, 때로는 여자들도 내게 다가와 환율을 말해주고 얼마를 바꾸려고 하는지 물었다. 그렇게 건물 안을 돌아다니다가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사람을 만났다. 3천 달러면 큰 액수였다. 적은 금액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바꿔주었지만, 그렇게 큰 금액은 남이 보지 않도록 건물 안에 따로 마련된 방으로 가서 액수를 확인하고 바꿨다. 그 사람은 작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사람들이 밖에 많으니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내 눈앞에서 루블 더미를 꺼내서 일일이 세어 보여주었다. 그렇게 많은 지폐는 생전 처음 보았다. 나는 3천 달러를 건네주고 배낭에 루블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나는 아기를 안듯이 배낭을 앞으로 맨 후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한국에서도 전세금을 주인에게 주러 갈 때 운동화 바닥에 수표를 깔고 전철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긴장감이 다시 찾아왔다.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이 벌렁거렸다. 마침내 학교 건물에 도착해 문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서 마음이 놓였다. 사무실로 가 배낭을 열고 루블화를 꺼내자 여자 직원이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고생 많이 했다는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러시아 사람들은 상황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일을 겪어내는 그들이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고국의 위기에서는 비켜나 있고 타국의 위기는 방관자로 지켜보게 된 그 일 년이 내게 준 중압감이 방아쇠로 작용한 걸까. 오래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드디어 나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라도가
1998년에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왜 하필 그해에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각종 신경증 증상이 연이은 파도처럼 이 년 동안 나를 덮쳤다. 히틀러의 생일이 있는 4월에는 러시아 극우주의자들인 스킨헤드가 대도시 중심으로 외국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일들이 잦았다. 한국 유학생이 당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한 달 동안 도서관에도 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지냈다. 좀 무서웠지만 그때까지는 견딜만했다.
모라토리엄이 시작될 무렵 여름, 지인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에서 세 시간 동안 자동차를 달려 라도가 호수라는 곳을 갔다. 러시아에는 큰 호수가 몇 개 있는데 바이칼, 라도가, 오네가 호수 등은 바다로 분류될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20여 명의 사람이 배를 타고 일박이일 여정으로 라도가 호수 안에 있는 섬을 찾아가기로 한 여행이었다. 평소 배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설레고 흥분되어 있었다. 그날이 주일이었지만 뭐, 한 번쯤이야 싶었다.
호숫가에 20명 정도를 태울 크기의 고깃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은 선배 부부와 나, 또 다른 여자 유학생, 그리고 선배의 지인인 남성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라도가 호수는 평온하고 잔잔해 보였다. 서늘한 전형적인 러시아의 여름 날씨였다. 나는 배에 올라 신이 나서 2층 갑판 앞쪽으로 갔다. 바람을 맞으며 배가 전진하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 싶었다. 섬까지 가는 데는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한 지 십여 분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크게 솟구치더니 다시 푹 가라앉는 느낌이 찾아왔다. 이게 뭐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갑자기 거칠어진 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배는 양옆으로 사정없이 요동치고 갑판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배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여행을 주선한 선배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선배도 긴장한 표정으로 선장에게 가서 의견을 물었다. 러시아 선장은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항해를 계속했다. 노련한 선장의 판단이니 믿음이 갔을까. 처음에 놀랐던 다른 사람들은 이내 안정을 찾고 십 대 남자아이들은 심지어 재미있어하며 배 앞머리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즐겼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느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만 극도의 패닉 상태가 되어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간신히 기어서 선실로 들어왔다. 조그만 창밖을 살펴보니 주변에는 다른 배들이 보이지 않았고 온통 넘실대는 물뿐이었다. 아무리 멀리 보아도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를 삼킬 듯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파도를 보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서 물에 빠져 죽는 건 아닐까. 동생들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타국에 와서 호수 한가운데서 이렇게 죽기는 싫어,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 기도만 반복했다. 주일에 여행 갔다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면 얼마나 창피할까. 그 와중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별 호들갑을 다 떤다고 생각할 것 같아 공포심을 숨기고 가는 내내 두려워 떨었다. 그런 상태로 끔찍한 세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섬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내 얼굴은 완전 사색이 되어있었다. ‘내일은 어떻게 돌아가지?’ 그 걱정에 여행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작은 섬 주변의 물은 언제 파도가 쳤냐는 듯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 사람들 뒤를 따라 숲으로 가 버섯을 땄다. 러시아의 여름에는 숲에서 버섯을 따는 게 우리가 봄에 나물을 캐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띤다. 자연에서 건강하고 싱싱한 먹거리를 직접 채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독버섯을 먹고 죽을 수도 있으므로 꼭 버섯을 잘 아는 사람들과 함께 다녀야 한다. 몇 시간 동안 서늘한 숲에서 거닐며 버섯을 따다 보니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몇 명의 남자들은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저녁에는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을 숯불에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백야였다. 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북쪽이어서 그런지 한밤중에도 하늘에 파란색 물감이 엷게 칠해져 있었다.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지며 러시아의 여름밤이 무르익어갔다. 내일이 걱정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러시아의 삶에 녹아든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직접 딴 버섯과 잡은 생선으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 식사하는 도중 한 여자가 선장에게 “어제 긴장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선장은 솔직히 긴장했다며 출발
전에 출항을 자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괜찮나요?”라고 내가 물었다. 선장은 미소를 띠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나는 파도가 세지 않은지 호수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보이긴 했지만, 배들이 다니는 걸로 봐서 어제보다는 파도가 덜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는 내내 세 시간 동안 배 앞쪽에 앉아있었다. 전날보다는 덜했지만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렸다. 앞쪽에 앉으면 배의 흔들림이 덜 느껴졌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절대 배를 타지 않는다. 강에서 잠시 유람선을 탈 때조차 긴장한다. 먼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때 나는 내가 좀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에 있던 사람 중에서 왜 나만 그렇게 극심한 공포를 느꼈을까.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공포증이라는 정체 모를 괴물과 계속 마주쳐야만 했다.